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의 포석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세종은 웃으며 안망지에게 부탁하였다.
“공의 서재를 둘러보고 싶소. 서책 모으느라 가산을 탕진한다니 궁금하구료.”
안망지의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는 곁에 선 소년문사에게 말했다.
“네가 전하를 모시고 안내해 드려라. 보고 들은 것을 아뢰어도 좋을 것이야.”
안맹담은 공손히 등을 돌려 서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주의 눈길도 한선의 눈길도 그를 따라 갔다. 공주의 눈길은 반짝였고 한선의 눈길은 흔들렸다. 안망지의 서재의 꾸밈은 검소하였으나 서가의 채움은 틈이 없었다. 벽마다 장서가 꽂혀 있었고, 창문 아래 놓인 탁자 위엔 읽던 경서가 문진으로 눌려져 있었다. 서재는 조용했다. 책장마다 유교 경전과 병서, 의방, 불경이 가득했다. 곰팡이 하나 피지 않은 채로 단정하게 정리된 그 서책들의 정갈함.
세종은 문득 서탁에 놓여진 『예기(禮記)』 에 눈길이 멈추어 졌다. 『예기(禮記)』 한 장을 넘기다 물었다.
“네가 읽는 예기란 무엇이냐.”
소년은 고개를 들고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손님을 맞는 예절입니다.”
세종은 흠칫 멈추었다. 어이없다는 표정도 없이, 잠시 침묵하다 되물었다.
“단지 그것뿐이더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단지 그것뿐입니다.”
세종은 책장을 덮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천재소년이라더니 의외의 답이었다.
“본디 중용과 대학조차 예기의 한 편이었느니라. 그러면 대학에서 말하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는 허망한 말이더냐?”
소년문사는 거침없이 말하였다.
“전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성의정심 격물치지에서 시작하니 평천하는 ‘성의(誠意)’에서 비롯됩니다. 손님을 맞는 것이 곧 성의라면, 어찌 그 첫걸음을 허망하다 하시겠습니까?”
세종은 눈빛을 좁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면 네가 말하는, 그 손님을 맞는 것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더냐?”
소년은 책상 곁으로 다가가, 가지런한 서책들을 가리키며 조용히 말했다.
“제례로 조상은 손님이 되어 초혼재생(招魂再生)하고,
독서로 선현은 손님이 되어 독서상우(讀書相遇)하며,
묵좌로 감응은 손님이 되어 격물치지(格物致知)하고,
서예로 흥취가 손님이 되어 육서필법(六書筆法)으로 드러납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세종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며 다시 물었다.
“그 손님맞이로, 어찌하여 치국평천하에 이른다 말하는가?”
소년의 눈빛은 단정했다.
“손님을 보내고 맞는 질서 속에서, 천하가 스스로 길을 만들어 나아갑니다.”
세종은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되물었다.
“유교의 시작이 손님을 맞는 것이면, 그 끝은 무엇이냐?”
소년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공화이옵니다.”
세종은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은 비로소 소년문사에 대한 인정과 흐뭇함이었다. 그리고 또한 세종은 꿰뚫어 보았다. 경서를 넘어서는 천재성은 자유로움에서 기인할 것이었다.
“그러하다. 유교란 곧 사람의 질서로 평천하를 이루는, 공화의 길이다.”
잠시 후, 세종은 다시 서가를 걷다 발을 멈추고 문득 물었다.
“만일 나라에 쓰임이 있으나, 네 이름이 사서에 남지 않는다면, 넌 그것을 어찌 여기겠느냐.”
소년문사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하. 저는 얽매임 없는 자유로움으로 그 보상을 삼고자 합니다.”
"자유로움이라..."
세종은 잠시 침묵했다.
‘이 천재는 한 곳에 묶여있지 않겠구나. 묶여있지 않은 천재가 어찌 쓰임이 있겠는가... 참으로 아까운 인재로다.’
세종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의공주가 쓰임과 자유로움을 모두 품을 수 있을까...'
세종은 손에 잡힐 듯 말듯한 아까운 보석을 탐하듯 소년문사를 바라보다가 서가로 눈을 돌렸다. 문득 서가 뒤편에 빽빽이 꽂힌 이국의 서책이 세종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저것은 무슨 책이냐..”
안맹담은 공손히 대답하였다.
“가문의 시주를 받는 사찰에서, 매년 천축국과 대국으로부터 이런저런 경전을 구하여 바칩니다.”
“호오… 천축국 경전도 읽을 줄 아느냐? 한역된 것이 아니라, 그 원문 말이다.”
“예, 서가에 들여온 경전들은 승려들에게 배워서 익혔나이다.”
세종은 흡족한 마음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두루 정진하라. 귀히 쓰일 날이 있을 것이다.”
세종은 서가를 나오며 다시 한번 천재 문사의 옆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훗날 문자 창제의 대업에 쓰일 든든한 동량이었다. 세종은 이미 훈민정음 창제 십수 년 전부터 이렇듯 하나하나 바둑판처럼 치밀한 대마의 포석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세종은 소년문사의 천재성과 자유로움을 모두 꿰뚫어 보았다. 대왕의 일거수일투족으로 천하가 운행하건만 가끔 천재들이란 대왕의 손이 많이 가야 했다.
'확실한 몇 수를 더 두어야 내 것이 되겠구나...'
세종은 바둑판처럼 촘촘한 행마를 펼쳐보았다.
'곁에 둘 수 없다면 곁으로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