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가 사랑한 선비 1

붉은 연회, 이름의 울타리

by 회안림

세종 10년 봄,


고요한 봄기운이 들녘을 채운 어느 날. 왕세자의 병세가 호전되고, 조정이 숨을 돌리던 틈에, 세종은 조용히 남행하였다. 방문지는 죽산의 선비, 안망지의 집이었다. 그곳은 오래도록 유교 경전과 불경이 함께 어우러진 고을이었다.


세종은 가장 총애하던 차녀, 정의공주를 그 길에 데리고 갔다. 공주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세종은 어가 안에서 이내 답했다.


“문자를 정비하려면, 그 대업을 감당할 사람을 먼저 찾아야 하느니라.”


세종은 평소 꿈꾸던 문자창제의 대업을 공주에게 숨기지 않았다. 공주조차 대왕에게는 그 대업을 위한 포석이었다. 정의공주는 알고 있었다. 대업을 위한 가문을 포섭하는 도구임을. 그래도 그녀는 최소한 스스로 선택하고 싶었다.


연회는 시들지 않는 봄꽃처럼 길게 이어졌다. 죽산의 선비 안망지의 사저는 작은 고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정갈하고 크나큰 지혜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청 마루엔 정성스레 사군자의 병풍이 걸렸고, 동재에는 공경한 자리를 마련해 고을 사대부들까지도 자리를 함께하였다. 은은한 향이 번지고 있었다. 마루 끝에 놓인 거문고에서 번지는 고느넉한 현음이 대청을 맴돌았다.


정의공주의 시선은 이내 한 소년문사에게 가 닿았다. 소년은 문사들의 중심에서 거문고의 현을 짚었고, 절묘한 음률은 가슴을 울렸다. 의학 뿐 아니라 선비들이 한 번 읽기 소원인 심학까지 통달하여 뭍 선비들을 침묵시켰다. 천재 소년의 이름은 안맹담. 죽산안씨 명가의 후예였다. 공주는 두근거리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그러다 공주는 느꼈다. 그를 오래 바라보던 또 하나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안채의 사대부 여인들 한켠에 조용히 앉은 명가의 규수, 한선이었다. 나이는 비슷해보였으나, 눈빛은 더 깊었다. 안맹담을 바라보는 눈엔 오래된 애정과 알 수 없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정의공주는 미소 지으며 다가가서 앉았다. 사대부 여인들이 공경히 찻잔을 올렸다. 정의공주는 찻잔을 들어 후-불며 남은 호흡으로 물었다.


“저 도령을 잘 아느냐?”


“예, 공주자가. 자주 아버님을 따라 이 집에 드나들며, 저이의 학문과 글을 보아왔습니다.”


한선이 공손이 대답하면서 유독 자주하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 ‘자주’라는 말이 공주의 가슴에 작은 떨림을 남겼다. 한선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공주자가께도... 저이의 뛰어남이 보이시는 듯합니다.”


"네게 그리 보였다니..."


예상보다 직설적인 화살이었다. 공주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내 마음이 드러났다니 부끄럽구나.”


그러나 그 웃음은 봄을 멈추게 할 만큼 차가웠다. 한선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저이를 오래 보아온 저로서는... 뛰어난 저이의 이름이 사서에 드높여 오르기를 바랄 뿐입니다.”


"너의 마음이 각별하구나. 하지만 네 말대로 작은 바람일 뿐 허망한 바람으로 끝날 수 있지 않겠느냐?"


"하지만 공주자가께서는... 저이의 이름을 사서에서 지우셔야 할 분이시지요. 선비에게는 저의 허망한 바람이 오히려 그보다 나은 것이 아닐지요.."


정의공주의 손끝이 멈췄다. 틀린 말은 아니다. 부마가 된다면 왕실의 일원으로 관직에 나서는 것은 제한된다. 미소를 띤 채로 그녀는 말했다.


“묻고 싶구나. 내가 마음먹는다면 난 확실하게 부귀와 권세를 저이에게 줄 수 있다. 넌 그 알량한 바람 말고 뭘 줄 수 있는 게지? 그 바람, 허망하다고는 생각지 않느냐?"


"저는 저이를 계속 보아왔기에 믿습니다.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저 자신도 믿습니다."


"그대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바가 그대의 가문과 저이의 가문이 따라야 할 질서이다."


한선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물었다.


“공주자가께서는 저이를 이름 없이 묻히게 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 여기시는지요?”


"양가의 규수라 어쩔 수 없구나. 질서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질서 자체가 옳음일 뿐이다."


"그저 질서일 뿐이라면 공주자가께서 저이를 놓을 수 없는지요."


"아니... 난 저이를 갖기 위해서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운명을 예감한 듯 한선은 침묵했다. 잠시, 향이 흩어지고 바람이 창을 흔들었다.


"바람이 이니, 한 수 올릴까 합니다."


한선은 잔을 들며 조용히 시를 읊었다.


"바람이 머무를까 등잔불 돋우었네.


밤 깊어 불 꺼진 들 머문다 하리잇고.

마음도 등잔과 같아 기나긴 밤 흔들리네”


정의공주는 마음속으로 발끈했다. 헛된 바람으로 초야를 치른들 그 마음을 잡지 못하면 불안하지 않겠냐는 의미를 숨긴 발칙한 도발이었다.


"절묘하구나."


정의공주가 웃으며 화답했다.


"심지의 불씨 덮어 등잔이 꺼지련만

정 깊은 손길 없이 스스로 꺼질쏜가.

저어라. 밤이 깊으면 그 마음도 깊어갈 뿐"


정의공주의 화답은 질서와 순리대로 살면 마음이 따라올 것이라는 화답이었다. 두 아가씨는 웃었지만, 그 웃음의 가장자리는 칼날을 물고 있었다. 그날 밤. 정의공주는 결심했다. 사서에 남지 않는 이름이라 해도,

그녀가 가진 모든 것으로 대신해주면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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