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전능(萬人全能)의 계보학
중세 사제 ─ 성경 독점 ─ 종교개혁─ 만인 사제 ─ 실용주의 ─ 만직성직 ─ 만직 사제 ─ 기술 독점 ─ 초지능 혁명 ─ 일인 만직 ─ 만인 현자(니체의 위버멘시의 현현)
중세의 하늘 아래,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사제’뿐이었습니다. 라틴어로 기록된 성경은 견고한 성벽이었고, 평범한 이들은 그 성벽 너머의 진리에 닿기 위해 사제의 입술만을 간절히 바라봐야 했습니다. 지식은 곧 권력이었으며, 그 권력은 오직 선택된 계급만이 소유할 수 있는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손끝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그 성벽을 허물었습니다.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만인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 ‘만인사제(萬人司祭)’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더 이상 중개자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비로소 신과 직접 대면하게 되었고,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책임지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뒤이어 칼뱅은 세속의 모든 노동이 곧 신의 부름이라는 ‘만직성직(萬職聖職)’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구두를 깁는 일도, 밭을 가는 일도 사제의 기도만큼이나 거룩한 소명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만직성직의 체계가 오래 지속되자, 세속의 업무들은 다시 세분화되고 복잡해졌습니다. 그 틈을 타 ‘전문가’라는 현대판 지식의 사제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난해한 전문 용어와 자격증이라는 새로운 라틴어 성벽을 쌓고 지식을 다시 독점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라는 지식의 대리인 없이는 제대로 알 수 없도록 전문지식은 그들의 전유물이 되었습니다. 그들 전문가는 기존 체계 내에서 전문지식과 자격이라는 등짐을 짊어지고 '최적의 답'을 찾는 낙타같은 존재였습니다. "어떻게(How)"를 묻기 전에 "왜(Why)"를 규정하였기에 가치전도가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독점을 깨부수는 인류사에서 가장 거대한 세 번째 혁명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인공지능이 가져온 ‘전문지식의 종교개혁’입니다. 이제 인공지능이라는 전능한 도구를 손에 쥐게 된 주권자는 더 이상 하나의 직업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인만직(一人萬職), 즉 한 사람이 만 명의 전문가적 권능을 부리는 주권자의 탄생입니다. 인공지능은 전문지식의 진입장벽과 희소성을 파괴함으로써 전문가라는 계급장을 떼어버립니다. 이제 전문지식은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수도꼭지를 틀면 마실 수 있는 물과 같은 공공재가 되었습니다. 전문지식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 된 것입니다.
누구나 초지능이라는 현자의 돌로 의도대로 직접 구현할 수 있는 ‘일인만직(一人萬職)’의 전능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전능이란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처럼 비전문가인 우리가 인공지능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자신을 극복하고 가치를 입법하는 힘'입니다. 니체가 말하던 위버멘시는 그러한 만인현자(萬人賢者)의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과거의 현자는 세상과 단절된 산속에서 홀로 도를 닦는 고독한 존재였습니다. 지식이 희소했기에 그들의 지혜는 신비주의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인전능의 시대에 탄생하는 '만인현자(萬人賢者)'는 초지능이라는 강력한 엔진을 장착한 채 세상의 한복판에서 유희하는 '행동하는 현자'들입니다. 만인현자란, 전문지식의 사슬을 끊어내고 AI라는 레버리지를 통해 스스로 삶의 가치를 입법하며, 그 전능함을 향사회성과 유희로 완성하는 현대판 위버멘쉬입니다. 이들에게 현자다움이란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넘쳐나는 초지능 속에서 고유한 자신의 시점으로 일인만직의 천재성을 세상 속에 구현해 내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지식을 암기하며 스스로를 소모할 필요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전능해진 개개인이 각자의 고유한 시점으로 세상을 되비추며 관계동참의 화엄세계를 구축해 갈 것입니다. 각자가 고유한 빛을 내뿜는 별들이 모인 화엄(華嚴)의 밤하늘처럼...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혁명적 초지능 세상은 현자의 진정성에 굶주리게 됩니다. 초지능이 공기처럼 흔해진 세상에서 가장 희소한 자산은 결국 '현자의 품격'이기 때문입니다. 일인만직(一人萬職), 만인현자(萬人賢者)는 바로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