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개화기 건축 양식과 행정·관청 제도 연구
근대 개화기 건축 양식과 행정·관청 제도 연구
근대 및 개화기 건축물 양식의 특징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개화기에는 전통 한옥양식과 서양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건축 양식이 나타났습니다. 개항 이후 조선에 서양인 거주가 허용되면서, 먼저 외국 공사관과 선교시설 등 본격적인 서양식 건축물이 한성에 들어섰습니다. 예컨대 **러시아 공사관(1895)**은 신고전주의 양식, **프랑스 공사관(1897)**은 5층탑과 경사진 지붕이 특징인 건물로서 모두 본국 기술자들이 지은 것이었습니다. 한국인이 사용한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는 1898년 완공된 명동성당이 손꼽히는데, 프랑스인 코스트 신부가 설계한 이 성당은 뾰족 아치, 교차 볼트 천장 등 고딕 양식을 도입하였고 한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이후 대한제국 시기에는 궁궐에도 서양식 건물이 건립되어,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 준공된 3층 석조궁전으로서 이오니아식 기둥을 갖춘 신고전주의 양식의 웅장한 건축물이었습니다.
명동성당(1898년 준공)은 개화기 한성에 세워진 대표적인 서양 고딕 양식 건축물로, 벽돌조 구조와 뾰족한 첨탑·아치 창 등이 특징이다.
이러한 서양식 건축 도입과 함께 한식 전통요소와 서양양식의 절충도 나타났습니다. 고종은 궁궐 내에 서양식 연회공간인 **정관헌(靜觀軒, 1900년경)**을 건립하였는데, 이 건물은 벽돌조 외벽과 로마네스크 양식 기둥, 그리고 그 위에 한옥 팔작지붕을 얹은 구조로, 베란다 난간 등에 박쥐·소나무 등 전통 문양을 새겨 장식하는 등 동서양 양식이 절충된 모습이었습니다. 석조전 또한 외관은 고전주의 서양 궁전 형태이지만 박공부에 오얏꽃(이화) 등 조선 왕실 상징 문양을 조각하고 발코니를 두르는 등 일부 전통요소를 가미한 절충형 양식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이 시기 한성에는 **독립문(1897)**처럼 서양식 개선문 형태의 기념물도 세워졌고, 개신교 교회당, 학교, 병원 등 각종 용도의 근대건축물이 속속 들어섰습니다. 요컨대 근대기 한국 건축은 전통 한옥의 공간미를 유지하면서도 벽돌, 석재, 유리 등 새로운 재료와 고딕·르네상스풍의 외관을 수용한 다채로운 양식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건축 사례를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명동성당 (1898) – 고딕 Revival 양식의 벽돌조 성당 건축. 한성 최초의 대형 서양식 건물로, 첨두형 아치 창과 클레어스토리 창 등 고딕 요소를 도입함.
정관헌 (1900) – 전통 한옥 지붕과 서양식 석조 기둥이 결합된 절충식 정자 건물. 궁궐 내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로, 내부는 벽돌조 벽과 목재 기둥에 서양식 가구를 들여 연회 장소로 사용.
덕수궁 석조전 (1910) – 르네상스 양식의 3층 석조건물(궁전). 대한제국 황실의 근대식 전각으로 건립되었으며, 그리스식 기둥과 한국 왕실 문양 장식을 함께 갖춤.
이처럼 근대 개화기의 건축물들은 한옥과 양옥의 융합이라는 특징 아래, 용도에 따라 순수 서양식에서부터 절충식에 이르는 스펙트럼을 보였습니다. 황실과 관청 건물은 비교적 서양 고전주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났고, 민간 주택의 경우 개량한옥 형태로 점진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예를 들어 개화기에 도입된 개량주택은 전통 한옥 구조에 유리창, 베란다 등 새로운 생활 요소를 추가하여 한옥의 평면에 서양·일본식 요소를 접목한 과도기적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혼합양식 건축의 유산은 이후 일제강점기 초기의 관공서 건물, 교육·문화시설 건축 등으로 이어지며 한국 근대건축의 토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창문과 출입문 양식 및 구성 특징
**창호(窓戶)**는 전통 한옥과 서양식 건축의 차이가 특히 두드러진 부분입니다. 조선 후기까지 한옥의 창문은 나무틀에 살을 대고 한지를 바른 격자문(창호지 창)이 일반적이었고, 문도 미닫이문 형식이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개화기 서양 건축이 들어오면서 **유리창(window)**과 **여닫이문(hinged door)**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 외국 공사관 건축에 처음 사용된 유리창은 1880년대 후반~1890년대에 이르러 한성의 성당, 학교, 병원 등 양관(洋館)에 활용되었고, 점차 궁궐과 관청 건물에도 퍼져나갔습니다.
