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샌님 Apr 03. 2023

기억력이 참 안 좋아서요.

휘발되어 버렸네

어쩌다 보니 미라클 모닝해버렸다. 

새벽 4시 언저리에 일어났다는 소리다. 


원치 않는 이른 기상을' 보통 자다 깨서 짜증 난다'라고도 하지만 미라클 모닝 붐이 불었기 때문에 '어랏, 부지런해버렸네'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오늘의 피곤한 하루가 예상이 가긴 하지만 깬 걸 어쩌겠어. 일어나서 늘 그랬던 사람처럼 따뜻한 물 한 잔도 마시고, 이불 정리도 하고 앉아서 2년 정도 방치한 브런치도 켜고 그러는 거지.


이렇게 새벽에 일어나니 문득 떠오르는 날이 있다. 오늘처럼 비슷한 새벽이었는데, 아마 퇴사 후 본가에 들어갔을 때의 새벽이었던 것 같다. 그때가 어땠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기껏 새벽기상해 놓고 오후 1시쯤 다시 잠들었던 것 같다. 


그럼 그전엔 어땠더라. 

통영에 있었다. 한 2년 4개월 정도 살았는데, 졸업 후 바로 취업하러 간 그곳에서 다들 젊은 사람이 왜 여길 오냐고 했다. 실제로 친구들은 다 큰 도시로 갔고 나는 번잡한 생활을 견딜 체력이 없는 사람이라 조용한 시군구를 찾아 헤매었다.


2년 4개월의 통영 생활은 조용했고 회사는 괴로웠고, 돌아온 본가에서도 그럭저럭 조용했다. 

그래서일까 기억이 휘발되었다. 4년 정도의 삶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일하면서도 그렇고 쉬면서도 그렇고 아무것도 안 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쉬면서는 대학에서 다시 강의를 들었다. 하고 싶었던 게 있는데 학사와 자격증을 받을 수 있고, 내가 마침 쉬고 있네? 하면서 가볍게 신청했던 것 같다. 물론 등록금은 가볍지 않았다. 


그래서 알바도 했다. 그렇게 짧은 사이 빵집에서도 했고 서점에서도 했다.


대학에서 다시 수업을 듣게 된 계기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취직하고 처음 일할곳에 엄마와 가보았던 날이다.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직업군이지만 실제로 그랬다. 


처음 면접을 보고 합격을 하고, 엄마와 단 둘이 오사카 여행을 다녀오고, 출근일 전에 집을 보러 왔다.

일단 회사에 도착해서 근처부터 집을 보겠다는 작정이었다. 

대낮인데도 조용하고 바다내음이 나던 그곳에서 계단을 올라서면 바다가 있고 도서관이 있고 회사가 있었다. 

엄마에게 여기가 내가 일할 곳이라고 소개하고 다시 계단으로 내려오다가 도서관을 보며 문득 이런 말을 던졌던 것 같다.


"엄마, 4년 동안 공부 시켜놨더니 갑자기 내가 다시 공부하고 싶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

"뭐 어쩌겠어. 공부시켜야지."


엄마의 답은 심플했다. 진심인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실제로 나는 2년 4개월 만에 그만두고 문헌정보학 공부를 했다. 회사 옆의 도서관이 생각이 났다. 


통영에서 일을 하면서 3분 거리에 집이 있었던 것, 살면서 통영 그 어디에도 놀러 가지 않았던 것,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진 않았던 것, 그렇지만 바다가 보이는 산책길은 매우 훌륭했던 것, 그리고 회사엔 정말 미친 사람이 많다는 것, 괴로워서 퇴사하고 꿈에 나오기도 한다는 것, 그럼에도 내 평생의 친구를 얻었다는 것 등이 있지만 내가 그 작은 자취방에서 무슨 꿈을 꾸고 무슨 생각을 했고, 또 계절이 어떻게 바뀌어갔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심지어 대학강의를 들으며 다른 지역도 오가고 수많은 인연이 생겼었는데도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구구절절 쓰는 이유는 


시군구의 조용함이 좋고 도시의 번잡함과 인프라가 싫어서 '절대 서울이나 광역시에는 안 살 거야.' 하던 내가 자발적으로 광역시에 와있다는 것이다. 면접도 내 발로 보고, 내 발로 여기에 와있다. 


심지어 시간도 빠르지, 엊그제 까지 백수였던 것 같은데

온 지 벌써 한 달이 넘게 흘렀다는 것이다. 그 한 달간의 기억은 역시 나지 않는다. 

그 사이 부모님은 벌써 두 번이나 다녀가셨다...


갑자기 새벽에 이렇게 기억이 안 나요 호소하는 글을 쓰는 이유는 미쳐서도 아니고 갑자기 창작욕이 마구 뿜어 나와서도 아니다. 나한테 그런 거 없다.


어느 날 또 메멘토의 한 장면처럼 기억이 뚝 끊긴 채 영문도 모르고 달리고 있을 까봐, 혼자와 집을 그토록 좋아하는 내가 자취를 하며 있었던 소소한 행복을 다 날려버릴까 봐 그래서 써볼까 했다.


월세도 이만큼 내는데 이 집에서 좋은 기억이라도 남겨야지.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의 긴 악몽만큼이나 좋은 날들을 쌓아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