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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Nov 19. 2021

21세기 귀족(1)

현 부동산양극화 문제를 역사적 관점으로, 그리고 메소포타미아로.

당신은 신분제도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이 글은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기고 싶었던 부동산제도의 숨겨진 역사를 파헤치는 글이 될 것이다



- 목차 -


챕터 1 : 현 부동산제도의 문제점과 역사적 관점 제시

1-1 : 부동산제도를 역사적인 관점으로 살펴볼 필요성

1-2 : 오늘날 21세기 지주들이 귀족인 이유



챕터 2 : 인류 초기 문명의 토지사상과 토지제도

2-1 : 토지사유제의 기원 –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2-2 : 토지 소유에 따르는 군역,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법전들



챕터 3 : 고대 그리스 문명의 토지사상과 토지제도

3-1 : 미노아-미케네 문명

3-2 : 그리스 암흑기 간의 변화

3-3 :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중심으로 본 그리스의 토지사상과 토지제도



챕터 4 : 로마의 토지사상과 토지제도

4-1 : 건국부터 카이사르까지

4-2 : 아우구스투스황제부터 서로마 멸망,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챕터 5 : 원시 게르만족과 중세 유럽의 토지사상과 토지제도

5-1 : 원시 게르만족의 토지사상

5-2 : 6세기부터 9세기 부르주아의 등장까지

5-3 : 10세기부터 16세기까지



챕터 6 : 근대의 토지제도와 토지사상

6-1 : 영국을 중심으로 본 17세기

6-2 : 근대계몽사상과 프랑스 대혁명이 토지소유권 및 토지사상에 미친 영향

6-3 : 영국의 고전경제학들과 토지

6-4 : <프랑스민법전>에 반영된 당대의 토지사상



챕터 7 : 오늘날의 토지사상과 부동산제도가 형성되기까지

7-1 : 주류 경제학이 토지사상에 미친 영향

7-2 : 독일에 잔존했던 고대 게르만적 토지사상

7-3 : 미국의 경제학이 바라본 토지, 그리고 헨리 조지

7-4 : 20세기의 경제학과 토지사상



챕터 8 : 현대 토지사상과 부동산제도에서 비롯된 주택 거품의 심각한 문제성




 




- 본문 -


챕터 1 : 현 부동산제도의 문제점과 역사적 관점 제시  

1-1 : 부동산제도를 역사적인 관점으로 살펴볼 필요성     


독자들도 학창 시절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을 것이다. 고대와 중세의 귀족들은 대부분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토지 재산이 거의 없는 임차인들에게 임대해주었다. 덕분에 귀족들은 임대료 즉, 지대[1]를 받으며 일을 하지 않고 편하게 생계를 유지했다. 여기서 ‘임차인’이라는 단어는 꽤나 누그러뜨린 표현이고, 토지를 가지지 못한 당시의 노예, 농노, 가난한 소작인을 의미한다. 쉽게 얘기하자면 토지를 소유한 자는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타인을 부려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명백하게 그러한 특권은 고귀한 혈통이라는 관념적 특징 이전에 지주라는 경제사회적 특징 즉, 토지 소유에서 나왔다. 아무리 지체 높은 명문 귀족이라고 해도 땅이 없으면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할 경제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평민 출신이라도 넉넉한 토지가 있다면 혹은 넉넉히 토지를 가지게 된다면 토지 임대를 통해 귀족마냥 편하게 살 수 있었다. 드물지 않게 역사적으로 평민이라도 몇 세대 이상 큰 토지 재산을 보유하면 귀족으로 신분이 격상되기도 했었으며, 설령 귀족 신분을 끝내 획득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귀족처럼 땀 흘리지 않고 대지주로서 소작인을 부려먹으며 살 수 있었다.


1579년 프랑스에서 반포된 블루아 칙령의 내용은 평민이 3세대 봉안 봉토[2]를 소유하면 귀족이 될 수 있었던 관습을 폐지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넉넉한 토지 재산이 사실상 귀족의 현실적 자격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역사적 사례다. 그보다 2천 년 전인 기원전 4세기경 아테네에도 ‘토지 없는 시민은 그 시민권을 박탈해야 하는가’에 대한 중대한 논의가 있었는데,[3] 이 또한 토지가 없는 자는 귀족이 될 수도, 더불어 온전한 시민도 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례다. 


아시아의 우리나라에도 아주 똑같은 맥락의 사례가 있다. 이승만이 1925년에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하고 임시정부를 재정비하셨던 김구 주석께서도 핏줄만큼은 본래 양반 가문이셨다. 하나 집안이 몇 세대를 가난하게 지내면서 자연스레 그 가문은 신분을 잃어버려 평민 가족이 되었고 그 와중에 김구 주석께서 태어나셨던 것이다.[4] 핏줄은 양반이지만 가난의 지속으로 인해 신분이 격하된 명백하고 가까운 사례다. 


