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영철 Nov 20. 2021

21세기 귀족(3)

함무라비 법전에서 드러나는 당시 토지사상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이 글은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기고 싶었던 부동산제도의 숨겨진 역사를 파헤치는 글이 될 것이다.


 


 


 

- 본문 : 21세기 귀족(3) -


2-3: 지주권의 본격적 강화, 함무라비 법전


이제 <함무라비 법전>을 토지법제사적 차원에서 자세히 살펴보자. <함무라비 법전>은 총 282개조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중 14개의 조는 기원전 12세기 엘람 왕에 의해 훼손되는 등 일부만 남아 각 조항의 완전한 뜻을 알기가 어렵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온전히 남아 전해 내려오는 268개 조항들만을 다룸을 밝힌다. 학자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필자는 온전히 남아있는 조항 268개를 세 부류로 나누었다. 하나는 토지, 농경지, 과수원, 가옥 등의 부동산 단어가 언급되지는 않지만 황소, 곡식, 참깨, 수확, 댐 등이 언급되며 토지 및 농경과 유의미한 관련성이 있는 조항들이다. 또 다른 하나는 부동산에 포함되는 토지, 가옥, 농경지, 과수원 등의 단어가 뚜렷이 ‘직접’ 언급되는 조항들이다. 나머지는 토지와 전혀 관련성이 없는 조항들이다. 필자가 계수해본 결과 268개 중 약 19개의 조항들이 첫 부류에 속하는 조항들이고 약 40개의 조항이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조항들이었다. 나머지 209개의 조항은 토지와의 관련성이 거의 없었다.
 

즉 훼손되지 않은 268개의 조항 중 약 22%인 59개의 조항이 토지에 관련한 조항이다. 이 중 지주권을 명백하게 보장 및 강화하는 즉, 지주로서의 권리행사 범위를 확장시키거나, 경작자 및 토지임차인에 대한 확실한 경제적 우위를 점하게 하거나, 그의 실제 손해를 상당히 초과하는 배상을 받게 하거나, 생산물 취득에의 우선권을 갖게 하는 등의 조항들은 31, 32, 36, 37, 41, 42, 43, 44, 45, 50, 57, 58, 60, 62항이 해당되며 총 14개이다. 이는 268개의 조항들 중에 5.2%를 차지한다. 앞서 살펴본 선행하는 4개의 법전에서 지주권을 강화하는 조항이 거의 없었다는 것과 비교한다면 내용을 아직 살펴보지 않았음에도, 수치상으로 유의미하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반대로 어떠한 의무를 지든지 분봉 받은 자가, 토지공개념의 의거하여 그 지주로서의 사회적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요구하거나, 혹은 댐의 물이 이웃의 토지에 넘치지 않도록 관리할 책임을 지게 하는 등의 지주에게 책임을 묻거나, 토지 임대인의 생계 및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조항들은 30, 47, 53, 54, 55, 56, 71, 78항으로써 오직 8개뿐이다. 더군다나 엄밀히 말하면 이중 4개의 조항 모두 댐 혹은 관개수로 관리소홀로 생긴 피해를 보상할 것을 명하는, 당연히 법제화가 필요한 조항이었기에 사실상 지주의 권리남용을 막기 위한 조항 4개뿐이다. 268개의 조항 중 1.5%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주권을 강화하는 조항과 그 개수를 비교하면 1/3 정도이므로 적어도 중동 지역에서는 적어도 이 때부터 지주의 의무보다는 권리가 상대적으로 더욱 부각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인류 생산량의 대부분이 토지 위 농사에서 나오는 농경시대에 소, 낫, 노예, 배, 노동력 등의 동산에 대한 다양한 법제화가 이루어지면서 앞서 살펴본 네 개의 법전들에서 동산에 대한 소유권은 유의미하게 보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반면에, <우르-이님기나 법전>에서는 장례에 드는 임금이나 노동자의 품삯에 관한 조항들, <우르-남무 법전>에서는 약 3개의 조항, <리피트-이쉬타르 법전>의 약8개의 조항, <에쉬눈나 법전>의 약 44개 조항 등이 이에 해당) 1000년이 훨씬 지나도록 토지소유권 및 지주권의 강화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함무라비 법전>보다 먼저 편찬된 4개의 법전들에선 그러한 조항이 전혀 없고 기원전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토지소유권의 강화가 일어났음을 고려하면 상당히 유의미한 변화임이 명백하다.
 

<함무라비 법전>에서 토지법제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조항들을 추려본다면 아래와 같다.
 

