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유 이야기
고대의 지식은 결코 평등하게 공유되지 않았습니다. 고대에는 무유집단들이 하늘과 땅의 이치를 독점하고 그것이 주술적 통치의 권력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하늘의 운행을 읽는 가문, 땅의 이치를 거둔 가문, 대기운화의 시계열 정보를 독점한 가문 등 무유(巫儒) 집단은 각자의 '주술(呪術)'과 '이치(理)'를 가문 내에서만 은밀히 전승하였습니다.
양무제(梁武帝)는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각 가문에 흩어진 이 파편화된 지식을 하나로 모아 표준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진시황의 서체, 도량형, 수레바퀴 폭 표준화에 비견될만한국가 지식DB의 리터러시(정보를 찾고 평가·활용하는 포괄적 역량) 프로젝트였습니다. 진시황이 국가적 인프라가되는 하드웨어를 표준화했다면 양무제는 소프트웨어를 표준화한 셈입니다.
그 결과 주흥사가 수행하게 된 거대 지식체계의 표준화 작업은 단순히 글자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통경전 뿐 아니라 제국 각지에서 수집된 가문별 비전지식들 사이의 정합성을 맞추고, 이를 단 천 글자로 지식 DB 구성도를 작성해내야 했습니다. 천자문은 실로 당대의 지식과 통찰을 집대성한 문화문명구성도였던 것입니다.
천지현황의 현(玄) 한 글자에만 천재 왕필의 현학의 이치를 수렴하고 있습니다.
'일월영측 진수열장'은 천문학이며
'운등치우 노결위상'은 기상학이며
'옥출곤강'은 지리학에 해당합니다.
주흥사가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릴 정도로
하룻밤의 고된 작업을 넘어 사실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수 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각 무유 가문의 기밀 지식 표준화는 상당한 주술적 저항이 있었을 것입니다.
귀신이 알려주었다는'언재호야' 마지막 네 글자는 이러한 지식 DB 리터러시 과정의 무유집단의 저항이 최종적으로는 국가권력에 순응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끝까지 감추고 있던 고대 기밀지식의 해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국가지식DB 체계에 편입되지 못하는 지식의 비주류 전락에 대응한 무유집단의 자의반 타의반의 국가정책 순응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천자문에 대한 기록의 비어있는 행간을 들여다보면 세간에 전해지지않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작가로서 가슴떨리는 부분은 바로 이러한 행간 여백에 숨겨진 이야기입니다.
천자문
천은 가물하고
지는 너르합니다.
우는 상하사방 너른 공간이며
주는 고금왕래 거친 시간입니다.
해는 다 이르면 공간상 기울어지고
달은 다 채우면 시간상 이지러집니다.
12진은 황도 주천을 나누어 시간상 벌려져 있고,
28수는 일월이 만나는 은하 공간상 베풀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