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 문명인들의 토지사상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이 글은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기고 싶었던 부동산제도의 숨겨진 역사를 파헤치는 글이 될 것이다.
- 본문: 21세기 귀족(2) -
2-2 : 토지 소유에 따르는 군역,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법전들
현대 문명에서의 토지 소유에는 사실상 절대적, 개인적 권리만이 존재하며 의무는 없다시피하다. 따라서 본서에서는 초기 문명에서는 토지 소유에 공적 개입 및 간섭 그리고 무엇보다 의무 부과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느 정도였는지를 확인해보자.
왕이나 관리 등 세속적 지배자들이 등장은 약 기원전 2500년 경이고 그와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3천 년 중반기부터 논밭의 임대차가 일상적인 것이 되며 지주가 무려 수확량의 1/4~1/3까지를 임대료로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성문법이 등장하기 훨씬 전에도 땅을 임대하고 생산물의 일부를 얻을 수 있는 지주의 경제사회적 힘과 권리가 유의미할 정도로 강했다고 판단된다. 즉 적어도 당시의 토지 소유에 따르는 권리는 현대적 권리와 비교하여 결코 작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허면 그들이 토지를 소유함에 따르는 의무는 무엇이고 어느 정도였을까.
시간이 흘러 이윽고 기원전 2350년경이 되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크고 작은 도시국가들을 점령하고 하나의 통일 왕국인 아카드 제국을 근동 지역 최초로 세운 사람은 그 유명한 ‘사르곤 왕’이다. 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의 군역토제도의 성립은 이 무렵 그의 왕조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1]
그들은 중세 시대처럼 아니, 중세 시대보다 거의 3천년 앞서서 봉주(封主)인 왕으로부터 토지를 하사 받은 봉신(封臣)인 군사의 관계를 정립했다. 그렇다고 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군역토제도 및 그에 준하는 제도를 최초로 고안한 문명은 아니고, 그보다 약 천 년 더 빠른, 기원전 32세기경 이집트에서 군역과 하사지를 기반으로 한 봉건제도의 원시적 형태가 그 유명한 메네스 왕에 의해 최초로 성립되었다.
사르곤왕의 군사들이 단순한 식사와 주거만을 제공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군사적 충성에 대한 대가로 토지를 할당 받았으리라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로 아카드 제국의 왕들은 하여금 이전 도시국가의 지배자들의 토지를 아주 공격적으로 빼앗으려 했다는 사실이다.[2] 아카드 왕국의 정복 전쟁의 주요한 동기는 중세 서유럽의 봉건국가들의 전쟁 동기처럼, 분명히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군인들에게 전투 후의 전리품으로 하사할 토지가 필요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은 거의 확실하다.
두 번째로 경제적 동기다. 만약 사르곤왕의 군사들이 군역의 대가로 왕으로부터 토지가 아닌 그저 식사와 주거만을 제공받았다면 명백하게 차라리 농부의 삶이 나을 것이다. 전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받는 군인과는 달리 농부 혹은 기타 직업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고, 가정을 꾸릴 수 있으며, 매일매일 전장에서 목숨을 걸 필요도 없고, 자신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잉여생산물을 만들어 부를 축적할 수도 있다. 즉, 사르곤왕의 군사들이 상비군으로서 지속적인 군복무를 했던 현실적인 이유는 농부 등의 직업보다 더 큰 경제적 인센티브가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추론된다. 그 인센티브는 바로 토지 할당이다. 실제로 사르곤왕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줄 토지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가구(household)로부터 농경지를 매입했었다.[3]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이 은을 세금으로 부과하였고 이는 개인으로서는 쉽게 감당해 낼 수 없는 막대한 징세였기에 인민들은 가족까지 팔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토지를 팔게 되었는데, 그 징세로 토지를 매입한 왕 및 왕족은 이를 자신들의 추종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4] 당시 군인이 국가로부터 넉넉히 토지를 할당 받는다면, 상비군으로서는 농업에 투자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도 소작인을 고용하여 그 토지를 경작하게 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즉 이웃 빈농들보다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면 이것이 군인에 대한 토지 할당과 직결된 경제적 동기가 되는 것이다.