이처럼 인류사 전체를 통틀어서, 귀족을 귀족으로 만드는 관념적 근거는 혈통이지만 실제적, 물질적 근거는 넉넉한 토지 재산이었다. 21세기에도 영국에는 작위 귀족들이 있는데, 하나 같이 막대한 토지를 가진 자들이라는 점은 이러한 필자의 주장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지주귀족들과는 반대로 땅 없는 가난한 인민들은 그들의 토지 빌려 농노로서 그 땅 위에서 소작하는 생활을 해왔고 이는 수 천년 동안 이어져 왔다. 토지 임대인이로서의 지주의 권리, 즉 지주권은 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력해졌다. 그 지주권이 중세에는 영주권이 되었고 그 영지 내의 인민들은 그 부당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특권 아래에서 불법적 세금 납부, 사생활 침해, 인신적 자유 착취를 당했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지주가 휘둘렀던 사법권에의 종속, 소작 외 잡다한 부역들을 강요당해 신음했다.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Das Kapital)』에서 지적했던 바로 그 “경제 외적 강제(non-economic compulsion)”로 인해 그들은 지주들로부터 고통받았다. 2~3세기 전 선조들은 그러한 불의에 정의롭게 맞서 싸우고, 후대의 우리 후손들에게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물려주기 위해 피를 흘렸다. 그들의 후손들인 우리는 이러한 예속, 종속관계가 옳지 못한 것임을 명백히 배웠으며 알고 있다. 허면 고대~근대까지 남아있던 잘못된 부동산제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100% 폐지되었는가? 고대~근대의 지주귀족들이 과연 순순히 정의 앞에 무릎 꿇고 자신들의 토지 관련 이권을 내려놓았을까? 고로 21세기에는 귀족들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표지


큰 토지의 소유가 위와 같은 불로소득의 원천이자 경제사회적 권력이 되니 지주귀족들이 자신들의 토지를 순순히 내놓을리 없었으며, 우회적인 방식으로 그 이권을 보존하고 행사해왔다. 토지 없는 자를 노예로 더 이상 삼을 수 없지만, 토지의 양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자신 대신에 땀을 흘려줄 노동자로 삼는 것은 변함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제도만 남아 있으면 예속의 본질은 존속하기 때문이다. 다소간 ‘인신 예속’이 줄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나, 이와 같은 이유로 지주귀족들의 ‘경제사회적 예속’은 오늘날까지 단 한순간도 줄어든 적이 없었다.(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근대 사회로 진입하면서 인류의 산업이 농업에서 상공업으로 변화됨에 따라, 큰 도시로 많은 인구가 이주했으며 토지는 공급량이 절대적이기에 당연히 다시 토지 수요가 더 크게 올랐다. 당연히 그 수요 증가에 따라 가격이 오르며 독자가 본서를 읽고 있는 이 순간도 토지와 주택의 가격은 오르고 있다. 2~3세기 전 프랑스혁명 등, 근대적 혁명으로 중세의 봉건적 잔재와 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한들 토지 매개로 하는 경제사회적 예속관계는 폐지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존재한다.


그 경제사회적 예속관계를 존속시키는 결정적인 제도는 근현대의 불의한 부동산제도다. 토지의 고유 특성인 희소성과 필수성을 십분 활용하여 임차인이나 부동산 실수요자를 경제적으로 옥죄며 자신의 뜻대로 임대료와 토지 가격을 올리는 행위는, 즉 부동산 소유자들의 경제적 힘은 오늘날에도 ‘법’으로 허용되고 굳건히 보장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독일 등의 몇 선진국을 제외하고 대다수 국가의 부동산 소유주들은 국가의 법이 보장하는, 임대료 결정에 대한 지주의 자유권이 거의 절대적으로 보장되어 있기에 그들은 언제나 임차인에 대하여 경제사회적인 우위를 점한다. 


그러한 경제사회적 힘을 통해 그들은 큰 ‘불로소득’을 얻는다.(부동산 소유주들이 더 선호하는 용어는 투자수익이다. 투자라는 단어 뒤에 숨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작금의 21세기에선 모든 이들이 이런 부정의한 부동산제도에 대해 비판은커녕 그 지주권과 그 막대한 수익을 부러워 하며, ‘노력의 결실’이라고 우러러보고 되려 칭찬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


근현대에 들어 이러한 지주-임차 관계와 계약의 불균형이 다소간 개선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4세기 초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337) 때에 만들어졌던 ‘임차인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으며 도망치지 못하도록 쇠고랑을 채울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사라졌고, 1410년 프로이센에선 지주가 도망치는 소작인을 재판 과정 없이 교수형에 처하게 하는 권리가 국법으로 격상되었으나[5] 근대에 들어 사라졌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만약 아직까지 남아 있다면 필자 또한 지주층의 훼방으로 이 저술을 완료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현대 부동산 소유주들이 지주권을 바탕으로 임차인의 노동과 그 생산물을 취할 수 있는 권리의 본질은 고대~중세에 토지를 임대한 자들에게 미치는 권력인 과거의 지주귀족들의 권리와 동일하다. 당연히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권리의 ‘본질’이 합법적으로 존속하고 있으며 법으로 보장되고 있다. 본서의 마지막 챕터에서는 오늘날 21세기의 지주귀족들이 그 부당한 특권을 어떤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으며, 어떤 문제를 야기해오고 있는지를 다룰 것이다.


