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이 바뀌어서 그래요.
2년 3개월의 직장 생활 뒤 2년 6개월간의 공백 그리고 다시 직상생활 시작.
오늘 글을 쓰기 전까지 나는 내 휴직기가 얼마나 되는지 몰랐다.
내가 인생을 무의미하게 보낸 시간이라고 생각되어 무서웠기 때문에.
휴직하면서 느낀 것은 쉼도 필요하고, 아침에 알람 없이 일어나는 삶도 행복하지만
성인이 되고는 내가 시작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수라고 세상이무너 지는 것도 아니고, 갑작스럽게 돈 때문에 아쉬움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저냥 먹고살만하다는 것.
정말로 내가 한 발 뻗지 않으면 내 인생이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기간이었다.
그렇다고 정말 집에서 숨만 쉰 것은 아니고, 6개월 휴식 후 3학기 정도 대학을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두 가지 정도 경험하고, 1년간은 수험생활을 했다. 결과는 다시 취업한 걸로 대신하겠지만 그래도 2차 시험까지 다녀왔으니 좋은 경험이었다.
정리해 보니 이렇게 열심히 제자리 발버둥을 쳤는데도 나는 여태껏 '아무것도 하지 않은 기간'으로 생각해 왔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으니까.
재취업 후 나는 부지런해졌다. 몸이 피곤해도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은 자투리시간을 쪼개서라도 업무시간 안에 모두 처리하고 퇴근한다. 그리고 일을 미루지 않는다.
큰 덩어리 업무는 잘게 나누어 정리하고, 시작하는 게 어렵지만 무조건 하긴 해야 하는 업무는 우선 폴더와 담당자란에 내 이름을 적은 서류틀부터 바탕화면에 만들어 둔다. 이렇게 하면 시작하기가 조금 더 쉽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저번엔 5시 퇴근인 날에 공동업무가 4시 40분에 끝났고, 20분간 서류를 완성해서 제출하기 위해
'아무도 말 걸지 마요. 나 이거 제출하고 갈 거야'하고 폭풍 타자를 쳐서 제출하고 집에 간 적도 있다.
일잘러 같지만 아직 실수투성이인 중고신입이다.
우리는 정해진 기한은 잘 없지만(정확하게 체크하는 일이 많지 않은) 미루면 눈덩이가 되고 나중에 큰일 나는 일이 많아서 미리미리 알아서 해야 하는 자기 주도업무가 주로 많다.
전에도 나는 개중에 일을 미루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는데, 그때는 체력도 없고, 삶이 너무 피곤하고, 주말에 서류하다가 운 경험치를 바탕으로 하루하루 괴롭게 완료했다면
지금은 남는 체력으로 완료하고 집에 가서도 남는 체력으로 휴식을 취한다.
뭐가 달라졌을 까? 내가 더 유능해지진 않은 것 같다. 여전히 구멍투성이니까.
주거 환경이 달라져서? 그전엔 3분 거리였다. 지금은 10분 거리다.
그나마 반꼬리의 경력이 있어서? 그때보다 지금이 더 늙어서 체력은 없을 것이다. 무릎과 손목이 시큰거린다.
1. 일하는 곳이 달라졌다.
사실 전의 회사와 조건은 거의 동일하다. 달에 5번 정도는 당직 후 5시에 퇴근하고, 업무 분장도 비슷하고, 행사도 비슷하고, 6시 퇴근이 원칙인 것도 연차 사용법도, 월급책정방식도, 싫은 점도 비슷한 것이
가끔은 내가 지역만 옮긴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미묘한 차이가 업무를 더 편하게 만들었다. 정말 미묘해서 그전 회사동료랑 가끔 통화를 하면 설명하기가 애매한 게 많을 정도로.
원래 회사에서 억울함이라던지 피곤함이라던지 딱 떨어지게 정의되는 것은 없다. 미묘한 스트레스, 미묘한 억울함, 미묘하게 더 많이 분배된 나의 업무. 따지기 치사하고 애매한 것들이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떤 차이일까.
우선 똑같이 6시 정시 퇴근을 주장하더라도 주 업무의 여유시간이 다르다.
