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7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2년 전, 고종은 비밀리에 환구단 신축을 명했다.
2년의 준비 끝에, 대륙의 사신을 맞이하던 옛 남별궁 터 위에 대한제국의 천제를 올릴 신단이 세워졌다.
1897년 9월 9일. 대한제국 선포 한 달여 전,
법제청 관보과 서기관 심의직에게 고종의 밀명이 전달되었다.
“유교 심종에 전하라.
팔도 강산의 이름을 바르게 정명(正名)하라.
대한제국 선포의 기틀이니다.”
밀명과 함께 향찰령 백 개가 전달되었다.
산천의 이름을 다시 쓸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증표였다.
그것은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어지였다.
심의직을 통해 고종의 밀명은 전국 향교로 퍼져갔다.
밀명을 받은 유교 심종 정명사들은 고을의 이름과 땅과 물의 이름을 다시 지었다.
심의직은 관보에 매일 같이 조선의 고을과 산과 강의 새로운 이름을 공고하였다.
조선의 하늘과 바람과 별빛조차 하나 씩 다시 쓰이는 듯하였다.
“벌써 천 여 곳이 넘는구만.”
심의직은 관보에 올릴 새로운 지명들을 살펴보며 혼잣말을 했다.
그의 곁에서 문서 정리를 돕던 하급관원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이렇게 많은 지명을 바꾸는 이유가 있습니까?”
심의직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꾸했다.
“나랏님께서 나라이름 전에 팔도 이름부터 바꾸고 싶으신 겐가 보지.”
젊은 관원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의직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을 일일이 설명한들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팔도 곳곳마다 새로운 이름을 짓는 정명의 제례로 대한제국 태동의 기운이 모여지고 있었다.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거슬러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유교 심종사들은 나라의 이름을 새롭게 할만큼 역발산 기개세,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한 능력을 가진 선비들이었다.
1897년 10월 3일. 청나라 《신광서보》의 사설이 고종의 집무실에 놓여졌다.
朝鮮稱帝,實為自取滅亡之道
(조선칭제, 실위자취멸망지도)
조선이 황제를 칭하는 것은 곧 멸망의 길이다.
고종은 신문을 내려다보며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신문지를 구겨 책상에 던지며 말했다.
“팔도의 모든 심종사들을 소집하라.”
보이지 않는 전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897년 10월 9일. 가을비가 줄기차게 쏟아지던 날.
청나라 북양대인이 황제즉위식 참석을 명분으로 입국했다.
겉으론 외교사절단이었으나,
그 그림자 아래엔 천 명의 술사가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 밤, 북양대인은 밀명을 내렸다.
“조선은 황제의 자격이 없다.
봉선은 하늘을 속이는 일이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저지하라.”
말은 짧았고, 명령은 칼처럼 번져나갔다.
그림자들은 각지의 사찰, 관아, 주막에 흩어졌다.
손끝에는 피 대신 음기가 흐르고, 눈빛은 달빛보다도 차가웠다.
1897년 10월 12일 새벽. 환구단은 아직 어둠 속에 있었다.
촛불 몇 줄기만이 제단 아래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고종은 침묵한 채 면복을 입었다.
예의사의 인도로 제단으로 향했다.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절차는 예기(禮記)의 규정대로 이어졌다. 찬의가 크게 외쳤다.
“국궁, 사배, 흥, 평신!”
백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의정대신이 꿇어앉아 홀(笏)을 꽂자, 고종은 금장 의자에 앉았다.
“황제께서 대위에 오르십니다. 신들이 삼가 어보를 바칩니다!”
옥보가 두 손으로 받쳐 올려졌고, 황제의 자리는 마침내 세워졌다.
제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봉행되었다.
그러나 그 완벽한 의식의 틈새마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한편, 환구단의 이면. 또 다른 시공간.
삼단 제단의 방위마다 백 명의 심종사들이 앉아 있었다.
결계는 숨을 죽이고 팽팽히 이어져 있었다.
“몰려옵니다.”
서백호의 노인이 눈을 들며 말했다.
“천 명쯤 되어 보이는군.”
북현무의 원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어차피 살아 돌아갈 생각은 없었소.”
그 순간, 오방의 틈이 일제히 흔들렸다.
술사 천 명의 기류가 결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장육부가 얼얼할 정도의 압박.
먼저 일어선 자는 동청룡의 여인이었다.