26: 만일 군인(rēdūm)이나 덫을 놓는 자(사냥꾼)가 왕이 출정하라고 명령한 전쟁에 가지 않거나 혹은 그가 대리인을 고용하여 자신의 자리에 대신 보내면, 그 군인이나 사냥꾼은 사형에 처해질 것이며, 그에 대하여 적대적인 정보를 준 자가 그의 재산을 물려받는다.[1]


문자적으로는 지주권 강화와는 그다지 관련성이 없어 보이나, 이 조항에서 두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하나는 “군인(rēdūm)이나 덫을 높는 자(사냥꾼)”은 문맥상 병사와 지휘관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기에 병역 기피는 사형으로 다스릴 만큼, 군인의 군역 이행은 공권력에 의해 강력히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헌데 그 신고자 즉 “적대적인 정보를 준 자”가 그 병역 기피자의 재산을 양도 받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사실상 온전한 법 집행의 어려움이 매우 크다. 당시의 금속화폐나 곡물 등의 재산은 교환이나 소모, 무엇보다 은닉이 가능한 재화이기 때문이다. 허나 조항에서 언급되는 ‘재산’이 왕이 군인에게 하사한 토지 등의 부동산이라면 납득이 된다. 토지 등의 부동산은 영속적인 자산이며 결코 은닉할 수 없는 재산이므로 왕 혹은 국가가 환수하여 신고자에게 양도해주는 것이 가능하다. 이에서 바로 군역토사상이 명백히 드러난다.


다른 하나는 바빌론 정부가 개인에게 군역을 대가로 토지를 하사했고 개인이 그 토지를 사용하고 아들에게 상속했더라도 궁극적인 소유권은 변함없이 국가에게 속했다는 것에서 왕토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며, 뒤에 언급될 조항들을(28, 30, 35, 36, 37, 38, 41항 등) 통해서도 재차 확인된다.


27: 왕이 명한 군복무 동안에 포로로 잡혀간 군인이나 사냥꾼의 경우, 만일 그가 (사라진) 이후에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그의 밭과 과수원을 주고, 그(=땅을 받은 자)가 영지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고 있는데-만약 그(원래 주인)가 돌아와서 그의 도시에 다다르면, 그들은 그의 밭과 과수원을 그에게 돌려주고 그는 자신의 영지에 대한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


28: 어떤 군인이나 사냥꾼이 왕실에 속한 성채에서 복무하다 포로로 잡혀가면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복무 의무를 이행한다. 밭과 과수원은 아들에게 주어야 하며, 그는 그의 아버지의 복무 의무에 대한 책임을 이행한다.[2]


군복무 중에 포로로 잡혀간 군인 즉, 전투 후에 시체를 확인할 수 없어 적군에게 생포되었다고 추측되는 군인의 토지(밭, 과수원, 영지)는 “그들”이 타인에게 이를 양도한다고 하는데 이 때에 “그들”은 왕에게 위 사건에 개입할 권력을 위임 받은 관료 등을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그가 생환하면 그 밭과 과수원를 돌려받고 ‘자신의 영지에 대한 책임’을 다시 재개하는데 그 책임은 위의 26항을 통해서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하지만, 이후의 28항으로도 어떠한 책임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포로로 잡인 군인의 아들이 그 아버지의 복무를 대신 이행한다는 28항을 통해, 27항에서의 되찾은 영지에 대한 책임은 ‘군복무’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포로생활 또는 실종으로 인해 그 관계가 끊어지려고 해도 자식 중에 아들이 있다면 국가는 그 아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법의 강제성을 통해 모종의 봉건적 관계를 지속시킨다. 명백히 군역토사상이 재확인된다.


29: 만일 그의 아들이 너무 어려서 그가 그의 아버지의 복무의무를 이행할 수 없다면, 그의 어머니가 그를 양육할 수 있도록 그 밭과 과수원의 1/3을 그녀에게 주어야 한다.[3]
 

29항에서는 아버지가 포로로 잡혔을 뿐더러 그의 아들이 군역을 대체할 수 없는 미성년이라 군역 이행이 중단되면 그 1/3은 아내에게 준다고 하는데, 이는 나머지 2/3는 국가에게 다시 귀속되는 것을 암시한다. 즉 사실상 군역을 이행하기 어려운 여성이나 미성년의 남자에겐 토지 소유권이 부분적으로 박탈되어 왕에게 환수됨을 규정한 조항으로써, 군역토사상이 확인된다.  