허나 본서의 본문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토지 소유에 따르는 귀족적 특권은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변화되어 현대의 부동산제도에 녹아들어 갔으며, 그 과정 중에 어떤 문제들을 일으켰는가?’이다. 즉 토지법제사를 전체적으로 관통하여 시간적 순서로 설명하는 것이 본서의 내용 대부분이다. 역사의 순서대로 그 과정을 차근차근 확인할 것이므로, 내용이 다소간 길더라도 본서의 난이도는 고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라 생각한다. 방대한 토지법제사를 이 책에 모두 다 옮길 수는 없었으나, 주요한 법전들과 법령들을 살펴보고 주목할 만한 토지법들을 추려냈다. 


그 토지법의 역사의 순서대로 읽다보면 필자가 의도한 바, 독자들은 두 가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는 위와 같이 독점에 근거한 부동산 소유주들의 귀족적 특권을 보장해주는 현대의 법제가 어떤 배경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제정 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고대~중세에 토지를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켰던 조상들과는 달리, 왜 그들의 후손인 우리 현대인은 이와 같은 귀족적 권리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두 번째 깨달음에 대하여 미리 간략히 설명하자면, 역사적으로 불의하게 흘러간 토지법이 오늘날까지 존속하기에 현대에도 토지가 없어서 노동의 과실을 지주들에게 내주어야 하는 빈곤한 이들조차도, 그 법제에 문제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근현대적 토지사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근현대의 경제학은 이러한 토지사상을 철저히 뒷받침하고 있으며, 역사학은 봉건제의 순기능(왕 즉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은 자가 군역 등을 이행하는 것)까지 철폐하는 것이 마땅한 악폐습이라고 프레임을 씌워 놓았으며 우리 현대인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위와 같은 21세기 지주귀족들의 지주권을 아무런 의심이나 문제제기 없이 받아들이며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한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의 자식 세대들에게도 이렇게 정의롭지 못한 토지사상과 부동산제도, 이에 따른 구조적이고 필연적인 착취와 가난을 물려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후술 한다.

 

우리가 토지법제사를 살펴보는 이유는 첫째로 각 문명의, 각 시대의 토지법은 지주들의 지주권의 행사의 법적 근거와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법은 당시 인류의 사고방식과 사상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각 문명의, 각 시대의 사람들이 어떠한 토지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는 데에 최고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독일어 역사에서 최초로 독일어로 쓰인 법전은 <작센슈피겔(Sachsenspiegel)>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작센은 독일 동부의 지역명이고 슈피겔은 거울을 의미한다. 고로 작센슈피겔이라는 법전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작센 사람들이 자신들의 법사상을 스스로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인 것이다. 


각 시대의 법제는 그 시대 사람들의 법사상을 비춰주는 거울이기에,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법으로 또 법적 권리로써 보장되고,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법으로 금지한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옳다고 믿었던 토지사상, 로마인들이 옳다고 믿었던 토지사상, 중세~근대 유럽인들이 옳다고 믿었던 토지사상 그리고 우리 현대인이 옳다고 믿고 있는 토지사상을 알아보고자 한다면 토지에 관련한 당대의 법들을 들여다봐야 함은 매우 지당하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도서관에 보관 중인 '작센슈피켈 14세기 필사본'


따라서 우린 법이라는 거울을 도구 삼아서 역사와 시간의 순서대로 메소포타미아인들, 그리스인들, 로마인들, 게르만인들, 중세~근대 유럽인들은 어떤 토지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확인하고 그리고 그들이 우리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이를 상속해 주었는지 확인할 것이다. 물론 그 과정 중에 상속되지 않고 탈락되어 퇴색한 사상은 무엇인지, 일부 변질되어 상속된 사상은 무엇인지까지 세세하게 포함하여 말이다.


동시에 토지사상과 토지법의 변화에 따른 민중의 생활상을 깊이 있게 살펴볼 것이다. 그런 변화가 당대 사람들의 삶, 특히 토지양극화가 진행되는 경제사회에서 토지법의 변화가 인민들에게 얼마나 불리하게 작용하여 그들을 가난과 피착취로 내몰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지법과 그 사상을 살펴볼 때에는 당대를 살았던 인물들이 토지와 관련되어 한 발언들도 살펴보도록 한다. 한편 필자가 아시아인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서양사와 서양법세사를 다루는 이유는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의 부동산법제가 명백하게 유럽의 법제를 도입한 것이 때문임을 밝여 둔다.

 

본서에서 토지사상을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했고, 아래와 같다.


토지공개념(土地公槪念)

토지재산권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한다는 사고방식. 고대의 토지공개념은 현대적 수준보다 매우 강력하여, 대부분의 경우 가족과 마을 공동체 단위로 토지를 소유하고 향유했다.(가보유지사상) 또한 지주에게 그의 토지재산권 행사가 공익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도록 강력히 구속하기도 했다.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때론 사회적 처벌도 따르는 경우가 있었으며 여러모로 현대의 토지공개념보다 더욱 큰 적극성을 띈다.


이를 세부적으로 적극적 토지공개념, 소극적 토지공개념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지주가 토지로부터 나오는 지대의 일부를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직접적으로 공익에 기여해야 한다는 개념이고, 후자는 지주가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토지재산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이러한 토지공개념을 ‘지주의무사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토지공개념이 더 폭넓은 의미를 가지므로 본서에서는 후자를 포함하는 용어이자 일반적으로 더 잘 알려진 전자를 사용하도록 한다. 하위 개념으로는 아래의 토지주권사상, 토지평등사상, 역토사상, 왕토사상(국토사상)이 있다.