전통 창호는 빛을 은은하게 거르는 한지창으로 공간 구획과 완충 역할을 했지만, 유리창의 도입으로 실내 채광과 외부 경관 조망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예컨대 명동성당의 경우 뾰족아치 창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장미창 등을 설치하여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는데, 이는 이전까지 한옥에 없던 새로운 미감이었습니다. 또한 고종이 사용한 정관헌에는 당시 수입된 유리 식기와 함께 창문에 유리를 끼운 서양식 창호가 설치되어 내부를 밝히고 외부를 전망할 수 있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개화기 이후 지어진 개량한옥이나 관청 건물에서는 전통 목재문살 대신 유리창을 끼운 문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주택의 사랑채나 툇마루 공간에는 큰 여닫이 창문을 달아 실내를 밝히고 외부와 바로 통하도록 한 예가 많았습니다. 전주 한옥마을 학인당 등 개량한옥 사례를 보면 건물 외벽 둘레에 유리창이 붙은 여닫이문을 설치하여 전통 대청마루를 일종의 실내 공간처럼 활용하고, 방과 복도를 연결하는 구조를 갖추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한옥에 서양식 베란다와 복도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전통 주택의 개방성을 유지하면서도 외부 풍경 감상과 실내 채광을 극대화하려는 변화였습니다.
출입문의 재료와 형식도 변화하였는데, 전통 목재 문틀에 종이창이나 판문을 달던 방식에서 벗어나 유리 끼운 나무문이나 때로는 철재 문틀도 나타났습니다. 문을 여닫는 방식은 미닫이(슬라이딩)에서 여닫이(힌지 부착)로 바뀌면서 문의 크기와 위치 선정에 새로운 규격이 도입되었습니다. 서양식 건물은 정면 중앙에 대형 양쪽 열리는 현관문을 두고 양옆으로 대칭 창문을 배열하는 등 입면 구성의 좌우대칭성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전통건축의 비대칭적 배치와 대비됩니다. 다만 대한제국 시기 지어진 절충식 건물들은 전통 가옥의 구성을 따라 마루 툇간에 다다미식 방이나 응접실을 두고, 그 전면에만 유리창과 문을 설치하여 내부 기능에 맞게 절충했습니다.
정리하면, 근대기 창문·출입문의 특징은 재료의 혁신과 기능적 변용으로 요약됩니다. 한지 → 유리로, 미닫이 → 여닫이로 바뀌면서 건물의 채광, 환기, 개방성이 크게 증대되었고, 창문 자체도 반원형 아치창, 색유리창, 고창(高窓) 등 장식적 요소를 갖춘 양식이 도입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 건축 미감에도 영향을 주어, 이후 한옥에도 부분적으로 유리창과 경첩문을 설치하는 등 혼용 양식의 창호가 정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관청 건물의 구조적 특징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기까지 관청 건물은 전통 관아 건축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인 공간구성과 구조 변화를 모색했습니다. 조선시대 관아는 대개 외행랑을 두른 뜰 안에 중심 건물(아사: 衙舍)을 배치하고 그 주변에 부속 건물을 배치하는 중정형(中庭型) 배치를 따랐습니다. 예를 들어 육조 거리의 각 조판서청은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정청(正廳), 그리고 좌우측에 협방(協房)들이 있는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일층 목조건물 위주의 평면 구성은 개화기에도 기본 뼈대는 유지되었으나, 점차 행정 업무의 다양화에 대응하여 건물의 수와 기능 구획이 늘어났습니다.
