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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샌님 Apr 23. 2023

00. 땅에 발 붙이고 살기

세 번째 도시-이곳에서의 기록

나는 변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의 조용하고 단조로움을 사랑한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의 꿈은 '어른이 되지 않는 것.'

그리고 성인이 되기 얼마 남지 않았을 나이 때의 바람은 '인생에 큰 변주가 없는 것.'이었다.

어린이가 참 재미없는 바람을 품고 자랐다.


대학을 갈 때도 유달리 내 걱정이 심했던 부모님의 바람을 따라서 살고 있는 지역의 그때의 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전공을 선택했다. 그 전공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다니 놀라운 일이지만.


그래서 나는 늘 살고 있는 본가나 그 주변도시에 머무르게 될 거라고 짐짓 생각했다.

실제로 첫 직장이자 두 번째 도시는 본가의 같은 경남권으로 별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니다 사실 졸업 전까지 내가 살던 곳을 떠나리라 짐작조차 못했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부모님의 말을 아주 잘 들었을 것 같지만, 그때의 나의 성향과 부모님의 바람이 잘 맞았을 뿐 나는 꽤나 고집이 있다. 친구들은 모두 나를 '마웨'(마이웨이)라고 불렀으니 말이다.

나는 내향형이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외부자극에 민감해서 혼자 있는 걸 선호할 뿐이며 처음 보는 사람과 넉살 좋게 수다도 떨고, 모르는 것은 곧잘 물어보며, 처음 보는 도시에서도 혼자 잘 다닌다.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고수하는 나이지만 한 번씩 인생에 작은 변주를 넣을 때가 있는데, 이때의 나는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

더 어릴 적에도 조용~히 있다가 크고 작은 사고를 한 번씩 쳤었고, 고등학생 때는 어느 날 토요일 자율학습에 등교해서 책상에 가방까지 걸었다가 그냥 갑자기 나와서 노래방을 간다던지 하는 작은 에피소드부터, 어느 날 갑자기 서울에 가 있다던지 하는 일까지 다양했다.


주로 조용히 있다가 주변의 '갑자기 왜?'라는 반응을 보일만한 사건이 전부였다. 갑자기 왜인진 나도 모른다. 그냥 그렇다.


대학생 때는 다들 '니가???'라는 반응을 보인 전공을 선택했었지만 성실히 학교를 다녔다. 학점이 좋진 않았지만 복수전공도 하고 휴학도 하지 않으면서 1교시 수업도 빠진 적 없이 꼬박꼬박 듣던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최선을 다하진 않지만 나름 성실함으로 살았기에 내 바람대로 단조롭게 살았던 날들이었다.


이때의 작은 변주는 획일적으로 비슷한 과목을 듣던 우리과 전공에서 벗어나 이상한 교양을 혼자 듣거나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냥 갑자기, 도쿄를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비행기를 끊었다.

그전까지 해외여행 경험? NO. 비행기? 제주도가 끝.

그냥 비행기 예매를 해본 적도 없으면서 그냥 결제했다. 그리고 여권을 만들고, 숙소를 잡고 슝~

부모님의 걱정은 어마어마했고, 그러나 저러나 나는 일주일치 짐을 가지고 떠났다.

친구들이 "너 지금 뭐 해?"라고 물을 때 "나? 일본인데."라고 말했던 일은 아직까지 회자된다.


알차게 놀고 돌아온 뒤엔 졸업 전, 면접을 보고 다시 한번 떠났다. 사실 여행을 좋아하진 않는다.


첫 취업 후 모두에게 "젊은 사람이 왜 여길..."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조용한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언제든 바다를 볼 수 있고, 시끄럽지 않고, 도서관이 가까이 있으며 본가랑도 가까운 도시였다.

집도 까다롭지 않게 골라서 비록 벽지는 꽃무늬였지만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긴 머리를 목이 다 드러날 정도로 자를 때도 '그냥'이었다 자를 까 말 까라는 고민 따윈 없었다.