토지주권사상(土地主權思想)

누구에게나 토지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이며, 토지평등사상의 바탕이 된다. 문명과 시대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지만 개인의 토지 처분권이나 일정 수준 이상의 토지를 획득하는 것에 사회적 제약을 가하는 형태로 구현되었다. 다만 고대~중세인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여성들은 군역을 이행하지 않았기에 토지소유권이 남성 수준으로는 보장되지 않은 경우가 매우 많았다. 


동산은 대부분의 경우 여성에게도 소유권이 보장되었기에 이러한 여성의 토지비소유를 전적으로 성차별이라고 보긴 어려운데, 왜냐하면 군역은 지주에게 부과되는 가장 대표적인 의무이지만 여성은 이행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토지평등사상(土地平等思想)

위 토지주권사상을 바탕으로, 누구나 토지에 대한 권리와 이에서 나오는 지대를 평등하게 향유해야 한다는 사고방식. 평균지권사상과 동일한 의미이다.


역토사상(役土思想)

왕 및 국가, 공동체부터 토지 및 그 소유권을 인정 받은 지주는 공익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고방식. 즉 ‘공적 재산의 소유자는 공적 부담을 져야 한다’라는 사고방식이며 선후관계가 바뀌기도 한다. 지주가 공익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무를 가진다는 점에서 위 토지공개념의 가장 대표적 구현이기도 하다. 인류 토지법제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역토는, 중세 유럽처럼 군역토(軍役土)이며 본서에서 ‘군역토사상(軍役土思想)’이라는 용어로 가장 많이 다룬다. 그 군역 이행 외에는 관료 직책 수행, 종교적 봉사 등이 있다. 다만 국가의 공권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이나 황무지로써 버려진 곳을 개간한 자에게는 그러한 의무가 부여되지 않기도 했다.


왕토사상(王土思想)

전 국토의 본래적 소유권이 왕 및 국가에게 있다는 사고방식. 시대와 국가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지만 왕이 이에 근거하여 토지 관련 세금을 거두어 가거나 신하에게 하사한 토지에 대하여 일정 수준 간섭하는 근거였다. 따라서 지주가 범법을 행하거나 국토의 소유권자인 왕에게 해를 가한다면 이에 근거한 법과 왕권으로 왕이 그의 토지소유권을 박탈하고 회수해 갈 수도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근대 사회로의 진입 이후 왕정이 폐지된 국가에서는 국토사상(國土思想)이지만 오늘날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양자 모두 거의 완벽히 소멸된 상태이다.



1-3 : 오늘날 21세기 지주들이 귀족인 이유


귀족이란 선천적으로 타 계급과는 달리 정치, 경제, 사회적인 특권을 가진 계층을 말한다. 근현대에 들어와 우리 인류사에 신분제는 거의 완전히 철폐되었지만 그 귀족들은 ‘다른 종류의 특권’을 가진 상태로 근대에 녹아들며 잔존했다. 근대는 서유럽을 중심으로 신분 간의 계층 변동, 융합, 분리가 적극 일어나는 동시에 드디어 자본주의가 사실상 문명 변화의 최전선에 있던 시기였다. 이 두 사건은 양자 분리된 상태로 개별 발전한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후에 근대의 영국 사례를 논하며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미리 말하자면, 근대 혁명과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첨병 역할을 자처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부담을 주는 고대의 토지사상과 봉건제의 순기능(지주의 군역 이행)을 폐지하는 동시에 지주권을 강화하였다. 중세 봉건제의 악폐습이라는 프레임을 고대 토지사상의 순기능에도 씌워놓고 그조차 일괄 폐지한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가면으로 쓴 사리사욕의 은밀한 성취였다. 가장 중요한 작업은 지주권을 근대 법제에 자연스럽게 녹아내는 것이었고 이를 기어코 성공시켰다.

 

대표적으로 17세기 영국에서는 그러한 작업을 최전선에서 주도한 계층이 바로 젠트리다. 특히 영국은 자국만의 특별한 신분제도의 특징 즉,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신분 간의 경계가 그다지 두껍지 않다는 특징이 있었기에 이는 위와 같은 변화에 적절한 토양 역할을 했다. 덕분에 그들은 21세기에도 수 천, 수백 년 전 귀족들이 누렸던 권리를 지주권이라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현존하는 영국 상원(Lord’s House)은, 이름 그대로 ‘지주들의 의회’로써 수 세기 전부터 지주귀족이었던 사람들의 후손들이며 반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명백한 21세기 귀족들이다. 1909년에 윈스턴 처칠이 국민예산(People's Budget)법안에 발의하며 했던 아래의 연설은 필자의 위 주장을 단적으로 대변해준다.


도로를 만들고, 거리를 만들고, 서비스를 개선하고, 전깃불이 밤을 낮으로 바꾸고, 산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오는 동안에도 땅주인은 가만히 앉아만 있습니다. 이렇게 발전된 것들은 모두 납세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비용과 노동을 제공한 결과입니다.


