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희망
1991년 2월 쏜(추운) 날 아침.
첫 아이를 출산한 지 2주,
부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몸으로 영등포역에서 강화도행 버스에 올라탔다.
얼마만큼 달려왔을까?
버스는 1970년 개통하여 1980년대 후반부터 헬게이트가 열린 강화교를 달리고 있었다.
다리 밑, 강처럼 보이는 바다.
염하(강) 물살이 거세게 흘렀다.
강화터미널에 도착했다.
앞으로 노가리(노상, 늘) 보게 될 강화 터미널의 첫 풍경은
유난히 많은 할 머이(할머니) 말투가 인상 깊었다.
엉켜있는 버스들 사이,
밧쁘게(바쁘게) 움직이는 할머이들.
장사하려고 짐을 옮기며 긍매는(쩔쩔매는, 애쓰는) 할머이,
고구마며 무이(무)를 펼쳐놓고
손으로 미끼리며(문지르며) 외쳤다.
“이리 오나서(와서) 무이와 고구마 사시겨(사세요).”
나는 물었다.
“강화 여자종합고등학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요?”
학교 안내판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섰다.
구불구불한 좁은 길,
슬레이트와 기와지붕 집들,
담장 너머 앙상한 나뭇가지,
멀리 학교가 보였다.
돌을 쌓아 올린 둥근 우물터,
그 주위로 몇 채 안 되는 옛집이
둥글게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교문으로 들어서자 왼쪽 좁은 틈 사이로 조선시대 건축물, 강화 향교.
굽은 언덕을 올라가니 운동장과 테니스장이 나왔다.
붉은 벽돌의 일자로 긴 4층 건물, 큰 은행나무를 안고 있는 구령대.
여자 교감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출산 휴가를 신청하고 담당 학년과 업무를 배정받았다.
3월 중순경, 출산 휴가를 마치고 출근했다.
교사 꽃밭 옆 쪽문은 민가와 연결된 오솔길로 이어졌다. 점심때가 되면 선생님들과 한 상에 둘러앉아 민가에서 해 주는 집밥을 먹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얼음 띄운 오이냉국이 가슴속까지 시원해졌다. 학생들도 점심을 다 먹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지나갔다.
나는 구령대 옆 큰 은행나무 아래 의자에 앉았다.
100년 넘은 은행나무는 넓은 그늘로 시원한 휴식공간을 주었다.
무성하고 짙은 초록 은행잎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했다.
제자 W가 내 옆에 앉았다.
유난히 날 잘 따르고 맡은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는 제자였다.
강화는 밤, 감, 도토리가 많아 도토리묵을 직접 쑨다며, 봄이면 질개이(질경이) 나물이 맛있다며, 강화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졸업 후 취업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강화를 벗어나 사는 것이 흐이망(희망)이라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물었다.
“선생님,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이미 그 대상을 정해놓은 질문 같았다.
‘불쌍하다’는 ‘처지가 가엾고 슬퍼서 가슴이 아프다.’라는 뜻이지만, 내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제자가 곧 답을 말했다. 나는 최소한 그 아이가 말한 ‘불쌍한 사람’은 아니었다.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점심 끝 종이 울린다.
1996년 2월 W는 졸업 후 강화 수협에 취직했다. 나도 3월 1일, 인천 시내로 발령받았다. 5년 동안 인연을 이어준 강화교는 이제 인천 시내와의 새로운 인연이 되어 주었다.
1997년 강화대교가 완공되면서 강화교는 2010년까지 차량 통행이 금지된 채 방치되었다.
강화도를 떠나고 15년 후, 남편은 강화도에 작은 농가를 구입했다. 남편과 함께 추억의 강화도를 찾았다. 강화대교를 건널 때 왼쪽에 덩그러니 서 있는 강화교가 쓸쓸해 보였다. 강화대교를 건너 잘 정비된 풍물 시장을 구경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과일 각방(가게)에 들어갔다.
‘사람이 북적이면 과일도 맛있겠지?’
내가 복숭아를 고르고 있을 때,
“선생님, 저 기억하시겠어요?”
각방 여주인이 아는 체했다.
앳된 모습은 없지만 분명 W이었다.
“그럼 알지!, 그대로네.” “수협 다니지 않아?”
“남편과 사내 결혼했어요.” “구조조정 1순위로 남편은 남고 제가 사표를 냈어요.”
그 순간. 은행나무 그늘에서 웃던 제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생님,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그때, 네가 했던 말.
“강화에서 태어나, 강화에서 살다,
강화 남자를 만나,
평생을 강화에서 사는 여자요.”
답변 그대로라면, 제자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되어 내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제자의 표정과 손님들에게 대하는 모습이 불쌍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큰 각방인 걸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다.
제자의 흐이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나 보다.
묻고 싶었다.
‘강화대교를 건널 기회가 없었나?’
‘왜 강화대교를 건너지 않았나?’
그날 은행나무 아래처럼,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제자에게 ‘불쌍함’의 대명사였던 강화도.
벗어나고 싶었던 강화도.
나에게는 제2의 고향이자 인천시민으로 살게 해 준 강화도였다.
“선생님, 건강하세요.”
제자가 내게 덤으로 복숭아를 하나 더 건넸다.
여름 햇살에 복숭아 솜털이 반짝였다.
그 반짝임처럼 그녀의 웃음도 여전히 반짝였다.
제자의 따뜻한 마음이 강화도의 훈훈한 마음 같았다.
강화대교를 건너지 못함을,
강화도를 벗어나지 못함을
후회하지 않는 제자가 되길.
다리를 건너든,
건너지 못하든,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인생은 충분히 아름답단다.
우리에게
‘흐이망’이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