한편 기원전 22~21세기 우르 제 3왕조 당시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된 바는 모든 토지가 전적으로 왕의 소유는 아니었고 사인(私人)간의 부동산 매매 및 임대 등의 경제활동이 있었다는 것인데, 따라서 적어도 그 시기 전까지 국유지와 사유지가 공존했다는 것은 확실하다.[5] 토지사유사상이 왕토사상과 독립적으로 병존하면서도 전자는 점차 강화되었음이 확인된다. 시간이 흘러 기원전 2150년경 사르곤 제국이 멸망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다시 수십 개의 국가로 나누어짐에 따라 토지소유권자들의 수는 늘고 토지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줄어들자 상대적으로 토지를 점유하던 개개인의 소유권은 더욱 강화되었다.[6]
중앙 정부가 강성할 때의 지배적인 왕토사상 및 국토사상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2000년 즈음에 메소포타미아의 대도시 시파르(Sippar)에서, 어느 정도 부동산에 대한 개인의 소유권이 자리 잡아 가고 있음을 명백히 증거하는 사료는 꽤 흥미롭다. 드물지 않게 여성도 토지소유권자가 될 수 있었으며, 개인이 토지를 임대하여 수익을 올리는 수준을 넘어 노후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부동산을 이어 받을 상속자를 자의로 선정할 뿐만 아니라 부동산담보대출을 할 정도였다.[7] 물론 당시 부동산담보대출이 오늘날처럼 일반적이지 않았고 제도적 규제를 받았음을 고려하여도,[8] 다방면에서 토지사소유권의 강화가 진행되고 있었음은 아주 명백하다.
멸국한 아카드 제국의 뒤를 이어 등장한 강국은 초기 아시리아 왕국과 바빌론 왕국이다. 기원전 19세기 아시리아의 왕 샴시 아다드(Shamshi-Adad)는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Hammurabi, 재위 기원전 1792~1750년)와 동맹을 맺고 자신의 왕국을 통일 시켰으나 곧이어 더 강성해진 바빌론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아시리아를 무릎 꿇린 함무라비는 중동의 새로운 패권자가 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함무라비 법전>을 제정한다. 미리 말하자면 그 법전을 통해 당시 강대국이 전혀 아니었던 함무라비의 바빌론이 어떻게 근동 남부 지역을 통일하고 막강한 국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에 관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그 법전에 군역토제도를 더욱 공고히 만들기 위한 기능이 있었던 것이다.(이 또한 이집트문명으로부터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군역토제도가 근대에 들어와 소멸하기 전까지 수 천년 동안 인류사에 거의 보편적으로 존재해왔던 군역토제도의 원시적 모델은 바로 여기, 바빌론에서 ‘일쿰(Ilkum)’제도라는 이름으로 운용되었다.
한편, 당연히 모든 토지가 왕의 소유는 아니었기에 약 기원전 20~16세기에는 왕토사상, 군역토사상을 벗어난 사유지가 많이 있었고,그러한 사유지는 국가나 왕에게 지불해야 하는 특별한 부담을 가지지 않았으며 상속 등을 통해 영구적인 사소유권에 속했다.[9]후술하겠지만, 따라서 <함무라비 법전>은 사제, 군인, 관료 등의 토지소유권을 강화시키면서도[10] 특히 ‘군인’의 토지소유권 보장 및 그의 군역 이행을 구속하는 것에 크게 집중되어 있다. 왜냐하면 군역토제도는 근현대 국가와는 달리 고대의 국가들이 인민의 경제사회생활을 체계적으로 통제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맹점이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첫 맹점의 예는 토지를 하사 받은 자가 그 봉토를 매매할 때에(심지어 도주할 때에) 발생하는 제도적 맹점이다.