토지독점자는 이런 발전과정에 전혀 손을 보태지 않지만 개선된 환경들은 모두 그가 소유한 땅의 가치를 끌어올려 줍니다.


토지독점자는 공동체에 아무런 용역을 제공하지도 않고 공공 복지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고,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그 어떤 과정에도 기여를 하지 않습니다.[6]



영국 61, 63대 총리 윈스턴 처칠(1874~1965)


이어지는 본문의 흐름은 이러하다.

챕터 2에서는 인류 최초의 문명에서는 어떤 토지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확인하고, 고대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에 의거하여 왕에게 토지를 수여 받은 자는 대표적으로 군역을 이행해야 하는 군역토사상이 있었음을 확인한다.


챕터 3에서는 유럽 문명의 뿌리인 그리스 문명에서의 토지사상과 제도가 중동 문명에서 도입되었다고 볼만한 큰 가능성과 근거들을 확인한다. 그리고 암흑기(기원전 13~기원전 9세기), 고졸기(기원전 8~기원전 6세기), 고전기(기원전 5~기원전 4세기 말)를 거치며 토지공개념과 역토사상뿐만 아니라 토지주권사상, 토지평등사상이 퇴색하고 변질되는 과정을 확인한다.


챕터 4에서는 다른 문명권 및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로마 특유의 토지사상을 확인하고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변하는 토지사상과 이에 따라 심화되는 부동산 양극화를 확인한다.


챕터 5에서는 로마의 토지사상과 제도의 물들기 이전의 게르만인들의 본래적 토지사상과 그것이 반영된 생활상을 개력적으로 살펴보고, 6세기부터 근대에 접어들기 전까지 로마의 토지사상과 제도를 계승하면서 고대적, 게르만적 토지사상이 퇴색하는 과정을 확인한다.


챕터 6에서는 17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한 (군)역토사상의 폐지, 그리고 근대계몽사상의 도래와 로마법의 부활로 인해 유럽 대륙 국가들에 잔존해왔던 고대 게르만적 토지사상이 거의 완전히 사라지는 결말을 확인한다. 이후에는 영국의 고전경제학과 <프랑스민법전(Code civil des Francais)>에서 확인되는 토지사상을 통해 근대적 토지사상을 확인한다.


챕터 7에서는 주류적인 경제학이 토지를 바라보는 관점의 형성과 우리 현대인들의 토지사상에 결정적으로 미친 영향을 확인한다. 마지막 챕터 8에서는 현대인들이 겪었던 2008년 금융위기 등 전례 없는 경제위기가 부동산 및 주택 거품으로 촉발되었다는 실증적 연구 자료들을 통해 확인한다. 물론 그러한 촉발은 수천 년간 누적된 불의한 부동산제도가 원인이다.



챕터 2 : 인류 초기 문명의 토지사상과 토지제도

2-1 : 토지사유제의 기원 –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2018년 7월, 고고학자들이 요르단 북동쪽의 검은사막(Black Desert)에서 숯으로 변한 아주 오래된 빵 조각들을 발견했다. 머지않은 미래에 또 다른 고고학적 발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간 알고 있던 지식과는 달리 더 옛적, 적어도 기원전 12,400년경 전에는 인류가 농업사회로 진입하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발견이었다. 인류에게는 농업사회로 넘어가는 시점인 동시에 개인에게는 농사만 아니라 최초로 특정한 토지에 대한 점유의 필요성이 명백하게 생긴 시점이기 때문에 토지법제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시점이다.


그 전까지 우리 인류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수렵, 채집으로 생계를 연명해갔으며 잠시 머물던 지역의 식용 식물을 거의 다 소비하거나, 사냥을 다 마쳤거나, 더 좋은 기후나 환경을 찾아 떠날 필요가 있으면 떠나는 생활을 했었다. 이렇게 농업 사회 이전에 유목과 수렵채집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고대인들은 토지 점유 및 소유에 대해 서로간 경쟁이 없어 토지소유권의 개념은 전혀 없었으며, 심지어 근현대에도 문명과 상대적으로 동떨어진 부족민들은 문명인들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 개인적 토지소유권에 대한 개념이 아직도 없는 경우가 더러 있다.[7] 


18~19세기 뉴질랜드의 현지인들인 마오리 부족민들이 좋은 예시가 되겠다. 18세기부터 백인들이 침입해와서 토지소유권을 그들로부터 샀는데, 마오리족은 “자신의 권리를 양도했을 뿐 출생하지 않은 후손의 권리를 매각하지는 않았다”라고 주장하였기에 백인 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8]


그러나 농업사회로 진입한 후 예를 들어 인구 증가 및 밀집으로 인하여 토지 수요가 전례 없이 증가했을 때, 토지 소유를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농경지에 끌어다 쓸 물을 필요로 하여 많은 인구가 강 근처에 정착한 이후에는, 사냥에만 전념하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농부들은 강에 가까운 토지를 소유하고 싶어했다. 우리 현대인들이 자신의 집과 직장의 거리가 가깝기를 바라듯이, 그들 또한 자신의 집에 가까운 곳에 농지가 있기를 바랬다. 광할한 토지에서 일부분만 비옥한 토지인 경우에도 거의 동일한 결과가 발생했다.


