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은 Hola Señorita
- 눅잔, 요즘 뭐 해?
- 나 지금 농한기* 여행 왔어! 3개월 간 스페인이야 :)
* 농한기 : 농사일이 바쁘지 않은 겨울·이른 봄 등의 한가로운 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나는 농부다. 지인들과 함께 살며 농장을 꾸려나가고 있다. 2023년 2월부터 시작한 우리의 한 해 농사는 11월을 기점으로 마무리되었다. 겨울엔 작물이 자랄 수가 없어서 농부는 가을걷이 한 작물을 저장하거나 (메주 띄우기도 그중 하나다), 씨앗을 관리하거나, 다른 농부들과 네트워킹을 하며 지낸다. 그리고 몇몇 농부들은 여행을 간다.
예전에 WWOOF우프를 통해서 봉사하며 인연이 생긴 농부님도 겨울이면 매년 자신의 농장에 봉사 왔던 외국인 친구들의 나라나 도시로 여행을 가곤 했다. 그 모습이 참 부럽고 좋아 보였다. 그래서 농부가 된 첫 해인 2023년, 나는 농한기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대신, 그냥 편하게 쉬는 여행이 아니라 농사여행을!
이번 여행은 12월 초부터 2월 말까지 스페인에 머물면서 공동체와 농장들을 방문하는 것이 주된 활동이다. 계속 직장을 다녔으면 퇴사를 하고서야 가능한 일정이지만, 농사가 본업이 되니 이 기간은 오롯이 나를 위해 쓸 수 있게 됐다. 대학 때 우연하게 가게 된 스페인 교환학생 기간을 계기로 캐리비안 국가에서 1년간 머물렀고, 그 이후부터는 몇 개월씩 로컬을 탐색하면서 다니는 게 나의 여행 스타일이 되었다.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여유롭게 즐기는 것도 좋은 여행 방법이겠지만, 현지를 좀 더 생생하게 느끼고 나와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는 게 나에게는 더 잘 맞았다. 이런 여행은 기간이 길어도 호텔 여행 1주일 다녀오는 것보다 비용이 보통은 저렴하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넉넉하지 않지만 시간은 (다소) 넉넉한 나에게 딱 맞는 여행 방법이다.
여행 몇 개월 전부터 어떤 곳에 갈지 Workaway워커웨이와 WWOOF우프 스페인을 샅샅이 찾아봤다. 키워드는 Permaculture/Permacultura퍼머컬쳐, Community/Comunidad커뮤니티 그리고 Eco에코. 우리가 지향하는 농사와 삶의 방식들로 살고 있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 추천으로 뜨는 스페인 퍼머컬쳐 농부나 공동체에게 연락을 하기도 했다.
Hola, 나는 눅잔이야.
너의 농장과 공동체가 너무나 멋져서 관심이 생겼어.
혹시 이번 겨울에 방문해서 너를 도울 수 있을까?
나도 한국에서 지인들과 퍼머컬쳐 농사를 하고 있어서, 너를 도우며 배우고 싶어!
몇몇 농장들에게 긍정적인 답변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때때로는 줌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농부가 되기 전에도 종종 농사여행을 다녔지만 줌 인터뷰는 처음이라서 신기했다. 한 농부의 말로는 유럽엔 '히피'가 많아서 정말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찾기 위한 방법이라 했다. 11월이 되자 여행 초반과 마지막에 머물 곳들이 정해졌다. 중간의 일정들은 스페인에 가서 어떻게 되는지 상황을 보며 결정하기로 했다.
우선 농사여행은 내가 ‘농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지만, 우프가 아닌 워커웨이나 헬프엑스 같은 플랫폼을 통해 목적지를 찾는다면 그 활동 범위는 훨씬 다양해진다. 그래서 오히려 체험형 여행이나 생태 여행이라고 부르는 게 더 알맞을 수도 있겠다.
이러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돕는 플랫폼은 여럿 있고, 내가 그간 사용해 온 플랫폼은 위에서 언급한 워커웨이와 우프 두 곳이다. 플랫폼들에서 제시하는 룰은 대개 이렇다.
‘주 5일, 하루에 4-5시간 일을 하고 숙식 제공받기’.
호스트에 따라서 하루에 2시간만 일하고 식사는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숙식을 제공하면서 조금 느슨하게 일하는 곳도 있다. 나라에 따라 호스트에 따라 또 다르긴 하지만, 많은 곳에서 주 2회 쉬는 날에 주변 관광지를 같이 둘러보거나 시내에 데려다주기도 한다.
단순히 ‘노동력’을 위해서만 우퍼/워커웨이어(이하 봉사자)를 받는 경우가 많지는 않기 때문에, 일하면서도 농사나 여행 또는 각자 다른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여행까지 가서 또 일을 한다고?
