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가 사랑한 선비 3

봄밤의 찻잔에 담은 뜻은

by 회안림

연회가 파하고, 죽산의 밤은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달빛은 처마 끝을 따라 흘렀고, 안망지의 사저에는 먼 길의 피로가 향처럼 스며들었다. 매화 한 송이 떨어진 자리에 이따금 바람이 머물다 갔다. 세종은 사저의 안가에 앉아, 대청마루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갈하게 쓸린 마당 위, 연등의 그림자가 벽을 타고 일렁였다. 그 앞에 정의공주가 조용히 무릎을 접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와 딸, 왕과 공주 사이에는 아무 말 없이 밤공기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침묵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세종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물었다.


“너의 눈길이 자주 머물더구나. 안맹담을 어찌 보았느냐?”


정의공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맑고 단정했다. 감정은 숨긴 채 흔들림이 없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참으로 깊은 문사입니다. 어바마마의 대업에 큰 동량이라 여깁니다.”


세종은 그 말 끝에서 미묘한 숨결을 읽었다. 대업의 동량이라 했지만, 그 속에는 이미 공주의 연심이 살며시 스며 있었다. 세종은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허나... 그는 자유롭다. 그 자유는 때때로 질서를 벗어나기도 하지.”


정의공주는 무슨 말을 하려다 입술을 다물었다. 대왕은 아직 결정하지 않고 있었다. 세종은 낮은 목소리로 고사를 들려주었다.


“옛 춘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정나라 여공이 옹희의 아비를 죽이고자,

그의 사위인 옹규에게 밀지를 내렸다.

옹규는 아내 옹희의 아비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옹희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지.

옹희는 남편과 아버지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단다.”


세종은 선택해야 했단다라는 말에 맞추어 찻잔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 놓았다. 마실 수도 있고, 마시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 그 행위는 곧 공주에게 던지는 무언의 시험이었다.


“정의야. 만일, 네가 옹희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사실을 고하면 지아비는 죽고, 숨기면 아비가 죽는다. 너는 누구를 살리겠느냐?”


정의공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엔 흔들림 없는 평정과, 담백한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차라리, 제가 끌어안고 죽겠습니다.”


말은 낮았으나, 그 안에 스스로를 제물로 삼는 단단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충이 아니었다. 사랑을 품되, 왕실의 명을 흔들지 않는 결의였다. 세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딸의 마음을 읽었고, 그 마음을 대의 안에 담아낼 수 있는 그릇임을 확인했다.


“안맹담은 천재다. 그러나 자유롭다. 쓰임이 있는 천재성과 묶이지 않는 자유로움은 상극이다."


세종은 정의공주를 건네다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대업을 이룰 천재가 필요하구나.”


공주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바마마, 그래서 저인 것이 아닐는지요?"


세종은 웃으며 상에 놓인 찻잔을 비웠다. 그 웃음엔 군주의 판단과 아비의 허락이 동시에 실려 있었다.


"그렇다. 춘추의 고사처럼, 하나를 선택할 수만은 없지. 천재성과 자유로움은 둘이면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제야 정의공주는 깨달았다. 춘추 고사도, 찻잔도, 고요한 질문 하나하나도 자신을 가늠하려는 아버지의 시험이었음을. 칼날 위에 놓인 침묵, 그것이 왕심(王心)이었다.


“너와 안맹담을… 맺어줄까 한다.”


그 말은 군주의 명이면서, 아비로서의 허락이기도 했다. 그 순간, 봄밤의 등불이 잠시 흔들렸다. 정의공주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기쁨으로 빛나는 눈이 이미 모든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죽산의 봄밤 속에서 하나의 연심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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