아무래도 그냥 실행력이 좋은 것 같은데 친구들은 자꾸 경악을 했다.


그만둘 때도 사실 그냥이었다.

습한 바다 바람을 맞으며 엄마와 통화하며 걷던 도중 아무런 맥락 없이 "아, 그만둬야겠다. 엄마."라고 말했고 곧장 사직서를 냈다. 음 이건 사실 사건사고가 많았어서 '그냥'이기만 하진 않다.

아무튼 사직서를 낼 때도 별다른 망설임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약 없는 백수생활.

이때는 사실 내가 탈출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까지가 기한이었다. 그러니 내 마음 쉼의 기한은 2년 6개월.

이 시간이 흘렀을 즘에야,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마음먹을 수 있을 정도로 그때의 나는 마음이 많이 꺾여있었던 것이다.




2년 6개월 기간 동안(딱 코로나기간)

서점알바를 하고 싶은 것도 갑자기.

빵집 알바를 해보고 싶었던 것도 갑자기.

문헌정보학 수업을 들은 것도 값지기. (3학기만 들으면 된다 해서 들었는데, 다른 지역까지 수업을 들으러 가야 했다. 돈 엄청 썼었던 기간으로 나름 재밌었다. 내가 또 언제 20살들과 수업을 듣겠는가.)

시험을 준비하기로 한 것도 갑자기.(최합에서 떨어졌다.)


최합 발표 전날 떨어짐을 예감하고 구직사이트를 뒤지다가 이곳에 이력서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갑자기였다.

넣은 지 30분 만에 전화가 왔고, 날짜에 맞춰 차표를 예매하고 갔었다.

놀랍게도 그곳은 그 도시에 처음 놀러 간 곳이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여기서 일을 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 사실 조금 거짓말이다. 이미 구직사이트를 뒤졌을 때부터가 갑자기가 아니었다.

살던 곳과 확 달라진 곳에 이력서를 넣은 건 즉흥이었지만, 취업하기로 마음먹은 건 약간의 망설임이 존재했다.

이대로 취업하면 처음 직장 생활하던 2년을 되풀이해야 하는데, 감당할 수 있겠어?라고 스스로에게 자주 물었다. 물론 고민의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이번만은 열심히 생각하고 내가 낼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다.




처음 직장을 그만두고 돌아왔을 때,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엄마 딸내미 다 키워 놨다고 자랑했는데, 내가 돌아와서 어떡해. 이제 딸 뭐 하냐고 물으면 우리 엄마 부끄럽겠다."

"뭘 부끄러. 딸내미 와서 좋기만 하구만."


처음 취직했을 때 자랑스러워하셨던 부모님은 실제로 내가 집에서 돌아다니기만 해도 좋아셨고, 갑자기 학교를 간다고 했을 때도 그러라고 하셨으며(심지어 학위가 나올지 어떨지 불투명했다. 엄마는 그냥 한 학기를 경험 삼아 다녀오라고 하셨다.), 갑자기 시험 준비를 한다고 했을 때도 최대한의 지원을 해주셨다.

나는 운이 좋았다.


그 기간 동안 나고 자란 좁은 동네에서 어른들을 마주치고, "그래 니 요즘 뭐 하네?"라고 할 때마다 처음엔 담담히 "공부하고 있어요."라고 했던 내가 나중에 1년이 넘어가자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이는 먹고 있는데, 집에 있어요.


우리 부모님도 내심 그랬을 진 모르지만, 내가 집 근처에서 알바를 한다고 했을 때도 같이 퇴근하고 오면 되겠다며 좋아졌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점점 자신감이 없어졌다.


정도의 길이 아닌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다는 감각이,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유예를 두고 예비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무언갈 해도 딱 떨어지게 정의 내려지지 않으며 이 기간에 했던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졌다. 완성이 되지 않았으니까.


