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의 시간
20살이 되면서 나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해야 하는 걸 해야 했다면 이제는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다.
늘 통제받던 삶에서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자주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게 나에게는 가장 큰 행복이었다.
내가 하루의 시간표를 짤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7시 50분까지 학교에 등교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던가.
1분이라도 늦으면 생활기록부에 오점이 남겨질까 봐 초조함을 달고 살았다.
지하철역에서 학교까지는 뛰어서 10분. 아침마다 시작되는 레이스의 주자가 된 나는 지쳤었다.
대학교에서는 내가 시간표를 짤 수 있다니. 너무 과분한 일이었다.
심지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도 있었다. 내가 과목을 정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느꼈다.
자주성을 주는 것 하나만으로 나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를 했다면, 이제는 내가 스스로 공부했다.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보기도 하고, 궁금한 건 영상으로도 찾아봤다. 이렇게나 바뀔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부모님도 신기해하셨다. 공부를 열심히 하니 걱정을 따로 안 하셨다.
대학교에서의 생활은 단순히 학업을 위한 게 아니었다.
강의를 듣고, 동아리와 학회에 참여하며 내 안에 나도 몰랐던 가치나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나를 드러내면 안 될 것만 같은 분위기 속에 있었던 것 같은데, 이곳에서는 나를 당당하게 표현해도 인정받는 듯한 안전함을 느꼈다. 더 수용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건 아마 나와 같은 가치와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에는 또래와 같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성숙하다 해도 거기서 거기이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달랐다. 다른 대학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다닌 대학에서 선배들은 나를 수용해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준 사람들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살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점점 나아졌다. 이 시간을 회복의 시간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가장 많이 떠오른 생각은 어렸을 때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나약해서 우는 게 아니었다. 그저 감정이 풍부했을 뿐이었다. 그 나이 때는 다 울면서 크는 나이다. 또래 친구들보다 더 많이 울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잘못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되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용되지 못한 감정들이 쌓여서 스스로를 망가지게 했다.
감정을 인정하는 연습은 쉽지만은 않았다. 과거의 나를 스스로 인정해 주었다. 남들을 탓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탓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나를 인정해 주었다. 많이 슬펐을 거라고,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나의 묵힌 감정들을 하나씩 인정해 주고 수용해 주었다.
울음이 많아서 스스로를 미워했던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감정이 풍부한 아이로 태어났을 뿐이라고.
슬픈 영화를 볼 때는 울어도 괜찮고, 속상할 때는 약한 모습을 보여도 된다고.
누군가 이상하게 보면 어떡하지라는 고민도 줄어들었다. 나는 나니까.
자존감도 높아져갔다.
다시 생각해도 대학교를 참 잘 갔다고 생각한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회복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