30: 만일 군인이나 사냥꾼이 복무 의무 때문에 그의 밭, 과수원과 가옥을 포기하고 떠나면, 그가 떠난 후에 다른 사람이 그의 밭, 과수원과 가옥을 물려받을 수 있고 3년 동안 복무 의무를 이행한다- 만일 그(=본 주인)가 돌아와서 그의 밭, 과수원과 가옥을 요구하더라도 그것들은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물려받아 그 복무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사람이 주인이 된다.[4]
 

우리 현대인의 이성으로는 부동산의 주인이 해당 부동산을 단 3년 방치했다고 해서 제 3자에게 그 소유권이 양도되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던 <리피트-이쉬타르 법전> 중 18항 “만일 땅의 주인이, 남자든 여자를 불문하고, 소유한 토지의 세금을 내지 못하여 제 3자가 대납(代納)을 했다면, 그 (주인)은 3년간 그 소유지로부터 퇴거(退去)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금을 미납한지3년이 지나면) 세금을 대납한 자가 그 토지를 소유하게 되며, 원 소유자는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다시 주장할 수 없다”와[5]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이렇게 군인을 특정하고 그 복무 의무를 떨쳐버린 사람들에게 군역토사상에 기반하여 그들에게 군역 이행이 강력히 촉구되고 있다는 것, 또한 그 군역을 져버린 이를 대신한 자들에게 해당 토지 및 부동산에 관한 법적인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다는 것은 토지소유와 군역이 절대적 연관 관계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아래에 조항들은 바빌론 정부가 위와 같은 맥락으로 군인들의 봉토를 법적으로 강력히 보장해주는 동시에 군인의 군역 이행의 지속성을 꾀하려는 의도를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조항들이다.
 

36: (더욱이) 밭, 과수원, 군인이나 어부의 집 그리고 소작지는 팔 수 없다.


37: 만일 어떤 사람이 군인이나 사냥꾼의 밭, 과수원이나 가옥 혹은 국가 소작지를 샀다면 그의 행위는 불법이며 그의 돈은 몰수당하며, 밭, 과수원이나 가옥은 원래 주인에게로 되돌아간다.


40: 신전 여인(temple Woman: nadītu)과 상인, 그리고 특별한 의무가 부과된 밭, 과수원과 가옥의 소지자는 그(혹은 그녀)의 받, 과수원, 혹은 가옥을 팔 수 있다. 구매자는 그가 판 밭, 과수원, 가옥에 부과된 특별한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41: 만일 어떤 사람이 군인, 사냥꾼 혹은 가신[6]에게 속한 밭, 과수원이나 가옥을 물물교환으로 얻고 가치의 차이에 의한 부가적인 지불도 했어도, 군인, 사냥꾼, 혹은 가신은 그의 밭, 과수원이나 가옥을 되찾을 수 있고 그가 받았던 부가적인 지불도 취할 수 있다.[7]


36~37항은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은 신하들(“군인, 사냥꾼 혹은 가신”)의 자유로운 부동산 매매를 제한하는 법이다. 특히 누군가가 그 부동산을 군인으로부터 구매한다고 한들 불법으로 규정되어 국가로 그 돈이 귀속될 뿐더러 토지 또한 군인에게로 다시 이전되도록 강제한다는 점에서 강력한 왕토사상과 군역토사상이 확인된다. 이어서 40항~41항에서 결정적으로 확인되는 바 의무 이행이 조건으로 붙은 봉토 중에서 사실상 군인에 대하여서만, 봉토 매매에 따른 병역 기피를 법으로 막아 그가 군역을 이행할 수 있도록 촉구하고 있다. 군역토사상이 아주 단적으로 드러나는 조항이다.


한편 41항은 강한 법률적 공권력으로 국가로부터 토지를 하사 받은 이들이 이를 매매하지 못하게 하여 일정 수준이상의 경제력을 유지하게 하는 조항이다. 결국 위 세 조항도 앞서 살펴 조항들처럼 군인 등에게 하사된 토지에 대한 처분권이 국가에게 있음을 천명하는 동시에 국가의 토지를 하사하고 이를 강제적으로 유지하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군역 및 공무의 이행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래의 두 조항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38: 더욱이 군인, 사냥꾼 혹은 국가의 가신은 그의 영지에 속하는 밭, 과수원이나 가옥을 그의 아내나 딸에게 양도할 수 없고, 그의 복무 의무도 (그들에게) 넘길 수 없다.


39: 그는 그가 사서 그의 소유가 된 밭, 과수원이나 가옥은 그의 아내나 딸에게 기록으로 양도할 수 있고 그 책임도 (그들에게)넘길 수 있다.[8]


문자적으로 잘 드러나듯이 군역토의 상속은 오직 남계로만 가능하도록 규제했는데 이는 중세 초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가 편찬한, 그 유명한 ‘<살리카 법전(Pactus Legis Salicae)>’보다 약 2천 년 이상 앞서는 것이다.

