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으로 관계맺기

영웅의 여정

2. 씽(Thing)의 고고학


이제 우리는 에설런의 절벽에서 내려와, 게슈탈트 기도문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 보도록 합니다.어두운 시대 가운데 빛나는 게슈탈트 기도문의 별자리들 가운데 유달리 빛나고 있는 별은 '씽(Thing)'입니다.

그러면 씽(Thing)이란 단어부터 들여다 보기로 합니다.

잠시 음미해보지 않으면 일(thing, 씽)을 먹고살기 위한 직업(job, 일)이나 사회적으로 마땅히 수행해야 할 과업(task, 일) 정도로 읽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문장은 "나는 내 업무를 볼 테니, 너는 네 업무를 봐라"라는 개인주의 선언으로 왜곡될 수 있습니다.


좀 더 깊게 들여다 보기 위해 프리츠 펄스의 모국어인 독일어의 뉘앙스를 추적해 봅니다. 펄스가 영어 씽(Thing)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개념은 독일어의 자헤(Sache) 혹은 본질(Wesen)에 맞닿아 있습니다.

이 부분은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계보학적으로 연결됩니다. 하이데거는 사물과 대상을 엄격히 구분했습니다. 대상(Object)이란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측정 가능하며 도구적으로 이용되는 껍데기입니다. 반면 사물(Thing)은 고대 독일어 '띵(thing)'이 의미하듯,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 즉 세계를 모아들이고 의미를 발생시키는 사건 그 자체입니다.


펄스가 "I do my thing"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나는 남들이 정해놓은 규격품(Object)으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내가 주인이 되어 의미를 발생시키는 사건(Thing)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존재론적 선언입니다.

우리는 장미가 붉게 피어나는 것,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 심장이 1분에 60회 이상 박동하는 것을 노동(Labor)이나 과업(Task)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장미는 붉게 피어나기 위해 야근하지 않으며, 강물은 흐르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존재가 타고난 물리적이고 생물학적 본성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가 등장합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 증대하려는 성향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해야 함(Should)'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그러함(Is)'입니다. 펄스가 말한 '나의 일(My thing)'은 바로 이 코나투스입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성공과는 무관하게, 내 생명이 저절로 뿜어내는 고유한 리듬이자 야생의 에너지입니다.

그렇다면 비극은 어디서 시작됩니까? 바로 우리가 이 '본성(Thing)'의 자리에 타인의 욕망이 주입된 '과업(Task)'을 대치해 놓은 지점입니다.


"성공해야 한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명제들은 나의 심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모, 학교, 국가, 종교가 만들어낸 사회적 계약입니다.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지적했듯, 우리는 언어와 규범이라는 질서(에피스테메) 속에 갇혀 사물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사회가 "이것이 너의 일이다"라고 명명한 것들을 수행하느라, 정작 내 심장이 왜 뛰는지, 내 영혼이 무엇을 원했는지를 망각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라, 자기 소외(Self-alienation)라는 심각한 질병입니다.


왜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버리고 타인의 과업을 껴안게 되었을까요? 펄스는 이 병리적 현상의 원인을 내사(introjection)라는 정신분석학적 기제로 설명합니다.

내사란 문자 그대로 안으로(intro) 던져 넣다(jection)라는 뜻입니다. 펄스는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론인 치과적 공격성(dental aggression)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발달 단계를 항문기나 구강기 같은 성감대를 중심으로 설명했지만, 펄스는 이를 음식 섭취 방식, 즉 '이빨'을 중심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유아는 처음에 이빨이 없어 젖을 빱니다(Suckling). 이때는 어머니와 자신이 분리되지 않은 융합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빨이 나기 시작하면 아이는 음식을 씹어 부수고(Biting/Chewing), 소화하여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여기서 중요한 통찰이 도출됩니다. 펄스에게 있어 '씹는 행위', 즉 공격성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외부의 물질(음식, 지식, 가치관)을 파괴하여 나의 피와 살로 만드는 창조적이고 필수적인 생명 활동입니다. 씹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내사(introjection)란, 이빨을 사용하여 씹지 않고 외부의 이물질을 덩어리째 삼키는 행위입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도록 합니다. 부모나 교사는 아이에게 수많은 도덕과 규칙을 주입합니다. "남을 배려해야 해", "화내면 나쁜 어린이야", "공부를 잘해야 훌륭한 사람이야." 아이는 생존을 위해, 즉 양육자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혹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이 명제들을 비판적 사고(이빨)로 씹어보지도 못한 채 꿀꺽 삼킵니다.