전엔 누구는 4시쯤 되면 주 업무가 끝나고, 누구는 6시까지 시달릴 때도 있었다. 정말 그것만 하다가 시달리고 퇴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개인서류는? 당연히 '알아서 '업무시간 안에 해야 한다. 그것도 업무인데 개인서류라는 이름으로 야근이 되었다. 그럼에도 야근으로 책정되지 않는.
그러한 불평등이 개인에게 '어쩔 수 없는 업무 분장'이라는 네이밍으로 매년 새롭게 분배되었다.
말 그대로 로또이다. 운 없으면 1년 내내 독박 쓰는 거고, 운 좋으면 비교적 편한 1년을 보내는 것이다.
(근데 이걸 분배하는 사람 자체도 공평하지 않았다....)
현재는 빠르면 3시 20분 늦는 사람도 4시 10분 정도면 주 업무가 공동으로 끝난다.
이것도 업무 피로도에 따른 분배인데 조금 더 강도가 높은 사람은 일찍, 무난한 사람은 4시에 끝나서 서로 불만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일이 끝나면 휴게시간을 잠시 가져도 좋고, 일이 많다면 알아서 일하고 6시 되면 퇴근을 한다. 물론 야근이 아예 없진 않다.
그래서 처음엔 '먼저 가보겠다고 해도 되나...'하고 있었는데 각자 알아서 퇴근하는 걸 보고 나도 마음 편하게 인사하고 퇴근하게 되었다.
아니 어차피 해야 하는 하루치의 노동량이 6시까진데 왜 4시에 끝나느냐.
다음날 업무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2시간 텀은 자잘하게 시간내기 애매한 업무를 처리하는 시간이고, 다음날의 업무를 점검하고 미리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편하게 일하고 일할 때 놀고 이러진 않는다.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려서 땡! 하고 끝내고 퇴근한다.
나는 현재 행복하다.
2. 공평성에 대한 신뢰가 간다.
전엔 돌려라 돌려 당첨판이었다면 현재는 비교적 공평하게 업무가 배분된다.
물론 업무를 나누는 관리자 층이 업무가 제일 많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서로 필요에 의해 교환해야 할 때는 흔쾌히 불쾌감 없이 교환이 된다. 이러한 신뢰가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물론 아직 더 다녀봐야겠지만 대부분 편하게 요청하고 편하게 도움을 준다.
3. 회의는 어떠려나
아직 여기 와서 아직 회의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곧 할 예정이긴 한데, 아마 중요한 일은 미리 연간 계획에서 정해서 그런지 현재는 각자의 일을 레이싱 중이다.
전엔 주에 5번이 회의라고 할 정도로 많았다. 회의, 좋다.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필요한 동의를 구하는 자리. 말 그대로 그렇게만 되었다면 참 좋겠다.
무의미한 말 버리기, 이 일을 누가 가져가느냐의 눈치게임, 마음에 들면 든다 안 들면 안 든다 똑바로 이야기하지 않고 '음... 조금 더 회의해 보세요.'라고 말하는 상사.
4시쯤부터는 체력이 고갈되어 얼굴이 희게 질린 적도 몇 번 있었는데 영혼이 나간 상태에서 회의도 여러 번 들어갔었다.
처음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씻다가 운 적도 있었다. 일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12시에 퇴근했을 때의 일이었다.
내가 아직 적응을 못해서 그런 거니 3개월만 버티자 1년만 버티자 했었다.
실제로 1년을 버티니 일이 몸에 익어 편해지기는 했다. 그런데 그건 내가 스스로 숨통을 트이고자, 빡빡하게 달려온 결과였다.
입사 40일가량되었을 때 함께 들어온 신입에게 물어봤다.
"일하는 거 어때요."
"어렵고 힘들긴 한데, 좋아요! 일찍 퇴근하고, 집에 가져갈 일없고."
업무 자괴감이 없으니, 자잘한 일을 집으로 가져가거나 야근하지 않아도 되니, 업무분배의 스트레스가 없으니, 약간의 부지런함만으로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 전에 다음날 밀린 업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분기별로 바쁜 일은 미리 조금씩 해두고, 딱 하루만 강도를 올려 일하고, 다음날 조금 일찍 가서 제출해 두면 된다.
그러면 나의 할 일은 끝이 난다. 그것만으로도 큰 해방감이 드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