갑오개혁(1894) 이후 신설된 관청들은 필요에 따라 전통 한옥형과 신식 벽돌형 건물을 병용하였습니다. 예컨대 재정 업무를 맡은 탁지아문(뒤에 탁지부)은 종전의 호조 건물을 계승하면서, 금고 보관 등을 위해 벽돌조 금고 건물을 따로 세우는 등 구조 보강을 하였습니다. 한성부의 경찰 업무를 총괄한 **경무청(警務廳)**의 경우 기존 좌우포도청 건물을 통합하여 사용하면서, 정문과 청사를 개수하여 보다 넓은 집무 공간을 확보하였습니다. 또한 각 부서는 아래에 **국(局)**이나 **과(課)**를 설치하면서, 한 관청 내에서도 여러 동(棟)의 건물이 기능별로 분화되는 경향이 뚜렷해졌습니다. 관청 청사 내부에는 대청마루 공간 외에 응접실·회의실 등 새로운 공간이 등장하였고, 전등·전화·난방과 같은 근대적 설비도 1900년대 이후 점차 도입되었습니다. 황실 업무를 맡은 궁내부 건물 등에는 유럽식 벽난로가 설치된 응접실, 서양식 가구를 들인 집무실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관청 건물 배치는 전통적인 **문-청사-뒤편 부속고(庫)**의 직렬 배치에서 벗어나, 횡적으로 여러 동이 배치된 집합청사 형태로 변모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 지어진 탁지부 청사를 사례로 들면, 본청 건물 이외에 서쪽·남쪽으로 창고용 건물과 관리 숙소 등이 ㄷ자 또는 ㄹ자 형태로 배치되어 하나의 관청 단지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는 근대 행정 기능 확장에 따른 필연적인 변화로, 재정고(財政庫)·문서고와 회계실, 토지대장실 등 세분화된 부서별 건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건물 간 이동과 업무 효율을 위해 복도로 연결하거나 별도의 정문·측문을 추가하는 등 동선 계획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한편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총독부 산하 기관들이 기존 대한제국 관청 건물을 인수하거나 새로운 서양식 청사를 건축하면서 구조적 변화가 가속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옛 궁궐 전각이나 관청 건물을 일시 청사로 쓰다가, 차츰 목조+석조 혼합 구조의 2~3층 관공서 건물을 신축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통감부(統監府) 설치 후에는 경무청 등의 기능을 개편하여 경시청(警視廳) 건물을 신축·사용하였고, 1910년 전후로는 각 도의 도청 청사에 서양식 설계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질문 범위인 근대 개화기에는 주로 한옥형 관아에 부분적으로 서양식 재료를 사용하는 단계였으며, 완전히 서양식 구조(철근콘크리트 등)는 일제강점기 1920년대 이후에야 본격화되었습니다.
요약하면, 근대기 관청 건물은 전통 관아 배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용도에 따른 동 분리·확장, 벽돌·유리 등 신재료 사용, 대청 외 별도의 사무공간 도입 등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행정기능의 전문화에 대응한 것으로, 공간 구성 면에서 전통과 근대가 병존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당시 관청 청사는 외견상 기와지붕과 처마선을 유지하면서도 내부에는 사무실 겸 응접실이 자리잡고, 구석에는 금고와 기록보관소가 설치되는 등, 과도기의 독특한 구조적 면모를 띠고 있었습니다.
관보(官報) 담당 기관 및 발행 체계
**관보(官報)**는 국가의 법령과 공식 고시를 게재한 정부 발행 정기간행물로, 근대식 관보 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기에 처음 도입되었습니다. 김홍집 내각 주도로 1894년 8월경 창간된 《관보》는 초기에는 순한문으로 인쇄되다 이듬해부터 국한문 혼용으로 바뀌었으며, 국가의 개혁 법령과 공문을 널리 알리는 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관보 발행을 전담한 부서는 *관보과(官報課)*로 설치되었고, 발행 체계는 시대에 따라 소속이 변천했습니다. 1894년 관보 창간 당시 관보과는 내각 기록국 소속으로 출발하였고, 이후 의정부 총무국, 참서관실, 법제국 등으로 이관되다가 다시 내각 법제국 산하로 옮겨가는 등 조직 개편을 겪었습니다. 이는 갑오개혁~대한제국 기간 중앙 행정기구 변화에 따른 것이며, 관보과 자체는 관보 인쇄·배포의 실무를 꾸준히 담당했습니다.
