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적 진화

통찰의 전승

영성적 진화란 우리의 영혼이 거창하게 고양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라는 개체가 삶의 풍파를 견뎌내며 남긴 활동의 흔적들을, 다음 세대가 이을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여 전승하는 지극히 객관적인 집단지식 업데이트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 느낀 깨달음이 아무리 고귀할지라도, 그것이 정교한 문장으로 설계되어 다음 세대의 뇌에 복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화의 계보에서 쓰레기처럼 버려질 사적 환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진화를 진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역사가 증명하는 진실은 차갑습니다. 천지자연이라는 거대한 환경이 생명체를 거를 때, 이를 부수고 나간 영웅은 없었습니다. 오직 그 가혹한 천지불인을 끝까지 견뎌낸 존재만이 다음 세대로 자신의 정보를 넘겼습니다.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성적 진화는 신비로운 초능력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라는 잔인한 환경을 어떻게든 견뎌낸 우리가, 그 견딤의 과정에서 얻은 삶의 요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지금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가운데 고통스럽다면, 우리는 지금 진화의 가장 뜨거운 용광로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유전자의 운반체일 뿐이지만, 우리의 정신은 통찰의 운반체입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밈​(Meme, 유전자처럼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복제되고 전달되는 문화적 정보 단위)의 관점에서 볼 때, 개인의 주관적인 영적 체험은 개체의 죽음과 함께 완벽하게 소멸합니다.

​집단이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사적 느낌이 아니라 우리가 남긴 정보입니다. 유전자가 단백질을 복제하듯, 영적 진화는 우리의 깨달음을 타인의 정신 구조 속으로 복제해 넣습니다. 이때 전승의 매개체는 명상이 아니라 언어입니다. 언어를 입지 못한 영성은 유전 정보를 잃어버린 세포처럼 허망하게 사멸합니다.

​불교의 무아(無我, 고정된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와 포스트구조주의(Post-structuralism, 하나의 정답이나 고정된 중심을 부정하고, 관계와 맥락 속에서 의미 탐색)가 만나는 지점은 서늘합니다. 나라는 고정불변의 영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라고 믿는 존재는 사실 우리 이전에 세상과 부딪히며 남긴 활동의 흔적들의 집합체일 뿐입니다.

​자크 데리다가 간파했듯, 실체는 부재하지만 그 흔적들이 텍스트가 되어 세계를 구성합니다. 영성적 진화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실체 없는 내가 세상에 어떤 가치 있는 궤적을 남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치열한 설계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남긴 문장과 행동 그 자체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라고 일갈했습니다. 언어화되지 않은 영성은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은 심연의 평화를 맛보았어도 그것이 집단지식의 언어로 치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침묵의 나그네일 뿐입니다.

​결국 영성적 진화의 완성은 치열한 기록에 있습니다. 주관적이고 희미한 흔적을 깎고 다듬어, 누구나 읽고 사용할 수 있는 객관적 통찰로 변환하는 것. 그렇게 우리의 고통이 정교한 문장이 되어 타인의 삶을 구원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을 초월하여 집단의 계보에 기억됩니다. 이것이 현대적인 영성적 진화의 의미입니다.


집단지식의 형식으로 전해지지 않는 것은 영성적 진화가 아닙니다. 이 삶의 고통 가운데 나의 견딤을 글로 전하는 것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이자, 집단의 영성적 진화의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