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하다 황당해
와장창.
저녁밥을 준비하는데 거실에서 또 뭐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에어팟을 끼고 영어 강의를 듣느라 피터팬이 거실에서 공을 차고 노는지도 몰랐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며칠 전 거실에서 탄성이 좋은 작은 공을 가지고 노는 피터팬에게 미리 주의를 줬었다.
벽 선반에 올려져 있는 술병에 공이 맞으면 위험하니 공은 옥상에 가서 차라고.
당체 말을 들어먹지 않는 아홉 살이다.
진심 나는 묻고 싶다. 아홉 살 아들은 다 이런 건지, 우리 집 피터팬만 유난히 이런 건지.
나는 잘 알지는 못하겠으나 남편의 유전자적 요인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는 그놈의 유전자.
참고 참고 또 참지 울진 않았다. 난 캔디가 아니니까.
그러나 참고 또 참다가 오늘은 참을 수가 없어서 속사포 잔소리를 해댄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린다.
그래 나도 사람인데 좀 살아야겠다. 다다다다다
"너 며칠 전에 엄마 그릇 백만 원어치 해먹고도 정신을 못 차렸니? 왜 자꾸 뭘 부수는 거야 도대체 왜 엄마 말을 안 듣는 거니? 듣기 싫은 거야? "
아이는 이제 울지도 않을 만큼 커버린 모양이다.
저녁밥이고 머고 다 때려치우고 나는 당장 밖으로 나가고 싶다.
바깥공기라도 맡으면 조금 가라앉으려나. 하지만 나갈 수 없는 이 지랄 같은 현실.
저녁밥을 준비 중이었으니 미우나 고우나 저녁밥상을 차려준다.
나는 그 사이에 또 아무 데나 마킹을 해놓은 이놈의 개새끼 오줌을 치우면서 계속 소리친다.
오줌을 닦던 걸레를 내팽개치면서 식탁에 앉아 눈치를 보며 꾸역 구역 밥을 밀어 넣고 있는 피터팬을 향해 말한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니? 엄마는 너한테 밥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엄마가 알려주는 대로 네가 말을 들어야 하는 거잖아"
혼자 씩씩대면서 무슨 말을 해도 가라앉질 않는다.
또 몇 년 동안 잠잠하던 병이 도졌나 싶게 흥분이 쉬이 가라앉질 않는다.
그러는 와중에 피터팬이 들릴 듯 말 듯 뭐라고 중얼거린다.
"뭐라고? 말을 하려면 똑바로 말해! 알아듣게!!"
"00는 좋겠다고."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다.
"00는 왜! 뭐가 좋겠는데? 이 와중에 00가 부러운 게 있다는 것도 이상하다!"
"00이 엄마는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대."
"00는 엄마 말을 잘 듣나 보지!!"
"아니야. 태권도에서 봐도 말을 잘 듣는 스타일이 아니야"
"그건 네가 볼 때나 그렇겠지. 집에 가선 엄마 화나게 하는 일이 없겠지!"
"아니야. 00가 그랬어 자기가 말을 안 들어도 엄마가 화를 낸 적이 없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일지라도 따박따박 할 말은 다 한다. (이것도 꼴 보기 싫어.)
"그럼 걔네 집에 가서 살아!! 엄만 너처럼 이렇게 말을 안 듣는 아이에게 화를 안 낼 수가 없는 사람이니까!!"
하악....
진짜 40살 차이 나는 꼬맹이랑 이러고 싸울 일인가. ㅜ
또 할 말 못 할 말, 마음에도 없는 말, 하면 안 되는 말 등등등을 다 쏟아냈다.
쏟아냈으면 시원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 찝찝함은 항상 이렇게 기분을 더 나쁘게 만든다.
오늘 밤에 나는 또 잠든 아이를 보면서 혼자 반성문을 써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피터팬이 다가온다.
"엄마, 미안해...."
"됐어! 맨날 미안하대. 네가 진심으로 미안하긴 한 거니?"
헉. 방금 전까지 후회를 해놓고 피터팬을 보자마자 또 엄한 말이 튀어나온다.
이놈의 입은 아우토반이다. 어쩜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단 말인가.
"반성문 써!"
반성문은 내가 쓰기로 해놓고 피터팬에게 느닷없이 쓰라고 한다.
"반성문? 그건 어떻게 쓰는거야?"
"네가 뭘 잘못했는지, 엄마가 왜 화를 냈는지, 이 일에 대해서 네 생각은 어떤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를 쓰는 거야. 노트 한 장 꽉 채워서 써."
피터팬은 난생처음 반성문을 쓰고, 나는 그 사이 남편에게 거침없는 톡을 보낸다.
다 너를 닮아 저렇게 말을 안 듣는 거라고.
불똥은 언제나 남편에게 튄다. 남편은 언제나 화내지 마, 진정해를 반복하고, 애들은 다 그렇게 크는 거야 한다.
나는 '너는 나 몰래 어떤 아이를 키워본 거니? 애들이 뭐가 다 그렇게 크는데? 그렇게 큰 애들이 대충 사는 어른으로 크겠지.' 속으로 대꾸한다.
폭언은 피터팬에게 한 것으로 끝내자 싶어서.
오늘 나는 또 아동학대를 했다.
다른 엄마들은 정말 화를 안 낼까?
분명 그런 엄마들도 있을 거란걸 안다.
나도 늘 그런 엄마가 되고 싶어서 노력했는데, 난 노력만 했을 뿐 마음을 바꾸진 못했나 보다.
사실 술병을 깨뜨려서,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오늘은 피터팬의 스케줄을 하나도 하지 못한 것이 더 화가 났다.
학교 끝나고 놀 시간이 없는데 놀다 왔고, 태권도를 가기 전에 해야 할 공부가 있는데 안 하고 친구랑 놀러 나갔고, 그래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하라고 했는데 하지 않고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것이 화가 났다.
왜! 자기 할 일을 먼저 하지 않는 거지?
아홉 살이니까? 그래서 엄마가 알려주잖아. 그럼 말을 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너도 그러지 않았냐고? 난 안 그랬다. 물론 그때는 지금 아홉 살 만큼 할 일이 없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할 일은 수북이 쌓였고, 내일은 더 할 시간이 없고, 미루는 게 습관이 될까 봐 항상 신경 쓰는데 그동안 가면을 쓴 것처럼 오늘은 나의 본모습을 보여준 게 나는 또 싫은 것이다.
피터팬이 반성문을 보여준다.
이 와중에 틀린 글씨들이 수두룩하게 눈에 들어오지만, 그것에 대한 잔소리는 용케 참았다.
어쨌거나 쓰기 싫어하는 피터팬이 노트 한 장을 꽉 채우느라 진땀 뺀 것이 보인다.
"그래, 잘했어. 일단 할 수 있는 건 하도록 해."
"엄마 우리 화해하는 거야?"
"그건 이따가. 엄마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뒤끝작렬인 엄마. 미안하지만 오늘은 나도 좀 내 마음대로 해야겠다.
육아는 정말 갈수록 어렵고 힘들다.
진이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