1895년 7월 17일에는 최초의 관보 발행 관련 규정이 제정되어 관보 간기의 주기, 게재 범위 등을 정하였으며, 1907년 12월 11일에는 이를 종합한 〈관보편제〉 칙령이 공포되어 관보 발행의 제도적 기반이 확립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의 《관보》는 호수(號數)를 명기한 1896년 이후부터 1910년까지 총 4,768호가 발행되었는데, 1910년 8월 29일자 관보를 마지막으로 대한제국 관보는 종간하게 됩니다.
한편 일제의 통감부는 별도로 1907년 1월부터 자체 기관지인 《공보(公報)》를 발행하였습니다. 이는 대한제국 정부의 관보와는 별개로 통감부령·명령 등을 게재한 것으로, 1910년 8월 27일 제167호까지 나오다가 한일병합과 함께 **《조선총독부 관보》**로 통합되었습니다. 즉, 1910년 8월 29일부로 대한제국 관보는 조선총독부 관보로 대체되어 이후 일제 패망 시까지 발간된 것입니다.
요약하면, 개화기 관보는 관보과에서 편집·인쇄하여 정부 각 부처의 법령, 칙령, 공고를 망라하여 싣는 공식 발표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초기에는 발행 주기가 불규칙하였으나 점차 매일 발행의 형태를 갖추었고, 정기 호외 등을 통해 시급한 명령을 공표하였습니다. 관보과의 소속 변화(내각 → 의정부 등)는 있었으나 기능은 일관되게 유지되었으며, 조선총독부 관보로 계승됨으로써 이후에도 한국의 관보 전통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관청의 직제 및 직책명 변화 (시기별 주요 부서와 관직 체계)
근대기에는 국가 통치기구와 관직 체계가 여러 차례 개편되었습니다.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초기까지의 주요 부서와 직책 체계 변천을 시기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894년 1차 갑오개혁: 종래의 의정부 3정승 및 육조(吏·戶·禮·兵·刑·工)의 판서 체제를 폐지하고, 의정부 아래에 **8아문(衙門)**을 신설하였습니다. 8아문의 명칭과 소관은 내무아문 (행정·호구), 외무아문 (외교), 탁지아문 (재정), 법무아문 (사법), 학무아문 (교육), 공무아문 (공공사업), 군무아문 (군사), 농상아문 (농업·상공)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각 아문의 장관은 **대신(大臣)**으로 임명되었고, 차관급에 해당하는 협판(協辦) 1명, 그리고 참의(參議)나 국장 등의 보좌 관직을 두었습니다. 1894년 8월에는 관리 등급제도도 개혁하여 18품계 → 12등급으로 축소하고,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판임관(判任官) 3개 계층으로 구분하는 현대적 관등 체계를 도입하였습니다. 또한 총리대신 1인을 두어 의정부 수반으로 삼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해 개혁 입법을 추진하였습니다. (김홍집이 초대 총리대신 겸 군국기무처 총재를 역임.)