문제는 성인이 된 이후입니다. 위장 속에 들어온 음식물은 위산에 의해 분해되어야 하지만, 내사된 신념들은 분해되지 않은 채 뱃속에서 딱딱한 돌덩이처럼 남아 있습니다. 이 소화되지 않은 타인의 신념들이 내면에서 끊임없이 독소를 뿜어냅니다.


"쉬고 싶다"는 나의 욕구(Want)와 "게으르면 안 된다"는 내사된 신념(Should)이 충돌할 때, 우리는 심리적 복통, 즉 신경증(neurosis)을 앓습니다. 펄스는 신경증을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이라는 이물질과 개인의 생명력이 마찰을 일으킬 때 발생하는 스파크라고 보았습니다.


이 현상을 미셸 푸코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더욱 섬뜩해집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권력이 어떻게 '순종적인 신체(docile body)'를 만들어내는지 분석했습니다. 학교, 군대, 병원과 같은 근대 기관들은 개인을 규격화된 부품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규율을 주입했습니다. "차렷, 열중쉬어"와 같은 구호에 조건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신체는 이미 내사가 완료된, 즉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신체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싫은 내색을 하지 못한 채 억지 미소를 짓는 것은 우리가 '착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체와 정신이 권력에 의해 내사되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거부하고 싶어도 입에서는 "네, 알겠습니다"가 튀어나오는 현상, 이것은 자율성의 상실이자 신체적 굴종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토록 쉽게 타인의 신념을 삼켜버리는 것일까요? 현대 뇌과학은 그 이유를 편도체와 전대상피질의 작용으로 설명합니다.


앞서 서론에서 언급했듯, 인간의 뇌는 사회적 거절을 생존의 위협으로 간주합니다. 타인의 신념을 씹어서 뱉어내는 행위(거절)는 원시 시대의 뇌에게 있어 무리에서의 추방,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씹지 말고 삼켜라, 그래야 안전하다"는 진화적 명령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생존 본능의 오작동입니다.


결국 "나는 나의 일을 한다"는 선언은 필연적으로 심리적인 구토를 동반해야 합니다.

내 위장을 채우고 있는 것이 나의 영양분이 아니라 타인이 강제로 집어넣은 이물질임을 자각하고, 그것을 토해내는 고통스러운 정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펄스는 환자들에게 "당신이 삼킨 부모를 토해내라"고 과격하게 주문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패륜이 아니라, 부모의 가치관과 나 자신의 가치관을 분리하여 독립된 자아를 확립하라는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명령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 바로 이 내사의 껍질을 깨는 과정입니다. 알은 하나의 세계, 즉 부모와 사회가 만들어준 안전하지만 질식할 듯한 내사의 세계입니다. 태어나려는 자는 이 세계를 파괴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속은 어떻습니까? 더부룩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옳다고 믿고 있는 그 신념들, 정말 우리가 직접 씹어서 소화한 것입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우리의 입에 억지로 밀어 넣은 것입니까? 이제 우리는 펄스의 56개 단어라는 이빨을 빌려, 그 딱딱한 이물질들을 씹어 부수러 갈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치유가 아닙니다. 잃어버린 야성을 되찾는 복원 사업입니다.


이것이 이책의 서문에 영웅의 여정(히어로즈 저니)이라고 밝힌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