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타라 전기 # 3차 자료조사

친일 유림 거두

by 회안림

1858 정안조 출생

1895 을미사변, 궁내부 비서관 정안조 명성황후 시해 연루

1896 금부도사 정안조 진도 금갑도 유배

1907 고종 승하. 정안조 유배 해제. 유달산에서 시인묵객 시회 개최(50세)

소설에서 유교 심종사 정명사 햔옥이 문자의 제례를 올려

목포 유달산 한자 변경하다. 儒達山

1908 유교 규장각 직각(정안조)

1913 유교 관련 경학원 편찬고문

1930 유교 관련 경학원 명륜학원 총재

1936 정안조 죽다(79세)

1962 삼학도 개발로 훼손 시작

1984 대학루 건립으로 소설 속 현옥과 보현자의 약속이 77년 만에 이루어지다.

2002 친일 유림 거두에 대하여 마침내 문자의 상례를 올리다. 친일파 명단 발표. 소설 속 정명사 현옥의 문자제례가 95년 만에 완결 지어지다.

2003 삼학도 복원되다.



목포 삼학도
전설과 상징성
‘삼학도(三鶴島)’라는 이름은 “세 마리의 학” 전설에서 유래한다. 유달산에서 한 젊은 장수를 그리던 세 처녀가 그리움에 지쳐 죽은 뒤 학으로 환생하였으나, 결국 장수가 쏜 화살에 맞아 떨어진 자리에 세 개의 섬이 솟아났다는 이야기이다. 이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목포 사람들의 향수와 애환을 상징하며, 실제로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 등 지역 문화에도 삼학도가 등장한다. 삼학도는 유달산과 함께 목포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여겨져 왔는데, 목포시장은 “복원이 마무리되면 삼학도는 유달산과 함께 목포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근현대 개발사 (연대별)

1960년대 매립ㆍ연륙 – 해방 이후 목포항이 호남 물류의 관문으로 성장하면서 삼학도 일대도 변화했다. 1962년과 1968∼1973년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매립·연륙 공사가 진행되어 삼학도는 육지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항만 확장을 위한 준설과 공장·주택 개발로 삼학도 본래의 모습은 크게 훼손되었다.

2000년대 복원 추진 – 2000년부터 목포시가 삼학도 원형 복원 사업을 시작했다. 무분별한 매립으로 섬의 형태가 사라진 소·중·대 삼학도를 본래 모습에 가깝게 되돌리는 계획이었다. 초기 복원 방안은 ‘졸속 행정’이라는 시민단체·환경단체의 비판을 받으며 난항을 겪었으나, 2003년 이후 착수된 공사로 차츰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

2007년 개방 – 복원 6년 만인 2007년 3월 초, 삼학도는 다리로 연결된 세 개의 섬 형태로 재탄생하여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당시 목포시는 소삼학도를 중심으로 호안 수로와 다리 5개, 산지 3곳을 조성하고 4만여 그루의 소나무·목련나무 등을 심는 등 옛 모습을 복원했다고 전했다.

2009~2011년 복원·공원 조성 – 목포시는 2009년까지 약 1,243억 원을 들여 삼학도 일대(약 57만 5천㎡)를 공원화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기념관, 선박박물관, 해양식물원 등 문화시설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어 2011년까지 복원 공사를 마무리하여 완전한 세 섬 형태와 자연 생태계를 복원한다는 목표였다. 이 기간에 소삼학도 절개지 매립, 중·대삼학도 사이 물막이 공사, 야간 조명 다리 설치 등이 이루어졌으며, 2010년 경에는 어린이 바다체험과학관도 착공됐다.

행정 정책과 주민 반응 – 복원 사업 추진 과정에서 목포시와 전라남도는 삼학도를 관광·생태·휴양 거점으로 육성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초기에 환경보호 단체와 시민단체는 복원 계획의 타당성·속도에 이의를 제기하며 ‘졸속 행정’이라고 비판했다. 복원 이후 목포시는 노벨평화상 기념관과 이난영 공원, 어린이 해양과학관 등의 조성으로 문화·휴양 기능을 강화하고 있으며, 시는 “삼학도는 목포 시민의 애환이 서린 섬”이라며 랜드마크화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주요 시설 및 상징적 활용

복원된 삼학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기념관(이남만 대통령 고향인 목포를 상징)과 어린이 바다체험과학관 등이 건립되었다. 또한 유달산과 인접한 삼학도 인근에 가수 이난영을 기리는 이난영 공원이 조성되어 ‘목포의 눈물’ 노래가 울려 퍼진다. 현재 삼학도는 산책로와 야경 명소로 자리매김했고, 시민 휴식공간 및 지역 문화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개발과 복원사업은 목포시의 원도심 활성화 정책과 연계되었으며, 주민들은 목포의 역사적 정체성을 회복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더불어 원형 보존 여부에 대한 논의도 병행하고 있다.

