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가 사랑한 선비 5

밤의 곡조

by 회안림

햇볕은 들었으나 바람은 서늘했다.


한선은 앞마당 매화 그늘 아래 놓인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엔 자수를 놓은 손수건이 들려 있었으나, 한 땀도 놓지 못한 채 실만 손가락 사이에서 헛돌았다. 아침 일찍부터 어머니가 전한 한마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왕실에서도 혼담을 넣은 것 같구나.”


말은 조심스레 건넸지만, 그 안에 깃든 맥은 분명했다.


"낭중지추 아니겠는지요?"

한선은 짧게 답했다. 송곳을 주머니에 감추어도 튀어나오는 것 아니겠느냐는 뜻이었다. 그 이후로는 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도, 자수도, 가야금도 오늘은 모두 조용히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무언가를 붙들고 있으면 마음이 잠잠해질 줄 알았으나, 심장은 자꾸만 다른 곳을 향했다. 어머니는 그런 딸의 속을 아는 듯,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계집종 연화는 그 사이 조심스럽게 안씨 문중의 동정을 살폈다. 안씨 집안의 사랑채에서 나온 일꾼 하나를 붙들고 소식을 물었지만, 돌아오는 표정은 밝지 않았다. 연화는 한선의 안색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거짓으로 위로할 힘도 없었다.


해가 저물 무렵, 사랑채 안으로 걸음을 옮긴 이는 한선의 부친이었다.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고, 걸음에는 불편한 심사가 묻어 있었다.


“선아.”


무겁게 부른 이름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안씨 문중은… 왕실의 혼담을 받기로 했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돌처럼 그녀의 마음에 내려앉았다. 한선은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그 안에 깃든 미안함은 숨기지 못했다.


“문중의 명운이 걸린 일이니, 어찌 가볍겠느냐.

맹담도, 문중의 뜻을 거스르진 못했을 게다.”


말끝이 흐르자, 한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하겠지요. 문중의 명운이 걸려있거늘,

다만… 더 일찍 매듭짓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듯합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리고 단정히 몸을 일으켜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담담한 얼굴이었으나 말끝은 떨렸다.


“아버님께 청하옵니다. 다음 혼처를 구하실 적엔,

글재주는 좀 모자라더라도 기개있는 집안을 알아봐 주십시오.”


부친은 그 말에 잠시 숨을 고르고, 짧게 대답했다. 딸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러마.”


그 말에 한선은 마음을 들킬까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눈가엔 말하지 못한 말들이 조용히 매듭처럼 맺혀 있었다. 그녀는 멍든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자리를 떴다. 떨어지는 매화를 보며 그녀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공주가 말한 질서란, 그 안에 속하는 이로서는 참으로 서글프구나.

그래도… 그 질서 속에서 기개있는 이가 있다면, 족하리라.’


그리고, 못내 안맹담이 야속하였다. 문중이 결정했을 터이나, 그가 한마디 이렇다 할 뜻을 전한 적도 없어

마음이 더 아렸다. 그녀는 마음 깊이 질투심과 원망이 스몄음을 부정하지 못했다. 이제 그것은, 한선 자신의 내면에 한이 되어 맺히고 있었다.


그 밤, 하늘은 마른 듯 어두운데 달 빛은 유난히 밝았다. 한선은 혼례가 물처럼 흘러가버린 자리를 차분히 비워내듯 가야금을 곁에 앉혀 놓았다. 매화 그림자가 가야금 위에 들었고, 달빛이 현을 따라 흘렀다. 그리고 그녀의 손끝에서 마음을 아리는 곡조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한선의 손끝은 단 한 번도 떨리지 않았으나, 울림 속엔 눅눅한 정과 한이 얽혀 있었다. 울지 않되, 듣는 이의 심장을 울리는 연주였다.


그 소리는 안씨 고택을 가로질러 조용히 퍼졌다. 저택 몇 개를 가로질러 작은 정자에 머무르던 안맹담의 귀에도 닿았다. 음률에 뛰어난 그는 연주하는 곡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시경의 백주를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저기 떠 있는 잣나무 배, 강물 위에 떠 있네.

그대를 생각하면 머리 아픔도 달게 감수하리.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배, 이젠 강둑 멀리까지 떠났다.

그리움은 애달프고, 속은 시리다.

내 마음의 걱정은 씻기지 않은 옷처럼 남아,

날이 바뀌어도 잊히지 않고, 한밤을 지나도 여전하구나.'


그것은 이별을 고하는 노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닿은 질문 없는 탄식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듣고 있다가,

그는 조용히 거문고를 꺼내 무릎 위에 올렸다. 현을 고르며 눈을 감았고, 한숨 대신 첫 음을 눌렀다. 거문고의 음은 가야금보다 낮았고, 더 묵직했다. 그 음은 분명히 대답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화답이 아닌, 충의의 결단이었다. 그가 연주한 것은 『시경』 비풍이었다.


'거센 바람이 이는 것도 아니요,

수레가 덜컹이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간다. 스스로의 도리를 지키며,

날개를 단 독수리처럼 일어난다.

머무를 틈조차 없어,

편히 숨을 고를 새도 없구나.

그리운 이, 거기 있는데도,

나는 고요한 옛 자리에 머무를 수 없도다.'


그렇게 한밤의 고요 속, 한선의 가야금과 안맹담의 거문고는 말 없는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고, 그 밤,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이별을 고했다. 음률은 멎었지만, 서로의 마음은 말없이 마주 앉은 것처럼 한밤의 정적 속에서 오래도록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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