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없었다.
그러나 등나무가 보이지 않는 떨림을 전하고 있었다.
향교 후원의 서안 앞에 현옥은 정좌한 채 붓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먹은 가라앉아 있었고, 한지는 여전히 백지상태였다.
향찰령패가 서안 위에 도유사의 말처럼 놓여져 있었다.
“이번 제례는 천지자연을 갈라 상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너무 막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스승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마치 화두라도 던져 놓은 듯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현옥은 이마에 잔뜩 인상을 쓰고는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역적 정안조.
그는 붓 하나로 유달산을 능멸했고, 시회를 열었고, 유림의 피를 끓게 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심종사들만이 느끼는 기척.
그의 원념이 깃든 ‘악기(惡氣)’가
이 땅의 봉인된 결들을 조금씩 풀어내고 있었다.
‘왜 이 제례를 나에게 맡기신 걸까.’
현옥은 눈을 감고 유달산을 마음 심에 담았다.
그때, 시간의 결이 미세하게 달라짐을 느꼈다.
그녀는 붓을 들었다.
선천부필의 기예...
한지 위에 마음 심(心)을 그렸다.
그 찰나, 마음 심(心)에 ‘점’을 찍는 순간—
시공이 갈라졌다.
선천심인법!
현옥의 의식은 정신공간으로 투사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분신을 따라 심연을 유영했다.
시간도, 색도 없는 그곳.
하지만 무(無)는 아니었다.
유타라산의 시공이 막 깨어나려는 순간이었다.
파동은 결을 만들고, 결은 형상을 이뤘다.
그리고 마침내—
천녀, 사라연.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이름이 먼저 떨렸다.
'사라연…'
그녀의 신성의 숨결은
유타라산의 고요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그 신성한 숨결은 유타라와 천계를 잇는 통로가 되었다.
그 순간,
또 하나의 기척이 다가왔다.
보현자-
통로가 열린 유타라를 지키러 온 천계 무사.
그는 유타라 통로를 지키기 위해 내려온 자였다.
그의 기척이 닿자, 사라연의 숨결이 떨렸다.
고요는 선율이 되었고, 사라연은 눈을 떴다.
그녀는 보현자를 향해 눈을 떴다.
보현자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현자는 사라연의 숨결을 끊어 천계의 통로를 닫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는 천계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았다.
그렇게 그는 사라연을 존재로 만든 자가 되었다.
사라연은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하지 못했다.
그가 왜 돌아갈 수 없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긴 침묵 끝에—
허무(虛無)가 꿈틀거렸다.
사랑하지 못한 것, 말하지 못한 감정.
그 모든 무언이 허무였다.
칼도 진언도 닿지 않는 무(無)의 파동.
통로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보현자는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그가 남해를 순시하던 사이,
사라연은 스스로 제단에 올랐다.
칼로 자신의 심장을 세 조각 내었다.
“연남해.”
“아라하.”
“나함사.”
심장 조각은 세 개의 섬이 되었고,
기억은 흩어졌으며,
그녀는 사라졌다.
보현자는 늦게 도착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보검을 꺾었다.
“사라연…”
그녀는 미소 지었다.
“당신은 살아야 해요.
이 허무는, 제가 만든 것이니까요.”
그리고 시공 속으로 흩어졌다.
그날 이후—
세 개의 섬.
세 명의 천녀가 눈을 떴다.
연남해. 아라하. 나함사.
그녀들은 본능처럼 보현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보현자는 누구도 안을 수 없었다.
그것이 그가 받은 벌이었다.
현옥은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삼학도의 전설.
그 실체는 상처였고, 말해지지 못한 사랑이었다.
그녀는 눈을 떴다.
먹먹한 가슴.
그리고—
스승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이번 제례는, 천지자연을 갈라 상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현옥은 향찰령패를 내려다보았다.
알 수 없는 눈물 한 방울이
영패 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