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조는 자신의 사저 침상 위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방 안은 기묘할 만큼 정적이었고, 창문 밖으로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숨결은 점점 거칠어졌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꿈속이었다. 그는 칠흑의 연기로 가득한 계곡을 걷고 있었다.
하늘은 없었고, 땅도 없었으며, 그저 허공에 매달린 채 발을 딛는 듯한 감각만이 반복되었다.
저 멀리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그것이 사당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제단은 허물어져 있었고,
위패는 부서진 나무 조각처럼 흩어져 있었다.
비석은 없었다. 이름도 없었다.
그 한복판에 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그림자가 둘러서 있었다.
수백, 수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 관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다가가 관 뚜껑을 들춰보았다.
그 안에, 자신이 누워 있었다. 팔과 다리는 이미 묶여 있었고,
그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 그의 유골을 끄집어내어 칼로 내리쳤다.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그의 뼈를 토막 내고 있었다.
정안조는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그의 가슴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부관참시라니... 당치도 않은 일.”
그는 중얼거렸다.
그날 이후 정안조는 집요하게 유림의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3년 후, 성균관과 향교를 폐지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다.
유림 경학원 잡지의 편집장이 되어 유림의 정신을 통제했고,
경학원의 수장인 법정이 되어 죽을 때까지 유림을 지배했다.
그는 스스로를 시대의 대제학이라 칭하며,
총독부의 이름 아래 유교의 껍데기를 보전하였다.
1937년 정안조는 자신의 무덤에 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부관참시당하는 환시는 필경 평생 그를 쫓아다녔으리라.
그는 역사의 기억에서 잊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란 밝고 밝은 명명덕(明明德)의 바라봄에 의해 기억되는 것.
2002년, 정안조의 이름은 국회 친일명단 문서 위에 올라갔다.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9년.
국가기관이 발표한 친일 반민족행위자 705인의 명단 중,
그는 '친일유림거두'로 그 첫 장을 장식했다.
시간에 묻혀 관 속에 들어가 있던 그의 이름은
70여 년 만에 기억의 관 밖으로 꺼내져,
문자의 제단 위에서 부관참시되었다.
모든 사람이 밝고 밝아진 문자제례의 제단 위에,
그의 행적은 마침내 부관참시된 것이다.
심종사가 굳이 없는 정명의 제례,
그것은 마지막 심종사 현옥이 꿰뚫어 본 시대의 큰 흐름이었던 것이다.
유달산(儒達山)에 유(儒)라는 단 한 글자를 남긴 것으로
어쩌면 현옥은 스승의 유지를 받든 것인지도 모른다.
심종의 숨결을 이어지게 하라.
심종이 너와 함께 흐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