 모든 토지가 강을 끼고 있는 것도, 모든 토지가 균일하게 비옥도를 가진 것도, 모든 토지가 각자의 집에 가까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 토지에 대해서 공급량은 일정한대 수요는 커졌으니 이에 따라 어떤 갈등이 발생했을지는 너무 뻔하다. 이렇게 인구 증가 및 밀집으로 인하여 토지 수요에 비해 토지 공급이 부족한 경우가 발생한 이후부터, 우리 초기 인류는 어떠한 토지사상으로 바뀌었을지,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떠한 방향으로 고도화 되었을지 확인해보자.


인류사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및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약 3300년 경 발생하였을 때, 위와 같이 특정한 장소를 정해 수십 년 거주하고 수많은 사람이 집단으로 도시국가를 이루었다. 허면 인류 초기의 토지 소유 및 점유의 형태는 오늘날처럼 ‘개인’ 수준에 가까웠을까, 아니면 ‘공동’ 수준에 가까웠을까. 이에 대한 답은 세 가지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알아낼 수 있다.


첫 번째로 발생한 사건은 문자발명이다. 인류최초의 문자인 쐐기문자는 기원전 3300년 전 수메르인들이 발명했다. 두 번째로 발생한 사건은 화폐의 발명이다. 인류최초의 화폐는 기원전 3000년 경 발명되었다. 이 최초의 화폐는 금속이나 조개화폐 등이 아니고 오늘날의 어음과 흡사하여 계약자 쌍방의 이름과 매매물품 등이 쐐기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점토판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현금거래보다는 더욱 거래에 관련한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세 번째 사건은 기원전 2700년경에 이루어진 최초의 사유지 매매와 그 기록이다.[9] 


확증적인 증거는 없지만 위 사건들로부터 최초의 문명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본래 토지공개념이 상당히 지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사유지의 매매에 대한 문자 기록이, 거래 기록과 같은 역할을 하는 점토판화폐가 발명이 되고도 약 300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지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기간과 지역을 지칭하긴 어렵지만, 토지의 점유가 최초로 이루어졌을 거라 여겨지는 기원전 12,400년부터, 대략 기원전2700년까지 메소포타미아에서의 토지재산은 일반적으로 절대적 사소유권의 대상이 아니었다.


현대적 사소유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적 성격을 더 가지고 있었다. 토지는 한 명의 개인이 사유⋅독점⋅처분할 수 있는 재산이 아니라 씨족이나 마을 공동체 차원에서의 공적으로 소유했고 향유했던 것이다.[10] 이러한 고대 역사기록에서 서로 다른 집단 단위가 토지를 두고 싸우고 빼앗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11] 이에서도 동일하게 추론되는 바, 토지 소유라는 개념이 사유재산보다는 공유재산이라는 개념에 가까웠던 시기이기에 그러한 토지 경쟁이 대부분 가족 공동체 및 마을 공동체 등 집단차원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심지어 약 2천 년 후에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도, 법제도의 형성 초기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주는 가문의 토지는 상속이라기보다는 명백히 공동 소유의 연장선으로 여겨졌을 정도였다.[12] 사인 간의 토지 매매도 있었지만 주로 씨족 단위로 이뤄졌었다.[13] 약 천 년이 지났음에도 구 바빌론 왕국 시대(기원전 19~17세기)에 기록된 어느 토지 매매에 대한 기록은 여전히, 무려 48% 가량이 친족 간에 이뤄졌을 정도다. [14]


이러한 토지공개념 및 가보유지사상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퇴색되긴 했으나 언급했듯 근현대에도 세계 각 지역의 여러 소수 민족들은 여전히 토지의 수익 및 처분을 대개 집단 단위로 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몽골 등지에 살며 다소간 문명과 거리가 있는 소수의 민족들은 근대까지도 토지 세금을 내지 않는 자의 토지를 공동체로 환수해왔다.[15] 다만 특정 토지에 대한 개간 등 명백히 개인의 큰 노력이 투입된 토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사소유권이 성립했거나 적어도 주변 이웃들에게 모종의 권리를 인정 받았음을 일러두는 바이다. [16] 그렇다고 해도 물론 오늘날과 같이 개인적⋅절대적⋅배타적 토지소유권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혹자들은 이와 같이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토지사유사상과 토지사유제도는 인류문명의 고도화에 따른 자연스런 발전의 산물 아닌가?’ 필자는 그러한 의견에 이와 같이 답하고자 한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19세기 영미에서 노예제도의 존속을 바라는 자들의 사고방식과 동일하다’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러한 생각은 틀렸다. 따라서 옳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상과 제도는 필연적으로 토지 비소유자들은 토지 소유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예속시키기 때문이다. 신분제도처럼 말이다.