1895년 을미개혁: 8아문 체제가 2차 개편되어 내각 중심의 7부(部)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즉, 공무아문과 농상아문을 통합하여 **농상공부(農商工部)**로 개편하고 나머지 내무·외무·탁지·법무·학무·군무 아문을 각각 내부, 외부, 탁지부, 법부, 학부, 군부로 개칭하였습니다. 이로써 의정부를 대신하여 내각이 설치되었으며, 내각총리대신이 수상 역할을 담당하고 각 부의 대신들이 내각을 구성하여 합의제로 국가 정책을 심의·의결하였습니다. 궁내부는 이와 별도로 황실 사무를 관장하되 규모가 축소되었습니다. 이 시기 관직명도 정비되어, 각 부의 최고 책임자는 ○○대신(예: 내부대신)으로 불렸고 차관은 협판으로 계속 불렸습니다. 또한 각 부 아래에 **국(局)**을 두고 국장 등 직책을 신설하였으며, 지방행정 구역도 8도 → 23부 → 다시 13도(1896년)로 개편됨에 따라 지방관 직함도 관찰사 → 부윤/도사/도장관 등으로 변경되었습니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고종이 황제로 즉위(광무 원년)하면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였으나, 중앙정부 조직은 기본적으로 내각과 7부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황제가 절대군주로서 칙령으로 모든 국정을 최종 재가하였고, 내각총리대신 및 각부 대신들은 그대로 행정 실무를 담당했습니다. 다만 황실 관련 기구가 강화되어 궁내부 산하에 내장원, 시위대 등 황실 재정·군사 조직이 늘어났고,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여 황제가 대원수로서 군 통수권을 직접 행사하는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광무개혁기(1899~1904)에는 법제 정비를 위해 법규교정소를 두고 각종 법령을 제정·공포했으며, 관료 임용제도로는 과거 대신 탁지부 내 전고국을 통한 관리 임용과 신교육 출신 인재 등용이 이루어졌습니다. 관직명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정승, 판서 등의 용어가 사라지고 대신, 협판, 참의 등이 정착되었습니다. 예컨대 박정양, 이완용 등이 내무대신을 역임했고, 각 부에 참의(차관보급)와 국장들이 배치되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함에 따라, 정부 조직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우선 대한제국 **외부(外部)**가 폐지되어 통감부가 외교를 담당했고, 통감부 산하에 한국측 내각을 통제하는 고문정치가 실시되었습니다. 이어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체결로 대한제국 내정에 대한 일본의 간섭이 확대되면서, 대한제국의 행정 각부도 기능 축소를 겪었습니다. 예를 들어 **경무청(내부 산하 경찰)**이 해체되고 일본인 경무총감이 지휘하는 경시청 체제로 개편되었으며, 재판소와 감옥 행정도 일본인 감독하에 놓여 **법부(法部)**의 기능이 정지되었습니다. 1907년 7월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즉위하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중심으로 친일 내각이 조직되었고, 이때 의정부라는 명칭이 부활되어 내각총리대신이 의정대신으로도 불렸습니다. 그러나 실권은 통감에게 있었고, 1909년 6월 대한제국 군대 해산과 더불어 행정 각부도 거의 형해화되었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 및 일제강점기 초기: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되어 통치권이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었습니다. 총독부는 총독을 최고권력자로 하고, 그 아래 1관방(관측기능)과 5부(총무·내무·재무[탁지]·사법·군무→후에 철도 등 추가)로 중앙행정조직을 정비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의 내각 및 각부는 폐지되고 조선총독부 산하로 흡수되었습니다. 예컨대 내부 기능은 총독부 내무부로, 탁지부는 재무부로 개편되는 식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초기에는 통감부 조직을 모태로 삼았기 때문에 총독부의 총무부 산하에 법제과·서무과 등이 설치되고, 경무부(경찰)도 두어 식민통치에 필요한 행정체계를 갖추었습니다. 한편 대한제국의 마지막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은 합병 조약 체결 직후 자택 칩거에 들어가 사실상 조선인 관료조직은 해체되었고, 일부 인사들만 총독부 고문 등으로 임명되었습니다.
以上을 정리하면, 근대 개화기 관제(官制)의 변화는 곧 전근대적 통치구조에서 근대적 행정체계로의 전환 과정이었습니다. 의정부 → 내각, 육조 → 8아문/7부로의 개편을 통해 근대적 부서(system) 개념과 장관(대신) 제도가 도입되었고, 칙임관·주임관 등 관등제를 통해 공직 계층이 정비되었습니다. 관청의 명칭도 한문식 전통명에서 ○○부/국/과 등의 근대식으로 바뀌었으며, 관직명 역시 총리대신, ○○대신, 협판, 국장, 과장 등으로 변화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직제 용어의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비록 일제 강점으로 자주적인 발전이 중단되었지만, 개화기 동안 이루어진 행정조직 개편과 관직 체계의 근대화는 이후 대한민국 관료제도의 모태가 되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료 출처: 관보 및 관제 관련 당시 관보 기록, 『황성신문』 등 언론 기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조선왕조실록 사전』 등 학술 자료 및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등을 참조하였습니다. 각 항목 내용은 1차 사료와 연구 문헌에 기반하여 서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