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타라 전기(鍮達 傳奇) #11 새로운 빛

by 회안림




보름 후, 내각 산하 법제국 청사 앞에 문사복을 입은 이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관보과 청사는 중정형으로 설계된 벽돌조 건물이었다.

외벽은 붉은 벽돌 사이로 이끼가 얇게 껴 있었고,

본관 1층 유리창 너머로는 낡은 서류 더미와 벽난로 곁 응접탁자의 고서들이 적막히 누워 있었다.

회색 석조 복도의 벽면에는 국한문 혼용 관보들이 걸려 있었고,

천장은 아치형으로 뻗어 있었다.

출입문을 밀자 묵직한 경첩음이 실내를 깨웠다.

타자기 소리만이 가볍게 공간을 두드렸다.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관보 서기들이 검지로 철자를 치고 있었다.

이따금 외부인이 오긴 했지만,

문사복을 입은 젊은 여성의 방문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유건 위에는 은실로 수놓은 유(儒) 자가 은은히 빛났다.

그 순간, 사무실의 시선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현옥은 침착하게 창구로 다가갔고,

젊은 서기 하나가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달산의 한자를 유교의 ‘유(儒)’로 바꾸고자 합니다.

오늘 관보에 그 공고를 요청드립니다.”

서기는 어안이 벙벙했다. 속으로 투덜거렸다.
‘개화기 한복판에 세상물정 모르는 선비라니…’

그리고 곧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지명을 바꾼다고요?

유생이신 듯한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절차가 따로 있습니까?”

“예. 행정절차라는 게 있습니다.”

현옥은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행정절차에 황제의 어지도 포함됩니까?”

서기는 그제야 움찔했다.
“황제의… 어지 말씀이십니까?”

“선황의 어지입니다.”

“선황이시라고요?”

현옥은 고개를 끄덕이고, 흑단목으로 된 향찰령패를 내밀었다.

서기의 손에 들어온 패는 붉은 고문자 속에 금색 먹빛이 잔잔히 스며 있었다.

이내 다른 서기들이 모여들어 향찰령패를 살폈다.

"선황의 어지가 유효한 거요?"

그들은 향찰령패를 앞에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들의 말이 길어질 무렵, 편집실 끝 고풍스러운 아치문이 천천히 열렸다.

묵직한 목소리가 그들을 멈추게 했다.

“왜 이리 소란스러운 게냐?”

문을 밀고 나온 이는 법제국 관보과의 서기관 의직이었다.

그는 은퇴를 하루 앞두고, 마지막으로 사무실 정리를 하러 들른 참이었다.

오래도록 문서 속에서 살던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고문자의 잔향이 그의 눈빛에서 묻어났다.

젊은 서기는 그에게 향찰령패를 내밀며 말했다.

“어떤 유생분께서 선황의 어지라고 주장하시는데, 어찌해야 할지.....”

심의직은 패를 들자 멈칫했다.
“누구신가?”

서기들이 옆으로 비키자, 문사복을 입은 현옥이 조용히 걸어 나왔다.

"이 패에 대해서 아십니까?”

심의직은 패를 받아 든 채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감추지 못했다.
“따라오시오.”

서기관실의 오래된 소나무 책상 앞에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심의직이 입을 열었다.
“이건… 환구단 봉선 제례 당시의 칙령패입니다.

조선 팔도, 산천과 고을의 이름을 바꿀 수 있도록,

선황께서 친히 내린 밀명이었지요.”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내가 밀명을 전했고 변경한 고을이며 산천의 이름을 관보에 실었소."

"실린 이름이 얼마나 되는지요?"

"대략 천 개 정도 실렸던가..."

"나라 이름을 바꾸느라 팔도 산천의 신들을 바꾸었군요."

“봉선 제례 당시엔 더 어마어마한 주술전쟁이 있었소.

황제의 봉선 의식은 본래 중국 황제의 전유물.

청나라 법사들이 그걸 두고 집요하게 공격해 왔지.

조선의 심종사 백여 명이 열 배나 되는 그들을 막아낸 끝에,

의식은 완수되었소.”

둘 다 그 대가로 치른 희생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현옥은 묵직한 진실을 마주한 듯 눈을 감았다.

"향찰령패 백 개를 내보냈고, 단 하나만이 회수되지 않았소.

지금 이것이, 마지막이 될 테지...”

잠시 침묵이 스쳤다.

심의직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기관들을 불러 모았다.

오래된 책장을 열고 선황의 칙령 원문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서기들에게 보여준 뒤, 조용히 지시했다.

“오늘 자 관보에 반드시 싣게. 유달산의 한자 개명 요청 말이야.”


젊은 서기가 머뭇거렸다.
"지역 유림들의 개명 요청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 현옥이 품에서 도유사의 향교 인장을 꺼내 놓았다.

관보 서기는 인장을 조심스레 들고 빛에 비춰보았다.
“관할 도유사의 인장이라…

그럭 저럭 절차도 명분도 있긴한데... 좀...”

심의직은 주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말했다.
“곧 관보도, 향교도 왜놈들 통감부로 넘어가겠지만…

지금 여기에는 향교의 인장이 있고,

선황의 어지가 있고,

대한제국의 관보가 있다.

어떠한가?”

관보 서기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참 서기들이 젊은 관보서기의 등을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발음도 같은데 당분간은 바뀐 줄도 모를걸세..."


"나라이름도 바뀔 마당에 산 이름 하나 아닌가."


젊은 서기는 뒷목을 긁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갔다.


심의직은 향찰령을 내밀며 말했다.

“심종의 후예가 아직 남아 있다니…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지는구려.”

그러자 현옥은 향찰령을 다시 돌려 주었다.
“이제 심종은 필요치 않을 겁니다.”

심의직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현옥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개화기입니다.

모든 이가 밝아지는 그 흐름이 바로 심종입니다.”

심의직은 잠시 말을 잊고, 창밖을 바라보다 말했다.

“그래도 말이야… 그들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너무 쓸쓸하지 않겠는가?”

현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의직은 현옥을 무언의 눈빛으로 배웅했다.

그녀는 관보과를 나서며 둘러보다 많은 것을 느꼈다.

‘앞으로 심종의 제례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중얼댔다.

‘대신 모든 사람의 책상 위에 제단이 놓이고,

잉크 한 방울이 피를 대신할 것이고

저 신식 타자기가 문자의 제례를 대신할 것이다.’

그녀의 눈동자에 창 밖으로 스며드는 맑고 밝은 빛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아치형 창 너머에는

빛줄기가 구름 사이로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