출처: 목포시 및 지역 언론 자료를 종합하여 재구성.

유달산(儒達山) 정자·사찰 건립 연대 및 주체 조사

대학루(待鶴樓)

건립 연대: 1984년. 백산블로그(목포 관련 블로그) 기록에 따르면 유달산 입구 하부에 위치한 대학루는 1984년에 시민 휴식공간으로 건립되었다.

건립 주체: 자료에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1980년대 목포시의 공원화 사업의 일환으로 목포시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문헌/기록: 건립 연대는 백산블로그(2016)에 언급되며, 공식 고문헌에는 상세 기록이 없다.


달성각(達成閣)

건립 연대: 1958년. 광복 13주년(1958년)을 기념하여 건립되었다.

건립 주체: 목포시 등 지방 관청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광복 기념 공원 조성 사업). 구체적 문헌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나 지방 행정기관이 건립했을 가능성이 크다.

관련 문헌/기록: 한국향토문화 대백과 등에 건립 연대가 언급되어 있다.


유선각(儒仙閣)

건립 연대: 1932년 10월. 목포 개항(1897년) 35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되었다. 원래 목조건물이었으나 태풍 등으로 파손되자 1973년 콘크리트 건물로 복원되었다.

건립 주체: 지역 유림(儒林) 선비들(학자들)이 주도하여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누각 이름 ‘유선각’도 대학자 정만조가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련 문헌/기록: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등에 건립 연대가 소개되어 있으며, 백산블로그 등에서 정만조와 유림의 관련 내용이 전한다.


관운각(觀雲閣)

건립 연대: 근현대(2000년대 초). 백산블로그에 따르면 일등봉 아래 최상부에 있는 관운각은 “신축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비교적 최근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건립 주체: 목포시가 유달산 공원화 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문헌/기록: 공식 기록은 없으나, 백산블로그(2009)에 “최상부 정자로 신축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언급이 있다.


소요정(逍遙亭)

건립 연대: 1966년. 소요정은 1966년에 세워졌으며, 다도해 전망대 역할을 하는 정자이다.

건립 주체: 목포시가 도시공원 조성 차원에서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 문헌/기록: 건립 연도는 백산블로그(2016)에 언급되어 있다.


유달정(儒達亭)

건립 연대: 구한말(1900년대 초).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려지지 않으나, 대한제국기(1900년대 초) 정만조 선생이 목포로 돌아오던 길에 유달산에서 시회를 열자 지방 선비들이 자극을 받아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부터 산 이름도 ‘儒達山’이 되었다.

건립 주체: 당시 목포 지역의 유림(儒林) 선비들이 주도하여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련 문헌/기록: 구한말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무안 현 편)과 『여지도서』(무안 편)에 유달산·유달봉수 관련 기록이 보인다. 또한 지역 구전과 백산블로그 자료에 이 유래가 전한다.


유달사(儒達寺)

건립 연대: 미상. 유달산 중턱에 위치한 사찰로, 건립 시기나 주체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건립 주체: 전통적으로 유달산을 참배하던 불교 신도들이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나 명확치 않다.

관련 문헌/기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유달산 중턱에 유달사 등 사찰이 자리한다는 언급이 있다. 구체적인 설립 관련 문헌은 확인되지 않는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 학술 자료와 목포 지역 백산블로그, 향토지 등을 종합하여 작성.



정만조(鄭萬朝)의 생애와 친일 행적

정만조(鄭萬朝, 1858년 3월 17일 ∼ 1936년 1월 8일)는 본관 동래, 자는 대경(大卿), 호는 무정(茂亭)으로 조선 말기·대한제국기의 유학자이자 관료였다. 강위(姜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889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부수찬, 승지, 내무부 참의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894년 소윤·궁내부 참의, 1895년 궁내부 장례·비서관, 1896년 의금부 도사 등을 지냈다. 그러나 을미사변(1895) 연루 혐의로 1896년 전라도 금갑도로 유배되어 12년간 복역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된 뒤 사면된 뒤로는 대한제국의 관료가 아닌 일제 통감부·총독부의 편의를 위해 활동하는 친일 학자가 되었다.