지팡이 하나를 바닥에 툭 내리찍으며 말했다.
“죽어도, 이 자리는 못 내어준다.”
뒤따라 중단에서 한 인물이 일어섰다.
“저승길이 외롭지 않겠구나. 오너라!”
누군가 웃으며 덧붙였다.
“온 날은 달라도, 가는 날은 같으니 호상이요.”
핏빛 기운이 휘돌며 모두가 제자리에 섰다.
하단엔 수호자 다섯. 중단엔 음양 조율자들.
상단엔 원로 열 명. 도합 백 명의 심종사가 방위를 둘렀다.
침입은 하단부터 시작되었다.
백호 수문장이 양팔을 벌리자 땅이 울렸다.
술사들이 결계를 깨고 파고들었다.
중단의 결이 어긋났다. 북쪽 하늘에서 어둠이 갈라졌다.
비기와 신력의 칼날이 부딪쳤다.
청룡의 여인이 무릎을 꿇었다.
피를 삼키며 그녀는 다시 일어섰다.
그녀의 손끝에서 결이 되살아났다.
상단의 열 원로는 등을 맞대고 좌정했다.
쇠북, 거울, 부채, 방울, 지팡이. 각자의 비기가 동시 발동됐다.
제단 중심에서 빛이 피어올랐다.
“이제, 갈 때가 되었구려.”
중단의 노인이 반으로 부러진 고검을 꺼냈다.
“이 자리가 무너지면—”
“하늘에 올리는 천제의 맥도 끊기겠지.”
“허망하지 않게, 다 같이 갑시다.”
열, 스물, 백. 심종사 백 명이 일어섰다.
검, 부채, 방울, 지팡이, 거울. 백 가지 비기가 하나의 결로 수렴되었다.
한순간. 시공이 찢겼다.
백 개의 심종 비기와 백 명의 정신체가 동시에 파열됐다.
그 힘은 방어였고, 또한 최후의 일격이었다.
청나라 술사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들의 정신은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고요가 찾아왔다.
그날 의식은 끝까지 이어졌다.
향은 피어올랐고, 백관은 절을 올렸다.
환구단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그 아래에서 백 개의 심장이 멈추었다는 것을.
북양대신은 자근 자근 입술을 깨물며 분통하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제의 제단은 완성되었고, 그는 그것을 끝끝내 무너뜨리지 못했다.
1897년 10월 12일, 자시(子時)
제례를 끝내고 돌아온 고종은 아직 면복을 벗지 못한 채, 경복궁 근정전의 어좌에 앉아 있었다.
수라상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식어가고 있었다.
근정전 바닥엔 촛불만이 희미하게 타고 있었다.
문무백관이 모두 물러간 뒤, 고종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심의직은 들라.”
관보과 서기관 심의직이 조심스레 들어와, 황제 앞에 엎드렸다.
“임무는 완수되었습니다, 폐하.”
고종은 침묵했다. 눈빛엔 피로와 절망이 얽혀 있었다.
“백 명의 쓸만한 선비가 사라졌구나.”
심의직은 더 말하지 못했다.
그 때, 내전에서 급히 달려온 의정대신이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전하, 청나라 북양대인의 휘하 사절단이 모두 돌아갔습니다.
별다른 해꼬지 없이 철수했다고 합니다.”
고종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팔 받침의 옥단청이 미세하게 울렸다.
고종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제복의 단추도 채 벗지 못한 채 였다.
"심의직은 관보에 대한제국이 선포되었음을 알리도록 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고종은 마지막으로 의정대신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의금부도사에게 전하여 심종 선비들의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
다만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
다음날, 새벽.
의금부도사 정안조는 수십 대의 수레를 몰고 산 너머 숲에 도착했다.
수레 안엔 무명천으로 감싼 백 구의 육신. 차갑고 조용했다.
그는 수레 옆에 앉아 입을 열었다.
“심종은 역발산 기개세하나…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구나.”
군사들이 묵묵히 땅을 팠다.
이름 없는 백 명의 심종사. 조선의 마지막 남은 힘이었지도 모른다.
정안조는 두 눈으로 망해가는 조선과 힘없는 청국을 목도하고 있었다.
조선이나 청이나 이와 같다면 일본만이 그의 야심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정안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심종 선비들을 모두 소모해서 대한제국을 세웠으나,
지탱할 자가 남지 않았으니…
조만간 이 나라는 망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