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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ca Oct 25. 2022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다

내 욕심대로 하는 존중 없는 사랑에 대해 

     

  큰애는 놀 땐 아주 활발해 보이지만, 기질적으로 섬세하고 차분하다. 슬픔, 화를 참고 속으로 삭인다. 엉엉 소리 내어 울지 않고 눈물을 말없이 흘릴 뿐, 소리치며 짜증을 낼 줄도 모른다. 원래 말이 조용조용 느린 편인 아이는 8살 때 남편과 내가 말다툼한 것을 목격한 후 무슨 이야기를 할 때 한 단어를 두, 세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며 이야기를 잘 끝맺지를 못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 후로 아들의 작은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지는 것 같은 느낌에 시달리게 되었다. 


  분명 아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내 앞에서 속 시원히 말을 못 하고 혹시나 말을 잘 못해서 혼날까 눈치를 보는지, 적절한 단어를 고르는 탓인지 말이 한도 끝도 없이 느려지는 아이를 보면 걱정이 됐다. 자신감 없는 말투가 점점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이와 의미 있는 대화를 하고 싶어도 아이가 입만 열면 불편한 이 감정 때문에 강아지가 제 꼬리를 문 것처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괴로워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내 아이인데 나는 엄마인데 도대체 왜 이럴까? 한편으로 내가 아이에게 폭군 같은 강압적인 엄마이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더 고통스러웠다.            


  어느 날 친구의 남편에 대한 하소연을 듣다 보니 생각이 났다. 10년도 더 전에 돌아가신 내 친정아버지! 아버지는 다혈질이었다. 그러한 아버지의 성미는 주위 모든 사람들을 눈치 보게 만들었다. 화가 나면 이성을 잃을 때가 많았다.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나는 평생 어머니에게 유독 심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싫었지만 나도 모르게 내 안에는 아버지가 남자 상의 기준이 되어있었나 보다. 그 기준에는 강한 책임감, 카리스마, 누구도 꼼짝 못 하게 하는 언변과 강한 목소리도 포함이 된다. 마음속 아버지를 기준으로 아들을 평가하고 재단하고 있었다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그동안 이유를 몰라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웠던 감정이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가신 후로도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존재하고 있었던 아버지. 남편과 친정아버지는 180도 다르다. 자상하고 가정적인 남편은 나와 다른 사람이니까 오히려 내 마음대로 굴면 나에게 실망하고 떠나가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닮아 부정적인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잘 욱하는 내가 가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아들에게는 그러지 못할까. 내 소유물이라고 생각해서, 힘이 약하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만만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남편의 온화한 기질을 좋아하면서 왜 아들은 강하기를 바랄까? 왜 가족에게 내 이기심만을 내세우며 욕심부리고 있을까? 


  아이는 엄마인 내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이니까. 내가 옳고 내 기준이 정답이고, 아이는 존중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친정아버지와는 많이 다른 아이에게 왜 넌 내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거냐며 불만을 품은 채로 아이를 바라봤던 게 아닐까? 나는 무엇이 두렵고, 불안했던 걸까? 왜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음껏 사랑하지 못할까? 엄마라면 그 어떤 결점이 있더라도 내 아이이기 때문에 고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데 말이다.       

   

  IMF 시절 무조건 공무원이 되어 빨리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강한 바람과는 달리 미술학도의 꿈을 포기하지 못했고 결혼도 하지 않고, 프리랜서 비정규직으로 20대를 보냈던 나.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자랑스럽지 못한 모습만 보여드리다 결국 아버지를 암으로 이른 나이에 보내드려야만 했다. 공무원도 되지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한, 아버지 눈에 불안하기 짝이 없는 내 모습만을 알고 가셨기에 아직까지도 뭔가를 증명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허기짐이 남아있다. 한 번도 아버지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의 차를 정리하다 접이식 미러에 꽂혀있던 오래된 나의 손 편지를 발견했다. ‘아빠가 자랑스러워하는 딸이 되고 싶어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라고 어린 시절의 내가 말하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던 가슴속 기왓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텅 비고 쓰라려 차 안에서 혼자 오래 울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상처받고 혼란스러웠던 그때 그 아이가 10살 난 아들을 마주하고 있다. 해결되지 않은 그때 그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품은 채로.


  많이 늦었다 해도 지금이라도 나는 아들을 위해 새로워지고 싶다. 미대를 가지 못했다고, 공무원이 되지 못했다고 괴로워하지만 말고 이렇게 무엇이 되지 못했어도 괜찮다고 나도 내 삶을 사랑할 권리가 있다고 나에게 외치고 싶다. 고통스럽더라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한 후 아이를 새롭게 마주하고 싶다. 아들이 엄마를 싫어하도록 만들기 싫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아이로 만들기는 더더욱 싫다. 내 안에 아버지를 깨달은 날 밤 아들의 손을 잡고 나란히 누워 얘기를 했다.      

“아들, 엄마가 무서워?” 

“응, 엄마가 화내는 게 제일 무서워. 화는 좀 안 냈으면 좋겠어.” 

“너도 알다시피 엄마, 아빠는 서로 화내고 싸워도 그날 화해하고 또 잘 지내. 서로 다른 사람이라 생각이 달라서 싸울 수도 있어. 싸우고 나면 서로 조심해야 하는 것을 알게 돼서 예전보다 더 잘 지낼 수 있어. 그리고 엄마 아빠는 화를 내더라도 서로 사랑해. 그걸 잊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 

“그래도 화는 안 냈으면 좋겠어. 난 엄마, 아빠가 좋기 때문에 화가 나도 화를 안 내는 거야. 그리고 화 안 내겠다고 약속도 해줬으면 좋겠어.” 

“그래, 그 정도로 화내는 게 무섭고, 싫었어? 엄마가 노력할게.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해. 사랑해.”

“응, 알았어. 나도 사랑해, 엄마.”      


  아들이 안아줬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그치면서 아이 마음을 아프게 해도 엄마를 사랑한다며 안아주는 아들을 보며 다짐한다. 나는 아무도 아니어도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위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가족을 위해서라도 행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좀 부족해도 이 세상 주인공은 나이고 그런 나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내 아이이기 때문에 어떤 내적 장애가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 나와 너를 존중해야지. 사랑할만한 이유가 없어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니까, 내 아이이니까 사랑하고 소중히 해야만 한다. 서툴지만, 때로는 힘겹기도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법을 아이를 통해서 배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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