1889년: 문과에 병과로 합격(알성문과), 홍문관 부교리·부수찬 임명. 이후 승지와 내무부 참의 등을 역임하며 구한말 관료로 활동했다.

1896년: 을미사변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고 진도 금갑도로 유배(12년 복역).

1907년: 고종 강제 퇴위 후 특별 사면되어 관직에 복귀. 같은 해,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금으로 설립된 친일 단체 대동학회(大東學會)의 평의원 겸 간사로 활동하며, 대한협회와 기호흥학회 회원으로도 참여했다.

1908년: 대한제국 규장각 직각(直閣)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9월부터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위원·교정관 겸 감인위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 4월 조선일보사 주최 일본 시찰단에 참가한 뒤 ‘통감부의 시정 방침이 우리 행복을 증진한다’는 칭송 기사를 남겼다. 10월에는 대동학회의 계승 조직인 공자교회(孔子敎會)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2월에는 일진회가 발표한 합방 청원서에 맞서 국민연설회 발기인 및 ‘조선 정부에 대한 질문장서’ 제술위원으로 참여했다.

1910년: 한일병합 후 체결(8월 29일) 직후 궁내부가 폐지된 잔무 처리에 참여했고, 같은 해 6월 한국평화협회 교육부장에 위촉되었다. 8월 28일부터 순종비 순명황후의 혼궁인 의효전(懿孝殿) 전사(典祀)로 임명되어 1911년 1월까지 이 업무를 수행했다.


일제강점기 관료 생활 및 친일 활동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와 친일 단체에서 적극 활동하며 이른바 친일파 유학자·관료로 활약했다.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1911년 이후: 1911년 5월부터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 위원 촉탁, 1912년 3월부터 1919년 3월까지 총독부 참사관실(參事官室) 위원 촉탁으로 조선 도서의 해제·편찬 업무를 담당하였다.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 기념장을 받았다.

1913년: 총독부 산하 경학원(經學院) 기관지 『경학원잡지』의 편찬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 후원을 위한 경성 군인후원회에 기부금을 헌납했다.

1915년: 다이쇼 천황 즉위 축하 헌시를 지어 바치고(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수상), 같은 해부터 이왕직(李王職) 제사과(祭祀課) 관장·종묘 담당으로 근무했다.

1919년: 친일 유림 단체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가 창립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920년 이사·상무이사·부회장 등 주요 간부로 추대되었다.

1921~1925년: 1921년 경학원 강사, 1922년 『경학원잡지』 편찬장에 임명되었다. 1922년 8월 훈6등 서보장(瑞寶章)을 수훈했고, 12월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인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되어 1925년 6월까지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조선사』 편찬에 참여했다.

1925~1936년: 1925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강사에 임용되어 사망 때까지 재직했다. 같은 해 7월 경학원 부제학을 거쳐 1929년 5월 대제학에 올랐으며, 1928년 11월 쇼와 천황 즉위기념장도 받았다. 1927년 4월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사망까지 활동했고, 1929∼1931년 임시교과서조사위원회 위원으로도 참여했다. 1930년부터는 경학원 내 명륜학원 총재 겸 강사, 청구학회 평의원 등으로 일하며 동아시아 유교 협력·발전 사업에도 관여했다. 1934년에는 천도교 우파 시중회 평의원, 1935년 조선유교회 기관지 경학부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1935년 7월에는 식민지 교육·동화 정책인 ‘심전개발(心田開發)’ 동조 간담회를 주도하고 관련 글을 경학원잡지에 게재했다.

1936년 1월 8일: 향년 79세로 사망했다.


친일 행위와 반민족성

정만조의 활동 대부분은 일제 통치에 협력하는 친일 반민족 행위로 평가된다. 그의 행적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7호(친일 반민족행위)에도 해당한다고 규정되었으며, 특별위원회 보고서 ‘친일 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Ⅳ-16권, 73∼88쪽)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러 공식 명단에 그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705인 명단 등에 모두 수록되었다. 언론에서는 그를 “친일 유림의 거두”로 지칭하며 대표적 친일 유학자로 평가했다. 이처럼 정만조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유교적 지위를 이용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인물로 일컬어지며, 역사학계에서도 전형적인 친일파 유림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참고자료: AKS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정만조), 〈친일파 708명 명단 첫 공개〉(매일신문, 2002), 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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