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것이 없는 이유
누군가 울고 있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해야 옳은 일이라고 느끼시나요?도와야 할까요? 아니면 조용히 있어야 할까요?혹은 그냥 지나쳐도 괜찮을까요?그 누군가가 살인자라면 방금의 그 선택은 옳은 것인가요?
“나는 양심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그 양심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할까요?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양심'은 누구의 것일까요? 내 것일까요?모두의 것일까요?
양심은 실체가 아닙니다. 양심은 하나의 원칙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깨어나는 미묘한 떨림일 뿐입니다. 울고 있는 누군가에 마음이 공명하고, 그 마음의 떨림이 몸을 움직이게 하고, 그 움직임이 공화로움에 가까울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옳음’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고정된 '옳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세상이란 것조차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함께 살아 움직이는 관계동참일 뿐입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얽히고 반응하며 서로의 떨림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삶의 동참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 동참이 깊어질수록, 나의 태도는 변하고,그 변화가능태를 우리는 ‘좋음에 반응하는 능력(양지양능)’이라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양심입니다.판단이 아니라 공명, 도덕적 가치 고정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변동성 위의 감응, 그것은 법이 아니라 태도입니다. 양심은 지켜야 할 도덕률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삶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관계동참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감응의 흐름입니다.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내가 멈춰 서고, 바라보고, 손을 내밀었다면 그때, 내 양심이 숨을 쉬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연쇄살인범이라면 공화로움의 관점에서 옳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공화로움 가운데 살펴가는 것이 지행합일이며 그렇게 순간순간 공명하는 그 자체가 양심이며,양지양능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외부에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은 나의 마음이, 관계라는 연못 위에 스치는 바람에 따라 이는 물결일 뿐입니다.
그 바람이 불 때, 물결이 이는 그 순간, 그 움직임이 바로 관계동참의 양심입니다. 그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는 결과로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옳다고 하더라도 그 공동체의 공화로움에서 옳은 것이지 보편적 옳음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마무라 쇼헤이감독의 나라야마 부시코(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에서는 에도시대 산골마을의 생존을 위해 입이 늘면 노모를 등에 업고 산에 버리는 내용이 그려집니다. 그것이 그 산골마을에서는 집단의 생존과 공화를 위한 양지양능이 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양심은 인의예지와 같은 인간의 덕목 조차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고상하고 훌륭한 것이 양심이었으면 인의예지 양심이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아직도 양심적인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요?혹시 양심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옳음으로 스스로를 단죄하고 타인을 단죄하고 있지는 않나요?우리는 스스로를 맑게 가라앉히고 실체 없는 양심의 경계를 살피며 예악을 찾아가는 존재들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