짧게 <살리카 법전>에 대하여 미리 이야기하자면, 이 법전은 게르만 사회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관습법을 성문화한 법전이고 수세기에 걸쳐 개정되고 내려왔다. 그 핵심 내용은 잘 알려져 있듯 ‘여성’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의 토지 상속을 금하는 것이었다. 중세 유럽 국가에서 왕이 개인의 토지의 처분권에 적극 간섭할 수 있었던 가장 크고 주된 이유는, 유럽의 봉건제 국토는 전부 왕의 것이며 그 토지를 분봉[9] 받은 신하들은 군역을 이행해야 한다는 왕토사상, 군역토사상에 기반한 제도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신하들은 일정 지역을 다스리는 봉건 영주가 되어 이에 대한 대가로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군사력을 왕에게 제공하는 평생의 군사적 충성을 바쳐야 했다. 헌데 중세 유럽인들은 군역 이행이 어려운 여성은 군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녀의 아버지인 영주 및 군인이 사망하면 그 땅이 그의 아내 혹은 딸에게 상속되는 것을 상당 수준 제한했다. <함무라비 법전>의 위 두 조항은 <살리카 법전>보다 2천 년 먼저 여성이 군역토를 상속하지 못하도록 막음으로써 군역토사상의 구속력을 높이려는 취지가 담겨 있다.
 

한편 39조에서 문자적으로 확인되듯이 개인의 노력으로 획득한 토지 등의 부동산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자신의 땀과 노력 즉, 노동의 대가는 보장하는 조항이다.

 

이 외에도 군인의 생계나 토지소유권 등을 보장해주기 위한 조항들이 몇 가지 더 있다. 군인이 전쟁 포로가 되었을 때, 그 몸값을 치르는 비용에 있어 그의 자산이 부족하다면 바빌론 당국이나 신전에서 그 비용을 대신 치르게 한 32항, 장교 등 높은 계급의 군인이 하급 군인의 자산을 강제로 취하거나 왕의 하사품을 빼앗으면 사형으로 다스리는 34항, 왕이 군인에게 하사한 가축을 누군가가 매입해도 이를 다시 몰수하는 35항, 토지경작인 및 토지임대인의 신의성실 위반으로 지주가 임대료를 받지 못하게 됐을 경우 이를 훨씬 상회하는 배상을 받도록 보장해주는 62, 63항 등이다. 이 조항들은 군역토제도 및 토지소유권 강화, 그리고 앞서 살펴본 조항들과 그 맥을 같이 하기 때문에 지면상 생략하도록 한다.

 

200: 만일 어떤 사람(awilu)이 자신과 같은 계층의 다른 사람(awilu)의 이를 부러뜨렸다면, 그들은 그의 이를 부러뜨려야 한다.


201: 만일 어떤 사람(awilu)이 평민의 이를 부러뜨렸다면, 그는 은 20세겔을 지불해야 한다.


202: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보다 높은 계층의 이의 뺨을 쳤다면, 그는 공공의회(assembly)에서 황소꼬리 채찍으로 60(대)를 맞아야 한다.[10]


