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서르

"아이가 커요. 이제부터는 무조건 많이 걸으셔야 해요." 산부인과 주치의 선생님께서 나에게 하루에 만 보 이상 걸으라고 하셨다. 출산 예정일이 2주 남았지만, 태아가 당장 나와도 문제없는 정도 였다. 초산이라 배가 아직 안 내려와서 많이 걸어야 아이를 빨리 만날 수 있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낮에 뭐해요?"

"왜? 엄마 갈까?"

"많이 걸어야 한다는데 김 서방은 출근했고, 혼자는 겁이 나서요."

"그래, 네가 제일 급하지, 엄마가 뭐가 급한 일이 있겠니.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집을 나서려면 준비할 것이 많아 분주할 엄마 모습이 눈에 훤했지만, 호출의 명분이 분명하여 죄송스러움은 뒤로하기로 마음먹었다.

엄마가 헐레벌떡 도착하셨다. 엄마와 함께 향한 곳은 집 근처에 있는 '초안산 세대공감공원' 이었다. 적절히 앉을 곳도 있고, 초안산을 끼고 조성되어서 오르내리며 걸을 수 있다. 내가 걷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공원 중앙에 있는 수양버들 가지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흔들흔들 손짓했다. 푹푹 찌는 공기가 조금 누그러진 때였지만, 태동으로 배가 꿈틀꿈틀하는 게 겉으로 보기에도 만삭 임산부에게는 한여름이나 다름없었다. 뒤뚱뒤뚱하며 한 걸음 걷다가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걷다가 엄마 손을 잡았다. 엄마는 내가 손을 잡았다고 눈을 찡긋하거나 행동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잡은 손을 흔들흔들하며 걸을 뿐이었다. 멋쩍은 마음에 더 흔들었지만 전달되는 체온, 투박하지만 보드라운 촉감은 오랜만에 딱 맞는 옷을 입었을 때 느낌이었다.


공원의 길은 둥근 모양으로 나 있다. 둥근 모양 중간중간 낮은 동산으로 오를 수 있는 샛길이 있다. 중심이 되는 길로 걷다가 잠깐 샛길로 빠져 동산으로 올라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러다 다시 둥근 길로 나오기를 반복했다. 길에서 만난 나무, 들풀, 꽃, 열매는 자기 색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엄마는 이 열매는 어떤 거다. 저 나무는 무엇이다 등등 지나가며 만나는 온갖 식물을 보며 이야기해 주고 사진을 찍으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잡은 손을 멋쩍게 풀어 휴대전화를 찾아 엄마 모습을 찍느라 바빴다.


"엄마, 나이 들면 왜 그렇게 꽃을 좋아하는 거야?" 라고 괜스레 핀잔을 주면서......

엄마와 잡은 손을 풀었다 잡았다 하며 이야기한 주제는 다양했다.

맥락 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엄마는 말을 멈추고 몇 분 걷다가 내 이름을 부르시더니,

"너를 딸로 낳아서 엄마가 미안하다." 하셨다. 엄마의 한마디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출산 이후의 나를 애달프게 바라볼 엄마가 걱정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 '그러게 왜 나를 딸로 낳아서 무서운 출산의 고통을 겪게 해느냐' 고 할 수는 없었다. 출산 후의 삶을 최대한 상상하며 엄마를 안심시켜 드릴 말을 떠 올렸다.

"엄마, 걱정하지 마요. 요즘은 신랑이 아내에게 잘해야 살 수 있는 세상이에요. 엄마가 우리를 키우던 시절처럼 여자 혼자 육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애 낳는 거야 엄마가 우리를 순산했으니 나도 잘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걷다가 산통 오면 엄마가 나 데리고 병원에 가주면 돼요."

솔직하지 못한 말이었다. 산고가 오늘 찾아올지 내일 찾아올지 몰라 겁이 나서 엄마를 불러놓고는 의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엄마와 나는 서로를 지나치게 생각하느라 솔직하지 못한 말을 늘어놓을 때가 종종 있었다. 차라리 무섭고 겁이난다고 엉엉 울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오르락내리락 계속해서 걷다가 초안산 정상까지 다녀왔다. 방향만 어느 정도 기억하면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혼자서는 마음먹지 않았던 걸음이었다. 엄마와 함께 걸어서 편안했고 불안하지 않았다. 열흘간 엄마와 함께했다.


하루 만 보 이상 걸었는데도 출산 신호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촉진제를 맞고 유도분만을 했다. 짧고 굵은 진통 후에 4kg이 넘는 아이가 태어났다. 출산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아기가 세상에 나갈 생각을 안 해서 그랬는지 삼신할미에게 많이 맞았나 보다. 엉덩이에서 등판까지 푸르스름한 몽고점이 가득한 채로 나왔다.


아이는 나와 탯줄로 연결되었지만, 서로의 안녕을 위해서 적절할 때 분리되어야 했다.

엄마와 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엄마와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엄마의 시각으로 내 삶을 확인받아야 편안한 상태였다. 이제 엄마도 나도 보이지 않은 끈을 서서히 끊고,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맞이해야 할 때가 되었다.


첫 아이 출산 후 5년이 흘렀다. 그사이 나는 둘째를 낳았고, 육아휴직이 끝나 복직하여 워킹맘으로 살고 있다. 여섯 살, 네 살 아이들을 키우며 일하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다. 나와 남편은 양가 부모님의 도움 없이 아이들을 키우겠다고 마음먹었다. 양가 부모님의 간강이 염려되기도 했지만, 손주들의 육아를 도와 달라는 핑계로 부모님과 연결된 보이지 않는 끈을 유지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 분리불안을 겪는 아이처럼 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악물며 '내 아이들은 내 힘으로 키우자!'를 다짐했다. 엄마는 홀로서기하는 나를 바라보며 심정이 어떨까. 흐뭇한 마음보다는 헛헛한 마음이 크리라.


며칠 전 공원을 혼자 걸었다. 걷다가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가 걱정된다고, 그렇지만 내 새끼들 키우느라 엄마를 살피지 못해서 속상하다고. 이번엔 솔직하게 엉엉 울며 말했다. 엄마는 뭐 하러 그런 걱정까지 하느냐며 나무라셨다. 아이를 낳고 살아보니 이제야 엄마 인생이 눈에 들어온다. 엄마가 내게 했던 말, "너를 딸로 낳아서 미안하다" 의 뜻이 오롯이 느껴진다. 아이 낳은 후 5년간 삼신할미에게 두들겨 맞는 듯 아프게 성장하고 있다. 푸르스름한 몽고점이 언제쯤 없어지려는지 모르겠다.



2022년 어느 날 썼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