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관보국 청사에는 희뿌연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 회의실의 등불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로, 반쯤 덜 켜진 불빛 아래 관원들은 묵묵히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출입문이 두어 차례 난폭하게 뒤틀리더니, 날크로운 경첩음과 함께 벌컥—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먼저 밀고 들어왔다.
정안조가 푸른 관포 차림으로 홀로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띠는 단정했으나 팽팽했고, 눈빛은 검은 물처럼 침잠해 있었다. 예고도 없고 보좌도 없었다. 다만 공기의 긴장감만이 그의 존재를 따라 방 안을 뒤덮었다.
“누구냐.”
정안조는 입술만 움직이며 물었다.
“누가 유달산의 지명을 바꾸었느냐.”
목소리는 낮았지만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방 한쪽에 모여 있던 서기 셋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예, 어… 그 정무 건은 전임 서기관 결재로—” 젊은 서기가 말을 꺼내자마자,
“그 서기관은 어디 있지?”
정안조의 말이 말을 꺾었다.
“그다음 날에 퇴임하셨습니다, 대감.”
중년 관원이 조심스레 답했다.
정안조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은 바닥을 누르듯 무거웠고, 방안의 침묵은 그가 걸을 때마다 삐걱이는 나무 바닥 소리에 의해 한층 더 깊어졌다.
“한자가 바뀌었다지.”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지도와 문서들을 슬쩍 훑으며 말했다.
“네,유달산이, 유교의 ‘유(儒)’로 한자만 바뀌었습니다.”
관원들은 말을 아꼈으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전임 서기관이 한 일이라…”
"딱히 지역에서도 이의가 없었습니다."
정안조는 작게 혀를 찼다.
“어떻게 생긴 놈이더냐?”
그 말에는 분노와 의문이 뒤섞여 있었다.
"젊은 문사였습니다."
관원은 또 다른 불똥이 튈까 봐 젊은 여성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 자가 신청한 그 지명 변경 건에 증명이 있느냐?”
"예, 예,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질문을 받은 관원 하나가 재빠르게 서고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몇 장의 서류철을 뒤적이다가, 관할 향교의 인장이 찍힌 신청서와 함께 보관된 패찰을 하나를 꺼내왔다. 바로 향찰령이었다.
정안조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의 손끝이 패찰에 매달린 장식술에 따라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압수한다.”
그는 향찰령을 조심스럽게 옷 안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든 채 덧붙였다.
“앞으로 지명 하나 바꿀 때에도, 내 허락을 받도록 해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등을 돌렸다. 문을 향해 걸어가며, 문득 외투 자락이 바람을 일으켰다. 찬 기류가 따라 움직였고, 그가 문밖으로 사라지자 회의실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정안조가 떠난 뒤, 관원들은 마치 주문이 풀린 사람들처럼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 한 명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다른 이는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떨어뜨렸다.
“살았군…” ,
중년 관원이 낮게 중얼였다.
“방금, 우리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젊은 사무관이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지명에 한자 하나 바뀌었다고 대감이 저리 진노하시다니…”
중년 관원이 고개를 젓고는, 창밖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허, 참…”
그 순간, 천장의 조명이 한 번 깜빡였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서류철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재빨리 그것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멀어지는 발소리만이 회의실의 끝자락에서 잔잔히 울렸다.
그날 저녁, 정안조의 사저에는 바람조차 드나들지 못했다.
불빛은 안에서밖에 퍼지지 않았고, 그조차도 제 그림자에 가로막혀 있었다.
밀실 안쪽, 작은 좌대 앞에 향찰령이 내려졌다.
그 곁엔 열세 명의 인물이 둘러앉았다.
그들은 고개를 숙였고, 침묵은 천장 끝까지 맺혀 있었다.
정안조는 손끝으로 향찰령의 표면을 쓸었다.
“이 자는… 아직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말에, 회색 복색을 입은 술사 하나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일렁이는 선이 실오라기처럼 번져나갔고,
향찰령의 틈에서 무언가가 깨어났다.
“잔류사념이 강하군요.”
그는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이 사념은… 오래지 않으나 깊습니다.
저희가 이끌어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다만…”
말끝을 흐린 이의 뺨에 작은 긴장이 떠올랐다.
다른 이가 조용히 이마를 향찰령에 댔다.
“…이 자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젊은 처자의 숨이지만, 기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말에 정안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호히 말했다.
“그 자의 숨통을 끊어라.”
그 말에 밀실 안 기류는 낮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열세 명이 향찰령을 가운데 두고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손바닥 아래, 땅이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잔류사념의 문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