주 5일, 하루 4-5시간이라고 얘기하면 선뜻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여행은 몸을 쉬러 가는 거라기보다는 나에게 다양한 자극을 주고 새로운 생각을 하게 돕는 수단이라서, 농사여행에서의 활동들은 일이 아닌 배움과 즐거움으로 느껴진다. 농사여행이라고 하지만 신기술의 농법을 배우기 위한 것도 아니다. 사실 내가 지향하는 퍼머컬쳐는 신기술이나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닌 잊히고 있는 과거로부터의 지혜다. 그렇기 때문에 토마토 농사를 잘 짓기 위한 방법을 배우거나, 감자를 실하게 기르는 법을 알기 위해 이런 여행을 다니는 게 아니다. 여러 지역의 다른 농부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농사를 바라보고 어떻게 자연과 연결하기 위해 노력하는지 보고 이야기 나누고 체험하기 위해서가 여행의 목적이다. 자신의 농장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철학을 하고 있는 철학자들을 만나는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럼 왜 꼭 스페인까지 가야 했나, 하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생태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대개 그렇듯, 나도 비행기를 타고 스페인까지 오면서 발생시키는 탄소발자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를 납득시키고자 한 건 아니지만 나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은, 많은 탄소발자국을 남기는 만큼 이번 농사여행을 하는 동안 1) 가급적 나무를 많이 심는 곳에 가고 2) 평소의 생활보다 탄소발자국이 적은 생활을 하며 3) 한국에 돌아와서도 나무와 다년생 식물을 심자 였다.
이 글을 적으며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의 '주요 산림수종의 표준 탄소흡수량(ver. 1.2)'이라는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나무 한 그루 당 연간 CO2 흡수량이 있어 적용해 보았다. 온실가스를 흡수하는 나무의 수를 계산할 때 보통 30년생의 소나무로 대표한다고 한다.한국 숲이 보통 30~40년생의 나무로 이루어져 있어서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분포하는 소나무로 10년생의 나무를 기준하여 이번 여행을 계산하였을 때, 평균 1.4kg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때문에 1,197그루의 소나무를 심어야 한다. 30년생의 소나무는 평균 8.1kg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이 경우 206그루의 소나무가 서울~말라가 왕복 비행기의 탄소배출량을 상쇄한다.
많은 이들이 이용하는 비행기이지만 새삼 긴 거리의 여행이 얼마나 환경에 해를 끼치는지 느끼게 되었다. 내 소유의 땅이 없는 농부라서 1,197그루의 소나무를 심기란 어렵겠지만, 가급적 많은 나무와 관목을 심어야 한다는 건 확실히 알게 됐다.
왜 굳이 스페인인지는 큰 이유는 없었다. 이번 여행을 계획할 때 제일 먼저 스페인을 떠올리게 된 건, 10년 전 왔을 때부터 살고 싶은 나라였고 스페인어를 좋아한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을까. 그리고 한국의 퍼머컬쳐는 그 이름의 시발점인 호주와 미국(북미)을 중심으로 사례가 전달되고 발전되고 있는데, 유럽형은 아직 많이 보이지 않아서였기도 하다. 유럽은 공동체나 생태적 삶의 방식이 북미 못지않게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유럽 나라 중에서 내가 가장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곳이 스페인이었다.
아직 여행의 중간이라(여행의 중간인 1월 초에 작성된 글이다) 이번 여행이 어떻게 내 삶에 남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전체 여정의 삼분의 일을 지난 지금까지는 매우 좋다!
12월 5일
앞으로 3개월 남짓 내가 있을 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마지막 장기 여행은 코로나 직전이었어서 몇 년만의 여행에 감회가 새로웠다. 올해 초부터 이번 휴가를 계획했다. 어디로,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떻게 여행을 갈지 조금씩 준비했지만 비행기에 오른 당일까지 걱정이 가득했다. 비행기를 놓치진 않을까, 도착하고 처음 머물기로 한 숙소를 못 찾아가는 건 아닐까, 그리고 환전은 (너무 비싸지 않게) 잘할 수 있을까, 가서 카드가 먹통이 되는 건 아닐까, 가다가 사고가 나는 건 아닐까, 배탈이 나지는 않을까, 시차 적응을 못하는 건 아닐까, 물갈이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등등. 원체 걱정이 많은 편이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걱정이 커졌다.
하지만 다 괜한 걱정이었다.
12월 10일
도착하고 일주일 남짓 말라가에서 적응기간을 보내고, 첫 농사여행지를 방문했다. 같은 스페인이지만 겨울의 북부는 다소 추웠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 여행은 가급적 남부와 남쪽의 섬들로 가기로 했다. 첫 장소는 그라나다 시내에서 1시간 남짓 걸리는 알부뉴엘라 마을. 마을에서도 20분가량 비포장 산길을 달려서 도착하는 곳이었다. 호스트가 마침 그라나다에서 전날 밤에 일정이 있어서 만나기로 한 날 픽업을 나오겠다 했다. 가을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던 호스트인 데다가 줌 미팅도 한 차례 했고, 스페인 내 다른 지역에 같은 단체가 있는 곳이어서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며칠 만에 그 농장을 탈출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