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사가?" 나도 싫다

아들의 조언.

by 그레이스웬디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동훈은 매일 퇴근길에 윤희에게 전화를 해서 "뭐 사가?"라고 묻는다.

윤희는 짜증을 내며 "그놈의 뭐 사가 뭐 사가. 됐어. 그냥 와" 한다.

지안이 윤희에게 그랬다.

"아저씨가 자주 했던 말 중에 그 말이 제일 따뜻했던 것 같아요. 뭐 사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 아줌마한테 전화해서 하던 말."


배려에 익숙해지면 습관으로 치부되고 귀찮아지다 못해 하찮아진다.

그 말이 따뜻한 말인지 모르다가 그 사람의 마음이 차가워진 후에야 그 말이 따뜻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나는 드라마 속 윤희를 백 번 공감했다.

그놈의 ' 뭐 사가'.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사들고 들어오는 그런 것들이 아닌데, 당신은 뭐 하나 손에 들고 집에 들어오면 나를 무척 생각하는 건 줄 착각하고 있다고. 오늘은 또 무얼 사들고 들어와 '나는 할 만큼 하는 남자'라는 것을 어필하려 하는지, 매일 '뭐 사가'라고 묻는 그 말은 배려도 따뜻함도 아니라는 오해를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집 남자도 그렇다. 이 남자의 아버지는 경찰관이셨는데 매일 퇴근할 때 통닭이든, 과일이든, 호빵이든, 뭐라도 꼭 사들고 들어오셨다고 한다. 삼 형제는 그게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자기도 뭘 사들고 집에 들어오고 싶다고 했다.

얼마나 가정적이고 따뜻한 남자인가....(그런 줄 알았지!)


그래 좋다. 뭐라도 사들고 들어오는 거 아이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했다. 처음엔..

하지만 우리 집 남자가 <나의 아저씨>의 '동훈'과 다른 점은 퇴근 시간이다.

뭘 사들고 들어왔을 때 가족들의 환영을 받는 남자는 일찍 퇴근하는 남자다.

적어도 밤 11시에 뭘 사가냐는 전화는 안 할 것이다.

우리 집 남자는 개인 사업을 하므로 시간대가 들쑥날쑥이지만, 대체로 우리가 잠든 후에 들어온다.

점점 늦게 들어오는 남편이 편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일찍 들어온다고 하면 짜증이 날 정도로 너무도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11시가 넘어도, 주말이 다가오는 금요일에는 12시가 넘어도 전화를 해서 뭐 사가? 또는 뭐 먹을래? 뭐 먹을까? 이런다.


나는 분명히 말했다.

평일에도 주말에도 아이의 생활 습관이 왔다 갔다 하면 안 된다고.

우리는 9시면 잠자리 독서를 할 시간이고 늦어도 10시면 아이를 재우니까 10시 이후에는 되도록 아이를 깨우지 말라고. 그건 주말에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집에 있는 주말엔 우리의 루틴은 그러하니 당신도 알고 있으라고 분명히 백 번도 넘게 말했다.

그랬는데!! 왜!!! 10시고 11시고 어떤 때는 12시가 넘어서도 전화를 해서 뭐 먹고 싶은 거 있냐고, 뭐 사가냐고, 전화를 하는 거냐고!!!!

정말 나는 너무너무 싫고 화가 난다.

이건 뭐 내 말은 개무시하는 처사밖에 안 되지 않나. 왜!! 하지 말라는데 들은 체도 안 하는 거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우리 집 남자다.


이번에도 역시 밤 11시가 넘었다. 크리스마스이브날이었다.

아이는 산타를 기다리며, 자야 하는데 설렘에 잠이 쉬 오지 않는다.

어떻게든 재우려고 나는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젠장할..)

"왜!!" 뻔하니까 나의 첫마디는 이랬다.

"00자?"

"아직 안 자"

"그래? 그럼 떡볶이 먹을래?"

"쫌!! 돼지냐? 저녁을 그렇게 먹고 떡볶이가 먹고 싶냐? 그것도 밤 11시가 넘었는데? 내가 이 시간에 뭐 먹는 거 봤냐? 진짜 왜 그러냐 맨날 지생각만해. 이 시간엔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아!!"

따발총이었다. 나도 모르게.. 아이가 듣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완전 열폭해서 블라블라.....


다시 아이를 재우기 위해 나란히 누워 토닥토닥하며 이야기를 했다. 아이가 말한다.

"오늘 밤엔 산타 할아버지가 오겠지? 그래서 기분이 두근두근하고 있었는데 슬픈 일이 발생했어."

"왜? 어떤 슬픈 일이 발생했을까?"

"그게 뭐냐면~~ 엄마가 아빠에게 화를 많이 낸다는 사실이지. "

"........ 그.. 으.. 래...?

00아 엄마 얘길 좀 들어봐. 조금 전 통화할 때의 상황이 어떤 건지 너도 다 들었지? 아빠가 엄마 말을 안 들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엄마도 네 앞에서 아빠한테 화내는 모습 보이기 정말 싫은데 말이야..."

"그럼 엄마가 아빠한테 다정하게 말해봐."

"응? 다정하게? 아빠가 잘못했는데 엄마가 다정해야 해?"

"엄마가 다정하게 말을 하면 아빠가 엄마 화나게 하는 게 '에이~이제는 재미없네' 하면서 말을 잘 들을 거야. 엄마가 자꾸 화를 내니까 아빠는 재밌어서 더 말을 안 듣는 거라고.

만약에 엄마가 아빠를 화나게 해서 아빠가 화를 내면 내가 아빠한테도 말할게.

엄마에게 다정하게 말하라고. 그러면 엄마도 재미없어서 아빠를 화나게 안 할 거라고."

"엄마는 아빠를 화나게 하지 않잖아. 아빠가 엄마한테 화내는 거 봤어?"

"아빠가 화내는 건 못 봤지만, 지금처럼 엄마가 자꾸 아빠한테 화를 내면 아빠도 화가 날지도 모르잖아."

"그랬구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아들?"

"엄마랑 아빠랑 통화하는 걸 들으면서 번쩍하고 생각이 떠올랐어."

"고마워 아들.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엄마가 해볼게. 우리 아들 많이 컸네. 앞으로도 엄마가 모르는 건 다 너에게 물어봐야겠다. 완전 해결사 인걸? "


아이가 잠든 모습을 보며 오랜 시간 생각에 빠졌다.

어느새 커서... 어릴 땐 무조건 엄마 편이더니 이젠 아빠 입장도 생각하고, 화나게 하는 사람에게 다정함으로 화를 이기라는 조언까지 해주다니....

미안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이런 마음을 남편은 알까 싶어 눈물이 나기도 했다.


마음은 꼴 보기 싫은 남편의 그런 모습이 커져만 가는데, 아이의 미션대로 내 안의 페르소나를 꺼내야 하는가 생각했다.

아이 마음속에 불안이 조금씩 쌓이게 만든 것 같아서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떠나질 않았다.


<나의 아저씨>에서 지안의 말처럼 우리 집 남자의 "뭐 사가?" 도 가장 따뜻한 말로 내가 받아들일 수 있기를.


한 줄 요약 : 억지로 바꾸려 하지 말자. 우회하는 것도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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