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숨결
능산 사원.
달은 구름 뒤로 사라졌고, 별빛조차 숨을 죽이고 있었다.
살겁에 단련된 살수들의 훈련된 발걸음이 반월형으로 포위를 좁혀왔다.
능산 사원 2층의 밀실 앞을 막아선 무녀들은 회랑의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살수들의 그림자를 어림해 가며 단검을 겨눈 손은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때였다.
지축이 찢어지는 말발굽 소리가 어둠 속에서 질주해 왔다.
함성과 함께 비로사율의 기마대가 당 살수대를 향해 쇄도했다.
철갑 기마에 돌파된 살수 십여 명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식간에 쓸려 나갔다.
기마대는 말고삐를 당겨 돌려세우며 다시 살수들 사이로 쏟아져 들어갔다.
말발굽은 쓰러진 살수들의 몸을 짓이겼다.
당황한 살수들은 기마대를 피해 사원 회랑으로 몰려 들어갔다.
비로사율은 기마를 탄 채로 2층 계단을 오르며 말발굽으로 적을 걷어찼다.
말에 뛰어내린 그가 칼등으로 내리치자 기마가 날뛰면서 혼란해졌다.
이틈에 기마무사들은 말의 속도로 질주해 와 2층으로 도약해 왔다.
비로사율이 외쳤다.
"사야님을 지켜라!"
"페제 사야!"
무사들은 세 배나 많은 살수들을 2층의 이점으로 분쇄해 나갔다.
회랑에는 쇠의 부딪힘과 갑주가 찢기는 소리가 뒤섞였다.
한 칼에 한 걸음.
비로사율은 검끝을 좇아 몸의 중심을 던지며 한 칼에 한 걸음 일격을 날렸다.
그의 옆구리도 찢겼다. 어깨의 철갑 편이 터지면서 피가 튀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살수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들은 목숨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차례차례 기마무사들은 쓰러졌다.
비로사율이 적을 쓰러 드리는 순간,
마지막 살수 하나가 밀실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가녀린 그림자가 길을 막았다. 단비남해였다.
살수의 칼날이 번뜩이고, 핏물이 허공을 가르며 흩어졌다.
이번에는 세류파혜가 살수의 등 뒤를 껴안았다.
살수는 검을 뒤집어 번개처럼 그녀의 복부를 찔렀다.
윽... 세류파혜의 몸이 굽어지듯 무너졌다.
이때 여울소담의 단검이 살수의 목을 파고들었다.
살수는 절명하면서도 무녀를 후려쳤다.
밀실 문턱 앞, 무녀들의 피가 고여 핏발을 이루었다.
처절하던 비명과 불꽃을 튀기는 병기들의 혼란함은 사그러들었고
또렷한 사야의 기도만이 핏빛 회랑에 울려 퍼졌다.
고대의 언어였다.
“바람이여, 저의 목소리를 들으소서…
바람의 숨결로 이곳에 머무시고…
바람의 길을 이곳에 남기소서…”
마침내 마지막 남은 살수대장이 비로사율의 검을 쳐내며 날렵하게 2층으로 올라섰다.
수많은 살겁으로 단련된 자가 분명했다.
비로사율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검을 당겨 잡았다.
이번에는 살수대장의 검날이 목을 노리고 들어었다.
비로사율은 급하게 오른팔 갑주 철편으로 막아냈다.
철편이 부서져 내리면서 살수대장의 검이 철편과 팔 사이에 박혔다.
비로사율이 살이 갈라지도록 팔을 비틀어 살수대장의 검이 주춤한 사이
그의 당겨진 검은 적의 갑주 틈, 오른쪽 갈비뼈 밑을 파고들었다.
살수대장도 거의 반사적으로 단검을 뽑아 비로사율을 찔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살수대장의 눈이 확장됐다.
비로사율은 검끝을 세워 끝까지 밀어 넣었다.
살수대장의 숨이 끊어졌다.
비로사율은 숨을 몰아 쉬며 검을 밀실 문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돌려 밀실 문을 가로막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에서 쇳물처럼 뜨거운 무언가가 넘쳤다.
비로사율의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밀실 안의 마지막 향을 올리는 사야가 보였다.
밀실에서 향로의 연기가 봉황의 형상을 이루며 천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야는 제단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었다.
사야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의 진명은 사야은월..."
문너머, 비로사율은 피로 얼룩진 입술을 달싹였다.
"은월…"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때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적사원안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을 들고 밀실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비로사율이 칼과 팔로 문을 막고 있었다.
순간, 밀실 안에서 마지막 고대의 진언이 발성되었다.
"이제 바람을 봉인하노라."
사야가 마지막으로 비로사율을 바라보려는 순간
공간이 무너져 내렸다.
고대언어가 발성되던 순간 적사원안은 2층에서 몸을 던졌다.
정신을 차리니 무너진 사원의 잔해에서 아직도 흙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이마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눈썹 위 핏물을 소매로 닦아내었다.
그때, 무언가 맑은 바람이 그녀를 어루만졌다.
그것은 검은 기운도, 주술 공력도 아닌
그저 서늘하고, 오래된 어떤 숨결이었다.
귀에 스치는 바람은 부드러운 언니의 소리 같았다.
'난, 괜찮아...'
적사원안의 칼이 떨어져 땅에 박혔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적사원안은 횃불을 들어 사원의 잔해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한 줄기 바람만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이름도 형체도 없는 페제의 숨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