두 번째 맹점의 예는 봉토를 받은 후에 개인이 갖가지 이유를 대며 단기간만 복무하거나 군역을 그만두고 도주하는 등 군역에서 이탈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인적 맹점이다. 따라서 당시 고대 문명의 정권들에겐 봉토 받은 자가 봉토를 양도하는 것에 대한 규제를 두어 군역토제도의 목적이 잘 달성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다.[11] 1400년 후에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도 군역을 이행하지 않는 여성들의 토지 소유가 증대하여 남성들이 가난해지고, 군역을 이행하는 인구가 줄어들어 국방력 약화되는 문제를 강력히 제기한 바가 있을 정도로[12] 인류의 군역토제도 및 봉건제도에서 위와 같은 문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큰 제도적 허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가와 군주에 입장에서 이러한 두 가지 상황들을 대비하여 군역토제도에 이를 예방할 수 있는 기능을 하는 법이 필요했다.즉, 군역토를 받은 군인의 의무성과 그의 지주권을 강화시키는 법이 필요했다. 물론 후대에 들어 군역을 대가로 토지가 아닌 다른 것(화폐를 비롯한 동산 등)을 하사하더라도 이를 받은 신하들에게 법으로 구속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다른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그들의 충성도가 지배자 자신의 권력 유지의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였기 때문이다.
<함무라비 법전>에서 지주권을 강화시키는 조항들을 확인하지 전에 먼저 개략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법전들이 있는데, 위의 <함무라비 법전>보다 수백 년 앞서 편찬된 인류 최초의 성문법들이다. 4개의 법전이 먼저 편찬되었는데 그 법전들에서는 토지소유권과 지주권에 직결되는 법의 제정이 있었는지, 만약 있었다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개략적으로 짚고 넘어갈 것이다. 그 편찬 순서에 따라 <우르-이님기나 법전(Code of Urukagina)>, <우르-남무 법전(Code of Ur-Nammu)>, <리피트-이쉬타르 법전(Code of Lipit-Ishtar)>, <에쉬눈나 법전(Code of Eshnunna)>을 살펴보자.
먼저 인류사 최초의 성문법이자 개혁법인 <우루-이님기나 법전(우르카기나 법전)>은 약 기원전 2350년경 수메르 도시국가인 라가시(Lagash)의 왕 우루-이님기나(Ur-inimgina)에 의해 편찬되었다. 당시 다른 도시국가 움마(Umma)와의 갈등을 끝내고 평화기를 맞이 했음에도 왕궁의 관료들이 그 권세를 내려놓지 않고 국가의 모든 분야에서 각 사회계층의 민중을 공권력으로 압제하였다. 전국적으로 무자비한 징세와 가축 및 토지 약탈 등을 일삼았다. 심지어 종교지배자들조차도 그 관료들의 혹독한 세금에 시달릴 정도였다. 우루-이님기나 왕은 이와 같이 부패한 관료들의 전횡을 뿌리 뽑고자 하는 개혁법의 성격을 띤다.[13] 구체적인 개혁 분야는 왕실의 권력 남용, 신전의 토지와 인사권에 대한 침해, 노동계층에의 탄압, 과한 징세,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학대 그리고 불미스런 가족법이었다.[14] 그리고 그 핵심에는 형식상의 신토사상을 내세우면서 사실상의 왕토사상를 이루려 함이 있었다.[15] 전문에서 편찬 목적과 현재 사회악습들을 제외하고 그가 행한 개혁조치를 법조항으로 본다면, 토지와 관련이 있는 글귀는 단 하나뿐이다.
행정자들이 더이상 가난한 자들의 과수원을 노략하지 않았다.[16]
그와 위 조항에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왕토사상을 현실화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지주들의 권리를 강화시키려는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개혁적인 법으로 압제 당하는 가난한 이들의 토지를 보호하려 했음이 확인된다. 이같이 인류사 최초의 성문법은 지주들의 지주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부동산 양극화을 발생시킬 만한 원인을 제공할 가능성도 없었음이 확인된다.
다음으로는 <우루-이님기나 법전>의 영향을 받아 그 뒤를 이어 편찬된 <우르-남무 법전>을 살펴보자. 기원전 2100년경에 우르의 왕 우르-남무 혹은 그 아들 술기 의해 사회 안정 및 기득권 보호를 목적으로 법전이며, 37개 조항 중 12, 16, 23, 24, 26, 27, 33, 34, 35, 36, 37번 째 조항은 훼손되어 있어 확실히 알 수 있는 조항의 개수는 26개다. 그 중에 토지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조항은 아래와 같이 3개의 조항뿐이다.
(30조) 사람이 권력을 써서 다른 사람의 밭을 경작한 것에 대해 판결이 나왔는데 이것을 무시하였을 경우에, 그 사람은 그의 권력에서 쫓겨나갈 것이다.