 위에 보듯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의 법칙은 <함무라비 법전>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즉, 만민의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신분 내의 사람들의 평등을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위 조항들을 통해 자유민과 평민은 같은 계급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리와 관점을 가지고 26-41항을 읽으면 자유민 위에 군인 계층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법전은 자유민 지주 및 평민 지주도 가지지 못한 파격적 특권을 군인에게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사실상 하나의 귀족신분임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한 방증으로는 이미 바빌론 초기 왕정시기 말엽부터 권력구조가 합법화 되어갔기 때문에 군인이 그저 민중의 일부가 아니라 특정계층으로 자리 잡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 되겠다.[11] 설령 신분제로서 명백히 분류된 귀족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상위 계층에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필자의 주장에 따라 당시 바빌론의 신분 피라미드를 이해하면 중세 유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왕으로부터 기득권층이 넉넉한 토지를 분봉 받아 군역을 이행했던 중세의 봉건제도는 당시 제정된 그들만의 창조적이고 독립적인 제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즉 인류사 초기문명부터 존재해왔던 토지공개념 및 군역토사상에 뿌리를 둔 제도였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만큼 토지공개념과 군역토사상은 인류사에 상당 수준 보편적이었으며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함무라비 법전>에서 확인해온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선행하는 4개의 법전들이 거의 혹은 전혀 토지소유권이나 지주권을 강화시키지 않은 반면,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양질의 강화가 있었다는 유의미한 비교를 확인하였다. 둘째로 명백하게 강력한 왕토사상과 군역토제도가 있었고 군역토제도를 보완하기 위해 공권력의 간섭 및 지주권의 보장이 있었고 이는 26항, 27항 등을 통하여 확인하였다. 셋째로 군역토사상에 기반하여 바빌론의 군역토제도는 군역을 직접적으로 이행할 수 있도록 남계로 상속되었고 그 의무를 저버린 이에게는 토지를 박탈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구속력을 가졌다. 이는 28항, 30항 등을 통하여 확인하였다. 넷째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중세의 봉건제도는 그 당시 유럽인들이 창조해낸 창의적 산물이 아니라 인류사 초기부터 내려온 토지사상의 파생물 중 하나라는 것, 또한 (군)역토사상은 보편성과 현실성 그리고 구속력을 가진 토지사상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점차 토지사유제도가 고도화되는 것은 멈춰지지 않았다. 기원전 제2천년기 초반에 만들어진 대출 문서가 개인의 저장소에서 수다하게 나왔고 함무라비와 그 이후의 왕들은 여러 차례 빚 탕감 정책을 시행했다는 역사가 그 방증이 된다. 빚이 크더라도 자신 소유로 둔 토지가 있는 자영농층이 두터웠다면 이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 사건은 결국 토지사유제의 고도화와 매매로 인한 부동산양극화 사회에서의 부채탕감 정책은 근본적으로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미봉책에 불과했던 것을 대변해 준다. 특히 군사 엘리트계층은 기원전 1500년이 지나면서 토지사용권을 세습가능하게 만들려고 한 동시에 그 사용료를 군역이나 노동이 아닌 은으로 지불하려 했다는 역사에 주목할 만하다.[12] 이 또한 왕토사상 및 국토사상 성격이 퇴색하기 시작하고 토지를 사실상점유하고 있는 계층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대해지자 그 토지를 더욱 사유화하고 있다는 것과, 자신의 피와 살로 감당해야 하는 군역토사상을 자본으로 대체하기 원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훗날 12세기 영국의 기사들이 군역대납금제도를 이용한 것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바 없지만 그나마 고대 군역토사상의 구속력은 일정 수준 이상 잔존한 것으로 보인다.


<함무라비 법전> 이후의 편찬된 법전 세 가지도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그 중 하나인 <히타이트 법전>은 오래된 자료가 기원전1600년 즈음에 형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13]


히타히트 법전의 일부(https://www.worldhistory.org/image/9172/the-hittite-laws-tablet-from-hattusa/)


총 200개의 조항 중에 훼손된 23개를 제외하고 177개를 살펴보면 노예부터 시작하여 황소, 새, 벽돌, 심지어 이발용 가위까지 갖가지 수다한 재화에 대해 강력하게 소유권을 보장하여 소유주가 받아야할 피해보상액을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명백하게 지주의 토지소유권만을 강화시키는 조항은 단 하나도 없다. 부동산을 언급하는 수십 개의 조항들에서는 오히려 갖가지 위법 행위를 저지른 자가 피해보상을 적절히 하지 못하는 경우 그의 부동산을 저당 잡는다는 조항들이 무려 40개가 넘는다. 명백히 토지에 대한 사소유권을 인정하고 있는 사회이지만 지주의 부동산을 담보 잡히게 하는 처분이 매우 많다는 것에서 철저한 토지공개념에 입각하여 지주에게 큰 책임을 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함무라비 법전>처럼 모종의 봉건제가 있어 왕으로부터 토지를 받은 자는 봉건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므로 이에서 역토사상도 어김없이 확인된다.






References


[1] 김영진, 『율법과 법전』(한들출판사, 2005), 177쪽, 201쪽.

[2] 상게서, 201쪽.

[3] 상게서, 201쪽.

[4] 상게서, 201쪽.

[5] 상게서, 180~181쪽.

[6] 가신(家臣) : 봉신과 비슷한 용어이지만, 주군 및 봉주의 저택 등에 머물러 살며 그를 섬기는 신하라는 의미가 강하다.

[7] 김영진, 전게서, 202~203쪽.

[8] 상게서, 202쪽.

[9] 분봉 : 봉건제도에 근거하여 왕으로부터 신하가 토지를 하사 받는 것을 의미함. 신하는 그 대가로 군역 등의 충성을 바쳐야 했다.

[10] 김영진, 전게서, 223쪽.

[11] Van De Mieroop/김구원 옮김, 『고대 근동 역사』 (CLC, 2010), 103쪽.

[12] 상게서, 221쪽.

[13] 채홍식, 『고대 근동 법전과 구약성경의 법』(한님성서연구소, 2008), 152쪽.

작가의 이전글 21세기 귀족(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