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포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면 잔상이 너무 오래 남기 때문이다. 그 결정적 장면들은 머리에 콕 박혀서 낮에는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가 꼭 혼자 있는 밤이 되면 용수철처럼 탁 하고 기억 속에서 튀어 오른다. 그러면 온 신경이 예민해지며 괜히 등짝이 오싹오싹해진다.
오랫동안 공포 영화의 장면이 등 뒤를 따라다녔던 건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구미호였던 것 같다. 백발의 머리를 풀어헤치고 빨간 눈동자에 날 선 손톱을 얼굴 앞에서 휘두르던 구미호가 너무 무서워서 밤에 불을 끄면 창호지 바른 안방 문 앞에 소복을 입은 구미호의 검은 그림자가 서성이는 것 같았다. 그러면 괜히 실눈을 뜨고 이불 밖으로 빼꼼히 방문을 훔쳐보곤 했다. 그때마다 마당의 자두나무가 구미호의 백발이 날리듯 조용히 흔들렸다. -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귀신이 무섭다고 호들갑을 떨 때마다 말씀하였다. " 옛날엔 귀신이 있었지만 로켓 타고 달나라 갔다 온 날 다음부터 귀신은 없다." 아, 세종대왕보다 훌륭하신 우리 할아버지! 나는 정말 로켓이란 과학 용어가 부적처럼 느껴지며 깊은 위안을 받았다. 세상의 모든 귀신이 로케트 타고 달나라로 꺼져버리길.
어릴 때 살던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화장실이다.
현관문을 열고 마당을 가로지르면 재래식 '변소'가 있었다. 백열등이 희미하게 빛을 내던 그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네모진 변소의 밑바닥이 검은 동굴처럼 깊어 보여 저절로 공포가 느껴지곤 했다. 어느 날 하필 비도 부슬부슬 오는 깊은 밤에 급하게 변소에 가게 되는 재수 없는 일이 생길 때는 동생들을 불러 줄줄이 세워 놓고 끊임없이 이름을 불러댔다. "야 가지 마. 거기 있지?" "아, 있다고" 동생들의 짜증 내는 소리는 나의 무서움을 몰아내 주었다. 혹시 변소 밑에서 피 칠갑을 한 귀신이 빨간 종이와 파란 종이를 선택하라는 요구를 할까 봐 최대한 빠른 마무리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빨간 종이 파란 종이를 흔드는 귀신이 요즘도 화장실에 있는것 같다. 똥통에 빠지면 장수한다더니 귀신은 똥 통속에서 불멸의 삶을 얻었나 보다. - 아파트에 이름도 고급스러운 '화장실'이 안방 안에 붙어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문명은 참 위대한 지고
학교로 가는 길 냇가 옆에는 오래된 수양버들이 한 그루 있었다.
봄에 연둣빛 이파리가 바람을 타고 살살 흔들리는 개천의 풍경은 그림처럼 예뻤다. 그러나 바람 부는 밤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수양버들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공포 딱 그 자체였다. 옛날 얘기 듣는 걸 좋아하던 그때 휘휘 늘어진 그 수양버들이 밤이면 머리를 풀어헤치고 머리를 감는 귀신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어쩌면 그 여자가 웃으며 뒤돌아 볼 수 있다고 , 그 식겁할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어쩌다 바람에 가느다란 줄기가 내 몸에 스치기만 해도 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용기가 있었으면 산발한 그 머리채를 잡고 쫑쫑 땋아서 댕기를 메어주던지, 똥 머리 곱게 묶어 나무 정수리 위에 야무지게 올려 줄걸.
연둣빛 수양버들이 살랑살랑 춤추는 때 우리 앞산에는 진달래가 붉게 살랑거렸다. 그런 계절이 오면 어른들은 산에 오르지 못하게 하셨다. 진달래에 홀려서 산으로 깊게 들어가면 문둥이가 잡아간다고. 문둥이는 나 같은 어린애를 잡아서 단지 속에 거꾸로 박아 놓았다가 먹는다고, 그래야 병이 낫는다고 겁을 주셨다. - 벌에 쏘였을 땐 병원의 주사 한 대 보다 효과 빠른 된장을 권하던 시절이었다. 한센병에 대한 의학지식이 없으니 문둥이는 그저 끔찍할 뿐 동정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고통을 안고 사셨을 그분들께 머리 숙여 죄송함을 전한다.) 문둥이가 무서워 진달래는 늘 많이 꺽지 못했는데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니 아마 진달래가 필 무렵에 뱀이 독을 품고 다니던 계절이라 깊은 산에 가지 못하게 하신 게 아닐까 생각한다. - 문둥이가 무서워 뱀이 더 무서워?
학교에서 소풍이나 운동회를 잡으면 이상하게 비가 오는 날이 많았다.
그런 날 아침에 눈을 뜨면 이불속에서 나는 온 우주의 기를 모아 귀를 예민하게 발달시켜본다. 지금 들리는 저 '촤아아' 소리가 빗소리 인지 , 엄마가 생선을 굽는 소린지. 빗소리라고 인정을 하게 되는 순간 차라리 눈을 감고 꿈이라고 주문을 외운다.
학교 행사 때마다 비가 오는 건 우리 학교 강당을 지을 때 도끼질을 잘 못해서 땅속에 있던 용의 머리를 날렸기 때문이다. 용은 하루만 더 기다렸으면 하늘로 승천하는데 망할 도끼질에 머리가 잘렸으니 원한을 품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소풍날이나 운동회에 비를 내리게 하는 저주를 내렸다. -전설 속에서 가장 흔해 빠진 동물이 용이다. 누구도 본 적이 없고 증명하지도 못했지만 전설 따라 삼천리 속에서 용은 시골집을 지키는 메리나 쫑 처럼 방방곡곡 없는 곳이 없었다.-
용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에는 수호신이 있었다.
교문 옆에서 늘 우리를 굽어 살펴주시는 이순신 장군이다. 갑옷을 입고 긴 칼을 옆에 차고 엄한 얼굴로 내려보시는 이순신 장군은 사실 낮에는 동상이지만 밤이 되면 이리저리 움직이며 우리 학교를 돌봐 주신다. 이순신 장군 동상이 밤마다 움직인다는 사실에 우리는 얼마나 뿌듯하고 뭉클했는지 그 앞에선 감히 거짓말을 하지 못했고, 남자 애들은 짓궂은 장난을 금했다. -아, 이순신 장군께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신 건 남몰래 우리 학교를 지켜주시기 위함이었던가. 왜 하필 연고도 없는 우리 동네를....... 동상이 움직이는 이 신박한 비밀을 정재승 선생님은 아실까?-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의학보다 민간요법이, 과학보다 전설이 인기 있었던 천둥벌거숭이 적 우리 이야기.
전설을 비밀처럼 안고 살던 그때.
그땐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