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인생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야.
그림 그리는 일이 좋아 그림을 그렸다. 바깥에서 지친 마음, 집에 돌아와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다 잊을 수 있었다. 연필로 펜으로 내 마음대로 그리고 싶은 것들을 자유로이 그려댔다. 그러다 그림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은 거다. 그림 전공을 한다던지, 그림으로 돈을 번다던지 하는 그런 일들을. 그래서 이런 일 저런 일을 벌여보며 나의 젊은 날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좋아서, 아무런 목적 없이 재미로 그리던 그림을 성과를 위해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를 밀어붙이며 내 마음과 같지 않는 것들을 해대다 보니 재미가 없어졌다. 나는 더 이상 연필을 붓을 들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되었다.
중년이 되어 노트북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가능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살면서 몇 번의 부침을 겪으며 나도 모르게 쌓여있던 묵은 감정들을 글을 쓰며 해소하기 시작했다. 침침한 눈을 비비며 간신히 완성한 몇 편의 글들을 내 몸 밖으로 내보내고 느끼는 후련함이 마음에 들었다. 계속 읽고 쓰다 보니 또 욕심이 났다. 이번엔 책을 써보고 싶어졌다. 몇 년을 매달려보았다. 이번에도 결국 목적을 갖고 쓰는 글이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내 상처를 도려내어 주제를 삼아 글을 쓰다 보니 걷잡을 수 없이 피폐해져 갔다. 지난여름 운전을 하다가 신호를 받고 서있었는데 내 앞을 지나가는 만삭의 임산부를 바라보다가 눈물이 났다. 아무런 걱정할 일도 부족한 것도 없었던 여름휴가 땐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괴로워 눈물이 나고 그런 나를 추제 할 수가 없어서 괴로웠다. 우울증이었을까. 이대로 감당이 안돼서 당장 글 쓰는 것을 멈추었다. 글과 전혀 관련이 없는 행동을 오랫동안 하고 나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운동하고, 사람을 만나고,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면서 점차 괜찮아졌다.
좋아하면 그냥 좋아하는 마음 그대로 그냥 존중할 수 없을까. 왜 항상 그것으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게 될까. 목표를 갖고 이루기 위해 매진하며 그렇게 열정을 불태우며 살아가는 삶만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누구나 그렇게 강조했으니까. 단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의미 없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은 나는 그림과 글을 좋아하는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못하고 이용만 하다 결국 그림과 글에게서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할까.
언제나 결과물과 성과가 있어야 그래야 내 존재가 증명된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좋아했던 마음들을 쉽게 외면해버렸다. 그러다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졌다면서 헛헛해했다. 그렇지만 내 존재는 성과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나 스스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을 그대로 내가 존중해주는 것. 그림 그리고 싶을 땐 그림 그리고, 글을 쓰고 싶을 땐 글을 쓰고, 속상하고 힘들 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나를 지켜내고 싶은 그 마음. 그것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 나는 너무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며 살아온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인정을 받고 싶은 것도 자연스러운 하나의 욕구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고 아껴주려고 하는 태도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존중할 줄 아는 태도를 지켜나갈 수 있을 때 내 존재를 이 세상의 어느 한 지점에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냥 그림을 계속 그리고, 글을 계속 써라. 그걸로 뭔가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너무 애쓰지 말고, 좋아하는 만큼, 하고 싶은 만큼 즐길 수 있는 태도를 간직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누가 머라고 하건 또 불안해지건 상관없이 내가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을 성실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누군가가 이런 나를 알아줄 수도 있겠지. 연결되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보다 내게 지금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만큼 만이라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내려 꾸준히 성실하게 나의 자리를 지켜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