본론으로 돌아오자. 토지 매매의 절반 이상이 친족이라는 점은 씨족 간의 토지 소유에 있어서 소수의 토지 독점과 이로 인한 빈부격차를 방지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바, 이에서 토지평등사상이 엿보인다. 설령 이를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씨족 외에 사람에게 완전한 토지 매각을 최대한 지양함으로써 토지에서 거의 영속적인 소득을 얻는 것은, 극빈을 피할 가능성을 높여주게 되어 사회 전체의 빈부격차 발생의 가능성을 낮춰준다.[17] 비슷한 맥락으로, 근현대에도 어느 민족은 상속자 없이 사망한 자의 토지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데,[18] 이 또한 위와 같이 결과적으로 토지평등사상의 목적과 일치하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토지의 개인 사유는 적어도 수메르 초기 왕조(기원전 2900-2335년) 시기에도 명백히 확인되듯이[19] 일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헌데 기원전 22~21세기에 우르 제 3왕조의 왕권이 극에 달했을 때에도 토지 사유는 뚜렷했다는 고대의 기록있는데[20] 이에서 짐작할 수 있는 점은 토지사유사상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르긴 하나 전체적으로는 점차 강화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원전 2700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발생한 최초의 토지 매매는 어떠한 배경에서 생겨난 것일까. 기원전 4000년경에 대규모의 정착이 이루어지고 최초로 세워진 도시국가는 종교국가의 성격을 띠었다. 따라서 종교적 관리제도가 형성되고 있었으며, 그 대표적 도시국가로는 우르크가 있다. 이 도시를 포함한 기원전 3000년까지의 당시 고대의 기록은 종교적인 단어인 제물, 사원 등을 주로 언급하고 있다. 유일신을 믿는 고대 히브리 사회나 황제보다 교황이 우위에 있던 중세 유럽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종교적 지배’ 즉, 신정정치(神政政治, 종교적 정치)는 인류가 문명을 이루고 나서 가장 먼저 구축한 정치체제였고 그 기원은 이곳, 그리고 이 시기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이 토지의 궁극적인 소유자라고 믿었다.


고대 도시 우르크의 잔해들(photo : SAC Andy Holmes (RAF)/MOD)


신을 대리하는 그 종교 지배자들이 자연스레 권력을 쥐게 되면서 토지를 실제적으로 관리하고 주민들을 통치했다. 곧 토지의 상당부분이 성직자 계층 및 성직자 개인의 토지로 사유화되었다.[21] 한편으로는 왕 등의 중앙 권력이 충성된 신하들에게 그들의 노고에 대한 반대 급부로 토지를 하사하였다[22] 땅을 포함하여 종교적 지배자의 통치는 생산된 곡식을 민중에게 재분배할 정도의 행정력을 갖출 정도로 강력했고, 이를 포함하여 국가사회의 정치, 경제, 군사, 제례, 문화 등에서의 총체적 실권은 종교지배자들이 쥐었다는 사실이[23] 의미하는 바는 인류 문명의 초기에 지배 계층의 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빠르게 배타적 소유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원전 제4천년기를 지나고 지배적인 세력이 등장하면서 토지 사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물론 종교적 지배자들의 모든 토지가 사유지인것도, 지배자가 아닌 개인이 사유지를 결코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위에 언급했듯 버려진 황무지를 개간한 자는 그 토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전체적으로 위와 같은 토지사유제의 정착 과정과 그 배경에서 기원전 3천년기의 초기인 기원전 2700년에 최초의 사유지의 매매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우린 농업혁명으로 인해 인류 및 개인이 토지를 점유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더욱 많은 인구가 집단생활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문명생활을 하기 시작할 초기까지는 일반적으로 토지공유사상 및 공개념이 지배적이었다는 것,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종교적 및 세속적 지배 계층이 등장하면서 토지사유사상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간략하게 확인하였다. 즉 토지사유사상은 토지에 대한 원시적 사상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었고, 특정 지배세력이 인위적으로 배타적 사유를 시작하면서 그 싹이 텄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초기 인류사에서 대부분의 경우 토지 소유는 현대에 비교하여 공유개념에 가까웠음을 확인하였다.


다른 관점에서 토지사유사상의 시작 시점에 대해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설득력 있는 사료를 주목해 보아도 좋을 듯하다. 우리 인류는 기원전 6천 년 경에 이미 농경이 더욱 정교해져서 새로운 기술과 원거리 간의 상거래를 촉진시켰을 정도라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었는데,[24] 필자는 이에서 자본주의의 원시모델뿐만 아니라 그들의 토지사상도 일부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차적으로 문자가 없음은 물론이요 교통과 정보통신의 수단이 사실상 없다시피 하여 원거리 거래가 이루어지기 매우 어려움에 불구하고 기원전6천 년 경부터 원거리 상거래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수렵채집 시대에서 주로 얻는 육류 등과는 달리 곡식을 재화로 삼으면 오랜 축적이 충분히 가능하기에 경제적 가치의 보존이 용이하여 부의 축적이 어렵지 않게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의 생존성은 더이상 사냥에 필요한 육체적 능력에 국한되지 않게 되었다. 각 개인이 부와 부의 축적을 전보다 더욱 중요시 여기기 시작했고 그렇기에 이를 추구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합리적인 행위로 여겨지는 사회 즉, 자본주의의 매우 원시적 형태가 발아했다 것을 의미한다.(자본주의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말이다) 원시 쐐기문자 점토판의 전체 기록 중 무려 85%가 회계기록이라는 사실은[25] 따라서 당대의 고대 선조들의 원시적 자본주의, 적어도 자본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사상이 상당히 일찍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는 통찰은 그보다 3천 년이나 더 지나서야 사유지를 매매하기 시작했다는 것 즉, 이는 본래 우리 인류가 자본주의의 맹아를 틔우고도 최소 약 3천년 간 현대적 의미에서의 토지 사유는 ‘그다지’ 지배적이지 않았다는 것과 아주 오랫동안 사유지를 곡식이나 의복과 같이 용이한 매매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속적 지배자는 토지를 독점 및 사유한 후에 그 땅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였을까. 그 넓은 땅을 부의 축적을 위한 농경지, 토지 매매를 통한 부의 축적으로만 사용하였을까? 아니다. 인류 초기의 국가와 대제국이 세워지고 서로간의 전쟁이 벌어지며 먹고 먹히는 국제관계 속에서, 땅은 그들이 자신의 정치권력을 유지 및 강화하기 위해 군사제도를 뒷받침하는 필수적 요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대의 토지사상과 오늘날의 토지사상이 매우 상이함을 재차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References


