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혼담
세종과 정의공주가 다녀간 사흘 후였다.
죽산안씨 종가의 사랑채는 늦은 밤까지도 등잔불은 꺼지지 않았다. 사랑채 안은 숨죽인 전장처럼 팽팽했고, 문중의 원로들은 마주 보며 둘러앉아 있었다. 희끗한 수염, 굳게 다문 입술, 주름 사이로 교차하는 시선들. 무릎 위에 포개어진 손은 조심스레 떠는 듯했고, 긴 침묵은 작은 기침 하나에도 균열이 갔다.
오늘 밤, 안맹담 하나를 두고 왕실과 한림학사 집안, 두 집안에서 혼담이 동시에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시’라는 말은 애매했다. 한씨 집안과는 어려서부터 교유해 왔고, 안씨 가문은 오래전부터 그 혼처를 마음속에 굳혀두고 있었다. 허나, 마치 하늘이 시험을 내듯 같은 날 같은 시각, 혼담이 당도한 것이다. 그 불가사의한 우연이 문중 전체를 가로질러 갈라놓았다.
“왕실에서 보낸 혼담입니다.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먼저 입을 연 이는 안문익. 명분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명분이라는 검은 천 아래 감춰진 기대감이 절반 섞여 있었다.
“허나 맹담은 문중의 기재입니다.
왕실과의 혼사는 그의 입신양명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일이오.”
맞서 말한 안문현은 평소 학문에 묻혀 사는 인물이었으나, 이 밤에는 걱정과 우려가 목소리를 타고 솟았다.
“공주의 배필이 되는 일이 어찌 광영이 아니겠소.”
“광영이라니요?
왕실 인척이란 것이 왕통이 바뀌는 순간, 가장 먼저 도려내지는 법입니다.”
“그 입, 조심하시오. 귀는 벽에도 있습니다.”
차가운 목소리들이 방 안을 가르며 교차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울타리였던 이들이 지금은 오직 한 소년문사의 운명을 두고 서로를 밀어붙이는 논객이 되어 있었다. 격론이 이어졌다. 한쪽은 선비로서의 길, 과거와 관직, 벼슬과 이름을 말했고, 다른 한쪽은 왕실과의 혼맥, 그 위상과 안씨의 장래를 말했다. 그러나 누구도 종지부를 찍지 못했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문중의 수장, 안국현이 입을 열기를.
그 곁에 앉아 있는 이는 맹담의 부친 안망지였다. 그는 찻잔을 손에 쥔 채 내내 말이 없었다. 작은 흔들림조차 없는 침묵은, 도리어 가장 절박한 고뇌의 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가장으로서 문중의 명운을 따르자니 아들의 길이 가시밭이 되고, 아비로서 아들의 뜻을 따르자니 문중이 왕실의 뜻을 외면하는 꼴이 된다. 그는 두 손 사이에 놓인 찻잔은 무거운 마음처럼 내내 그대로였다.
그때였다. 사랑채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밤기운이 실내로 스며들며 등불이 흔들렸다. 안맹담이 들어섰다.
그는 문지방에 잠시 멈춰 섰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낮추어 인사하고, 양손을 무릎 위에 단정히 얹은 채 자리에 앉았다. 오늘, 그는 문중의 격론 앞에서 마치 '최후의 진술'을 하러 온 듯 느껴졌다. 그러나 소년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심장소리는 울렸고, 손끝은 싸늘했으나 그의 머릿속은 고요했다. 그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침묵 속에서, 찻잔이 조용히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안국현이었다. 그의 동작 하나에 방 안의 기류가 뚝 끊겼다. 그는 가문의 수장이었고, 동시에 맹담의 스승이었다. 그 두 얼굴을 오늘 같은 밤에 모두 지켜내야 하는 이는 오직 그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의공주는, 대왕께서 가장 아끼시는 분이시다.”
그 말은 칼처럼 곧고 담담했다.
“맹담아, 군왕께서 가장 아끼는 이를 내어주시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맹담은 숨을 들이쉬고 단정히 대답했다.
“이루고자 하시는 대업이 있으실 것입니다.
미천한 제가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군왕이 가장 아끼는 공주로도 붙들지 못하는 인재라면, 그 인재가 어찌 대왕께 쓰임이 있겠는가.”
안맹담이 답변했다.
“이 혼담은 저 한 사람의 쓰임이 아닐 것입니다. 가문 전체의 쓰임을 묻는, 대왕의 질문일 것입니다.”
그 대답에 방 안의 일부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어떤 이는 생각보다 깊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안국현이 다시 물었다.
“너는 이 혼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
정적. 그 말 한마디가 방 안을 굳혔다. 안망지는 눈을 감았다. 오늘만은, 아들의 입을 막지 않기로 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그 아이의 것이다. 맹담은 다시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음성은 낮았으나, 또렷하고 맑았다.
“정의공주는 제게 충성과 의리, 사사로움과 대업이 함께 얽힌 분입니다. 저는 정의공주를 통하여 세상에 드러나겠습니다. 충성과 포부, 그 둘을 모두 이루겠습니다.”
의연한 그의 말이 문중 원로들의 마음에 돌처럼 내려앉았다. 안국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오늘, 제자의 그릇을 보았다. 부서지지 않는 그릇. 넘치지도, 비지지도 않는 그릇. 그는 스승으로서 고개를 끄덕였고, 문중의 수장으로서 결단을 내렸다.
“오늘의 문중 대사는 결론이 나지 않으니
내가 맹담의 스승이자 문중의 수장으로서 결단을 내리겠다.
왕실과의 혼담을 받아들이고, 한씨 가문과의 혼담은 물리겠다.”
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도 다시 말을 잇지 않았다.
그 밤, 죽산안씨는 한 천재의 앞날과 가문 전체의 운명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한 운명의 길은 안맹담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과업으로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