실제로 학교를 갔을 때도 직장을 다니면서 오는 분들도 많았고, 그 사이에서 나는 직장도 안 다니면서 크게 열심히 하지도 않는 학생이었다.


3학기가 마무리되어 가는 중 "사서 자격증 생기면 뭐 할 거야?"라고 물었을 때도 딱히 목적을 두지 않아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물론 자격증 만으로 도서관에 취직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일단 많든 적든 경력을 요하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진짜 도서관으로 틀 마음이 있다면 주말 단기 근무자리라도 하나 꿰차야 했다.


실제로 동기들의 연락에 사실 사서 자격증이 곧 나온다고 얘기했을 때 "정말? 너무 잘 어울린다. 넌 거기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라는 말을 들었다.

사실 전공을 살려 취직한 친구들은 한번씩 전부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특별히 뼈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른 길의 여지가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찬 결론이었다.

그러나, 내가 4년을 공부하고 2년 넘게 일을 했던 그 자리도 내 자리가 아니라면 도대체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렇지만 삶은 유한하고 취직시장에서의 나의 입지도 유한하므로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실행력 좋은 내향인답게 우선 구직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던 일을 하기로 했다.


2년 6개월간의 부유생활을 청산하고 땅에 발을 붙여보기로 한 것이다.


우선 도서관의 박봉을 견딜 자신이 없었고, 공무원 시험 준비는 죽기보다 싫었다.

나가서 살려면 최소한 그보다 많은 월급을 주는 데가 필요했다. 하던 일을 하는 게 금전적인 면에선 훨씬 나았다.

다음으로 어디에 취직할 것 인가.

본가 근처는 패스,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에 얼마나 피곤하게 할지 상상하지 않아도 이미 겪은 일 같았다.

그렇다면 그전처럼 주변의 조용한 도시를 물색해야 했다.


그런데 어딜 찾아봐도 구직자리가 없는 건 아닌데, 딱 여기다 싶은 곳이 없었다.

경상도지역의 광역시인 부산을 찾아보기로 했다. 음 자리는 나름 많은데, 여기도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처음 취직할 때 함께 이력서를 냈던 곳(가지 못해서 좀 아쉬웠던)에 다시 이력서를 넣었다. 불안해서 넣긴 했는데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러다가 발견한 곳, 광역시임에도 내 직종 구인글이 딱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살던 곳과 좀 떨어지게 되겠지만 조건이 괜찮아 보였다. 있던 곳 보다 더 작은 규모이지만 비슷한 구조와 조건을 가진 것 같아서 이력서를 넣었다.


그러고 나니 이곳에서의 삶이 구체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면접결과를 기다리면서 혹시나 싶어 울산의 비슷한 조직과 규모에서도 한 번 더 면접을 봤다.

그날 합격연락이 왔지만 뭔가 그곳에서의 삶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이곳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고 연락을 받게 되었다.


부모님은 네 마음이 이미 거기에 가있었던 것 같다며 축하한다고 하셨고, 그제야 발이 땅에 닿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나의 적성이 뭔지, 앞으로 무엇을 할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 모른다.

이 일을 계속할지, 시험을 다시 준비해 볼지, 아예 다른 일을 할지 모르겠다.

언젠가 여기서 일을 하면서도 부유한다는 감각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

또 갑자기 변덕쟁이 이면서 쓸데없이 실행력이 좋은 내가 '여긴 아니야'하고 말을 걸어올지 모른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래도 여기에 집을 구하고, 매일 아침 출근을 하고, 월급을 받고, 그 월급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주말에 집에서 글을 쓰고, 잠이 들기 전 침대 맡의 책을 읽고 하는 모든 행동들이

여기에 발을 붙이고 산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지나치게 현실감각이 없을 땐 주변환경을 둘러본다.

음, 방금 내린 커피 향이 좋고, 스탠드 불빛이 눈이 조금 아프고, 책상이 조금 어지럽고, 나는 글을 쓰고 있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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