(31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밭에 물이 넘치게 했을 경우에, 밭 100 SAR마다 보리 900 실라를 계산하여 갚을 것이다.
(32조) 사람이 사람에게 경작할 밭을 빌려주었는데 경작하지 않아 못 쓰는 땅이 되었을 경우에, 밭 100 SAR마다 보리 900실라를 계산하여 갚을 것이다.[17]
30번째 조항은 지주권을 보장하는 것보다 권력을 남용하는 자로부터 농민과 그의 땅을 보호하려는 조항이다. 31번째 조항 또한 지주권의 강화보다 오히려 지주가 자신의 땅 댄 물을 잘 관리하여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주의해야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32번째 조항은 자칫 임차인에 대한 임대인의 지주권 남용의 여지를 둔 것 같으나, 앞서는 30~31조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농지 경작자에게 토지를 잘 관리해야 할 의무를 명시하여 이웃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규제할 뿐, 지주의 지주권을 강화시킨다고 해석되지는 않는다. 종합하자면 지주권의 강화보다는 되려 상당히 토지공개념에 기반한 토지법들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리피트-이쉬타르 법전>을 살펴보자. 위 <우르-이님기나 법전>과 <우르-남무 법전>의 뒤를 이어 수메르 법 전승의 마지막 주자인 이 법전은, 기원전 1930년경 수메르의 도시국가 이신의 5번째 왕 리피트-이쉬타르 왕에 의해 제정되고 편찬되었다. 또한 위 우르-남무 법전과 맥을 같이하여 기득권의 권리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동시에 개인의 책임 및 의무를 묻는 조항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18] 남아 내려오는 조항의 개수는 약 38개인데 그 중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수의 조항들이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있음을 밝혀둔다.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민법의 주요 내용들은 후대의 에쉬눈나 법에서 대부분 수용되고, 함무라비 법에서 더 포괄적이고 조직적으로 다루어진다.”라는 점이다.[19] 즉 수메르 법전이 가지고 있는 토지사상을 계승하였을 것, 계승의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부분이다. <리피트-이쉬타르 법전>에서 지주권과 유의미한 연관성이 있는 조항들은 아래와 같다.
§7 만일 누군가 자신의 과수원을 임대해준 경우, 임차인은 […]을 그 주인을 위해 심을 것이요, 종려나무의 1/10에서 나오는 과실을 사용할 수 있다.
§8 만일 누군가 자신의 휴경지(休耕地)를 제공하여 과수원을 경작케 하였지만 만일 제공받은 자가 그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못했다면, 그는 그 휴경지를 본래의 주인에게 반환해야 한다.
§11 만일 누군가의 집 옆에 타인의 휴경지가 있는데 관리가 안 되고 있다고 하자. 그래서 집 주인이 그 휴경지의 주인에게: “당신이 자신의 땅을 소홀히 관리한다면, 내 집에 도둑이 들 수도 있소. 그러니 관리를 제대로 하시오.”라고 한다면 이러한 경고는 공적으로 유효하다. 이 후 휴경지의 주인의 관리소홀로 인해 발생되는 집주인의 재산상의 손실은 휴경지의 주인이 배상해야 한다.
§18 만일 땅의 주인이, 남자든 여자를 불문하고, 소유한 토지의 세금을 내지 못하여 제 3자가 대납(代納)을 했다면, 그 (주인)은 3년간 그 소유지로부터 퇴거(退去)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금을 미납한지 3년이 지나면) 세금을 대납한 자가 그 토지를 소유하게 되며, 원 소유자는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다시 주장할 수 없다.[20]
7항은 임차인 생산물에 대해서 가지는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다. 8항은 지주가 해당 법을 악용할 여지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경작인이 신의성실의 의무를 저버린 것에 대한 마땅한 조치이므로 지주권을 강화시켰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11항에서는 지주의 의무를 명시하였고 이를 이행하지 않음으로 공동체에 발생하는 책임을 지게 하는 조항이다. 18항은 법에 의해 토지세금 미납자의 소유권을 박탈 및 이주시킬 정도로, 지주의 납세의 의무를 매우 강력하게 강조하는 조항이다.
