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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샌님 May 01. 2023

책방지기의 하루

일일책방지기

'책방지기'라니 '서점주인'과는 왜인지 다른 말 같았다.

새삼 책방과 서점의 어감도 참 다르다 느꼈다.




여기 온 뒤로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 한 군데 씩 꼭 가보자 하고 세웠던 계획은 두 달이 흘러서야 실현할 수 있었다. 부동산이 필요한 종이책은 되도록 사지 않겠다 했던 다짐과 상반되지만 집 공간 외에 바깥에도 숨통을 트일 공간은 필요하다.


나는 책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책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좋아한다. 읽지 않아도, 독서 휴식기에도 왜인지 책더미와 잘 짜인 장서를 보면 가슴이 뛰는 것이다. 책만큼 책장이 좋고, 책이 있는 공간이 좋다. 읽지 않을 장르라도 미관이 매끈한 책을 보면 구경하고 싶어 진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것을 하겠다 마음먹은 건 토요일 점심쯤이었다. 돼지우리 한복판에서 커피를 마시다 문득 평소보다 휴일이 하루 더 주어진 것을 어떻게 쓰면 좋을까 생각했다.


네이버 지도에 <서점>을 치고 아무 곳이나 눌러 구경하다가 '예약'마크를 발견했다. 서점에 예약이라니 책을 적으면 예약을 해주는 건가? 하고 봤더니 책방지기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책방지기'라니 일일 서점주인체험 같은 말보다도 훨씬 마음에 들었다.


휴식기에 서점을 그만두고 내내 아쉬웠던 마음이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다음날로 예약하고 부푼 마음을 가지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서 책 2권, 이북리더기, 아이패드, 필기구, 다이어리, 안경, 헤드셋을 두둑이 챙긴 보부상 가방과 텀블러에 커피를 내려서 출발했다. 배고플까 봐 당연히 샌드위치도 하나 샀다.

처음 가보는 동네와 이사 와서 처음 타는 버스를 타고 타고난 길치인 나를 믿지 못하는 불안 반 설렘반으로 바깥을 구경했다. 다행히 미세먼지는 좋음.


일일 주인행세를 하러 온 사람치고는 썩 당당하지 못하게 들어선 작은 공간은 놀랍도록 마음에 들었다. 문을 열고 오늘 하루를 보낼 공간을 천천히 살펴보자 내가 원하는 곳에, 내가 원해서 여기에 와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차분해졌다.


서툴게 컴퓨터를 켜고, 매뉴얼을 보고, 스피커도 키고, 노래를 틀고, 커튼을 치고, 명패를 OPEN으로 바꾸고, 환기를 시켰다. 내가 미래에 책방을 열게 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껏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데 손님이 두 명 왔다. 포스를 잘 살펴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결제할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들었지만 생각보다 긴장되진 않았다. 이 서점에 들르는 사람들은 내가 주인이 아닌 걸 알 것이라고 생각하니 좀 버벅거려도 뭐 대수인가 싶었다. 편지지를 두 장 결제하고 손님들이 나란히 편지를 쓸 동안 조용히 노래를 틀었다. 편지를 다 쓰시고 스몰토크를 했는데 친구 둘이 여행을 왔다고 했다. 곧 기차 시간이 다 되어 가셔야 한다고.


손님들이 가고 또 한 분이 들어왔다. 힘차게 "어서 오세요." 했더니 알고 보니 사장님이셨다. 사장님과 얘기를 하다 보니 바로 전날 예약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했다. 늘 이렇게 살아왔던 나는 세상에 이런 것도 계획적으로 살아야 하는 건가? 하는 새삼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손님들이 보낼 편지 중 하나의 답을 내가 쓰게 된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펼치자 거기엔 정갈한 필체로 여러 가지 고민과 답장자를 위한 담담한 인사말이 있었다. 꾹꾹 한 장으로 압축한 그의 마음은 나의 고민과 참 닮아있었다. 나는 그런 세월과 그러한 고민을 뒤로한 채 지금의 내가 되었는데, 그분은 어떤 사람이 될까. 부디 내 답장이 뻔하기만 하지는 않았기를 바란다.


그 이후로는 아주 나의 시간이었다. 챙겨간 책을 읽고, 사장님이 골라준 책 중에 무엇을 가져갈지 고민도하고, 오늘의 일지도 쓰고. 시간음 금방 흘러 마감만 남겨두었다.


나는 바깥에선 몸의 긴장도가 높아서 금방 피곤해지는 사람인데 그곳에서 여섯 시간은 정말이지 편안함 그 자체였다. 처음 가본 곳이 내 공간 같을 수도 있구나. 자영업은 영 상상도 해본 적 없이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쟁이가 체질인 나조차 책방을 운영하는 꿈을 꿨으니 말이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가 않지.


생각해 볼수록 웃긴 것은 똑같이 책을 좋아해도 누군가는 책방을 차리고, 나 같은 사람은 사서자격증을 딴다. 책방주인이 되어 원하는 책방을 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년에 작은 도서관을 운영만 하고 싶어 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다녀오니 오랜 내 꿈이 다시 생각났다. 마음에 드는 집을 사서 금액 상관없이 마음에 드는 책장을 골라 그곳에는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책들만 넣은 소박한 서재를 만드는 것이다. 언젠가 수만은 장서를 둔 큰 거실을 꿈꾸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말 정말 소장하고 싶은 책들만 있는 나만의 책방을 가지고 싶다.

비록 지금은 침대 맡에 아주 낮고 작은 세 칸짜리 작은 책장만 있지만 언젠가 그 꿈을 이룰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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