[1] 지대 : 현대에는 주로 임대료만을 의미하지만, 본서에서는 옛 소작인들이 지주에게 한 해 생산물의 일부를 토지 임대료로 바쳤던 현물뿐만 아니라 토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이익’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중세 지주들이 자신의 숙면을 위하여 야간에 집 근처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지 못하도록 소작인들에게 잡다한 부역을 시키는 것 등 강제부역권이 있었는데, 이 또한 토지(임대)를 통해서 얻은 그 지주의 이익이므로 지대에 포함된다.

[2] 봉토 : 이론적으론 본래적 소유권이 왕에게 있는 토지이자, 군역 이행 등의 조건 및 의무가 딸려 있는 토지이다. 즉슨 봉주와 봉신의 주종관계를 맺어주는 봉건제도의 핵심이 매개물이다. 중세~근대를 지나면서 왕이 갑에게, 갑이 을에게, 을이 병에게 분봉(봉토를 수여)을 하는 등 반복적이고 중첩적인 봉건관계가 형성되어 인민들이 점유하기도 했다.

[3] Dionysius of Halicarnassus, On Lysias, ⅩXXIV; 김진경, 김봉철, 최자영, 백경옥, 송문현, 오흥식, 차전환, 김경현, 신미숙, 최혜영,『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2008), 177쪽.

[4] 김구, 『백범일지』(1947).

[5] 조만제, “구츠헤어샤프트Gutcherrshaft의 형성”, 「인문학논총」4(2001.8), 경성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5쪽.  

[6] Josh Ryan collings, Toby Lloyd, and Laurie MacFarlane/김아영 옮김, 『땅과 집값의 경제학』(사이, 2017), 120쪽.

[7] Jan Stanislaw Lewinski/정동호 외 2인 옮김, 『財産의 祈願과 村落共同體의 形成』(세창출판사, 2007), 23~24쪽.

[8] George/김윤상 옮김, 『진보와 빈곤』, 346쪽.

[9] John P. Powelson/정희남 옮김, 『세계토지사』(한국경제신문사, 1998), 26쪽.

[10] Robert C. Ellickson & Charles D. Thorland, “Ancient Land Law: Mesopotamia, Egypt, Israel”, 71 Chi.-Kent L. Rev. 321 (1995), p. 354.

[11] Powelson/정희남 옮김, 전게서, 22쪽.

[12] Harrison, 전게서, p. 239.

[13] Ellickson & Thorland, 전게서, p. 356~357.

[14] Elizabeth C. Stone, Economic Crisis and Social Upheaval in Old Babylonian Nippur, in Mountains and lowlands: Essays in the archaeology of greater Mesopotamia(Louis D. Levine & T. Cuyler Young, Jr. eds., 1977). p. 276, 279; Ellickson & Thorland, 전게서, p. 389에서 재인용.

[15] Lewinski/정동호 외 옮김, 전게서, 27~29, 84쪽.

[16] 상게서, 48쪽, 63쪽.

[17] Ellickson & Thorland, 전게서, p. 390.

[18] Lewinski/정동호 외 옮김, 전게서, 83~84쪽.

[19] Igor M. Diakonoff, “Structure of Society and State in Early Dynastic Sumer”, Monography of the Ancient Near East 1/3, 1974, pp. 1-16; Alfred J. Hoerth, Gerald L. Mattingly, and Edwin M. Yamauchi/신득일 & 김백석 옮김, 『고대 근동 문화』(CLC, 2012), 33쪽에서 재인용.

[20]  Ellickson & Thorland, 전게서, p. 339.

[21] Powelson/정희남 옮김, 전게서, 24~27쪽.

[22] Ignace J Gelb, Piotr Steinkeller, and Robert M Whiting, Earliest Land Tenure Systems in The Near East: Ancient Kudurrus, Oriental Institute of the University of Chicago, 1991, p. 26; Ellickson & Thorland, 전게서, p. 364에서 재인용.

[23] Van De Mieroop/김구원 옮김, 『고대 근동 역사』 (CLC, 2010), 59~60쪽.

[24] Jack finegan, Archeological History of the Ancient Middle East (Bouler, Colo.: Westview, 1979), p.6; Hoerth et al/신득일 & 김백석 옮김, 112쪽에서 재인용.

[25] Mieroop/김구원 옮김, 전게서, 2010,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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