종합하자면 <리피트-이쉬타르 법전>도 훼손되어 있지 않은 조항들 중에 토지와 관련된 법들은 명백하게 지주의 권리를 강화하였다고 볼 수 있을만한 조항이 없다. 되려 11조는 토지공개념에 입각하여 지주에게 의무를 부과하였고, 왕토사상 및 국토사상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18항은 토지소유권을 거의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현대적 토지사상의 관점으로는 매우 파격적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법전은 <에쉬눈나 법전>이다. <에쉬눈나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보다 조금 이른 시기인 기원전 1800년경 또한 여타 고대 수메르 법전과는 달리 편찬인이 아닌 ‘도시국가 에쉬눈나의 이름을 따서 법전의 이름이 만들어졌다.[21] 이 법전은 토지를 소유한 자의 권리를 국가적 그리고 법적 차원에서 더욱 보장하거나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담겨 있는 조항은 전혀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토지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법조차 없었다. 편찬 목적이 기득권의 이익 보호와 인플레이션을 포함한 경제사회적 혼란을 안정시키려는, 상대적으로 조금 특수한 목적을 위해 제정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되는데,[22] 오히려 기득권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주권의 강화를 암시하는 조항이 전혀 없다는 것은 당시 에쉬눈나에도 명백하게 토지공개념이 강하게 존재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라고 생각된다.
References
[1] Van De Mieroop/김구원 옮김, 『고대 근동 역사』 (CLC, 2010), 63쪽.
[2] Robert C. Ellickson & Charles D. Thorland, “Ancient Land Law: Mesopotamia, Egypt, Israel”, 71 Chi.-Kent L. Rev. 321 (1995), p. 361쪽에서 재인용.
[3] Nicholas Postgate, EARLY MESOPOTAMIA: SOCIETY AND ECONOMY AT THE DAWN OF HISTORY, Routledge, 1992, p. 39, 41; Ellickson & Thorland, 전게서, p. 364~365에서 재인용.
[4] John P. Powelson/정희남 옮김, 『세계토지사』(한국경제신문사, 1998), 29~30쪽.
[5] Robert C. Ellickson & Charles D. Thorland, “Ancient Land Law: Mesopotamia, Egypt, Israel”, 71 Chi.-Kent L. Rev. 321 (1995), p. 339.
[6] Powelson/정희남 옮김, 전게서, 29~30쪽.
[7] Aubet, Maria Eugenia. 2013. Commerce and Colonization in the Ancient Near Eas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William N. Goetzmann/위대선옮김, 『금융의 역사』(지식의날개, 2019), 79쪽에서 재인용.
[8] Ellickson & Thorland, 전게서, p. 394.
[9] 상게서, p. 339~340, 366.
[10] K. V. Nagarjan, The code of Hammurabi: An Economic Interpretation, International Journal of Business and Social Science(Vol. 2, No.8), 2011, p. 111.
[11] Ellickson & Thorland, 전게서, pp. 376, 390~391.
[12] Aristotle/손명현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정치학/시학』(동서문화사, 2016), 318~219쪽. 원문에선 Politika, 2.9.
[13] 이종근, “수메르 우루-이님기나 법과 히브리법의 사회 정의 고찰”, 「구약논단」(한국구약학회, 2008), 142-144쪽.
[14] Alfred J. Hoerth, Gerald L. Mattingly, and Edwin M. Yamauchi/신득일 & 김백석 옮김, 『고대 근동 문화』(CLC, 2012), 46쪽.
[15] Mieroop/김구원 옮김, 전게서, 86쪽.
[16] 이종근, “수메르 우루-이님기나 법과 히브리법의 사회 정의 고찰”, 148쪽.
[17] 김영진, 『율법과 법전』(한들출판사, 2005), 177쪽.
[18] 이종근, “리피트-이쉬타르 법의 도덕성”, 『법학연구』41(2011), 431~437쪽.
[19] Walton, Ancient Israelite Literature, pp. 75-76; Kenton L. Sparks, Ancient Texts for the Study of the Hebrew Bible: A Guide to the Background Litetrature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 Inc., 2006), p. 420: 이종근, “리피트-이쉬타르 법의 도덕성”, 437쪽에서 재인용.
[20] 김영진, 전게서, 180~181쪽.
[21] 이종근, “리피트-이쉬타르 법의 도덕성”, 1쪽.
[22] 상게서, 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