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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Dec 13. 2021

21세기 귀족(28)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3세기. 부동산 없는 자는 곧 농노다)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28) :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3세기. 부동산 없는 자는 곧 농노다) - 


3세기

212년, 카라칼라 황제(21대 황제. 재위 211~217)의 안토니우스칙령으로 제국 내의 모든 자유인이 시민권을 얻었는데, 시간이 흘러 이렇게 이탈리아와 정복민 간의 경계가 계속 점차 희미해져 가자 극빈한 지주들을 포함하여 모든 지주들에게 과세하게 되었다. 더 악화되는 인플레이션과 더불어 3세기 중반부터 게르만족의 침입이 본격화되기도 했기 때문에 조그만 땅뙈기를 가진 영세한 인민들의 짐은 더 무거워졌다.


로마 카라칼라 황제의 대리석 흉상(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Version 1.2.)


더불어 3세기는 법적으로만 지주와 자유민 계급의 소작인의 지위가 동등할 뿐, 사실상 ‘예속농(콜로누스, colonus)’ 계층이 본격적으로 두터워지기 시작하는 사회가 도래할 것을 알리는 시기이기도 했다.[1] 그 이전까지의 소작인은 타인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토지 임대의 대가로 지대를 지주에게 지급해 주는, 동등한 계약관계에 있었으나 이제 토지 없는 소작인은 경제적으로 지주에게 예속되는 예속농이 되어갔다. 또 3세기에 게르만족과 같은 외적의 침입과 그들이 가져온 역병으로 인해 인구의 1/3이 줄어드는 상황에 직면하여 지주는 더욱이 소작인을 예속농으로 만들어 자신에게 종속시키고자 했다. 


갈로-로마(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의 농부를 묘사한 고대 부조(photo : Diebuche)


그러한 악독한 노력의 목적은 그들의 결혼과 출산 이후에도 그 자식이 지속적으로 자신 지주들의 토지를 떠나지 않고 경작시켜 세대를 거듭하여 오랫동안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것에 있었다. 또한 로마의 정복전쟁이 끝나 외부로부터의 노예 공급이 확연히 줄기도 하여서, 지주들은 소작인들이 스스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으므로써 노동력을 자신들에게 끊임없이 재생산해주길 원하는 욕구도 작용했다. 그런 예속농들 중에 일부는 본래 노예출신으로서 외거화를 통해 반자유를 얻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제도로 굳어져가 예속제(colonatus)가 되었고, 이는 중세 유럽의 농노제(serf system)의 기원이 되었다.  


다만 당시의 문헌사료들은 콜로누스라는 단어를 농부, 소작인, 식민지 정착민 등을 지칭하는 광의의 단어로 쓰며 꼭 인신이 지주에게 구속된 예속농을 의미하지는 않았다.[2] 허나 본서에서는 편의상 협의의 콜로누스 즉 토지가 없어 빈곤하여, 지주의 소작인으로서 그에게 종속된 예속농을 지칭하도록 하겠다. 이렇게 대토지소유제, 소작인에게의 토지 할당과 예농화, 노예의 외거화와 예농화 이 세 가지 요소가 로마 사회를 농노제의 사회로 이행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3]


계속 벌어지는 경제사회적 격차로 인해 소작농 등의 빈곤계층은 대지주의 토지를 임대하여 소작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고착화 되었고, 이는 인간이 타인에 대한 점유가 법적인 효력을 갖춘 소유권을 탄생시켰다.[4] 기원전 1세기 전부터 로마인들이 노예를 사실상 자신의 재산으로 여겼음을 고려하면,[5] 이와 같은 예속관계가 생긴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살펴보았듯이 법제정이나 폐지를 통해 기득권이 이권을 취하고 보호하는 것이 팽배했던 로마 사회에서는 인간(예속농)에 대한 인간(지주)의 권리가 소유권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으로 고도화 되었고[6] 예속소작제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권리는 전적으로 로마적 토지사상으로부터 나왔다.


이렇게 로마사회는 점차 ‘노예제 라티푼디움’에서 ‘예속제 라티푼디움’으로 옮겨갔다. 토지 없는 소작인들은 사실상 반노예 즉 농노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과거의 소작농 생활보다 생계유지가 힘든 것은 물론이었다. 더군다나 제정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인플레이션은 269년에 6데나리우스였던 밀의 가격이 42년이 지나면서 가격이 55배 올라 330데나리우스에 달할 정도였으니 민중은 여러모로 더욱 고통 받았다.[7]


284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년)가 43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로마는 절대군주정이자 제정 후기에 진입했다. 291년에 그레고리우스 법전(Codex Gregorianus)이 편찬되었는데 이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공포된 칙령을 모은 것이다. 293~294년에는 헤르모게니아누스 법전(Codex Hermogenianus)이 편찬되었는데 이는 전자의 증보이자 일종의 헌법 발췌록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두 법전 대부분 내려오지 않는다. 허나 439년의 <테오도시우스 법전>이 이 둘을 포함하여 31년부터의 모든 황제의 칙령과 기록 등을 법 조항으로 만들었고, 이 법전을 바탕으로 편찬된 것이 6세기의 유제의 법전이므로 그 법전에서 당시 로마인들의 토지사상과 토지법제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대리석 흉상(photo : Jebulon.)


한편으론 그의 재위에 토지제도는 지주귀족들에게 더욱 유리하게 형성되었는데, 디오클라티아누스 황제가 실시했던 세제개혁과 원적법(原籍法)[8]의 반포로 인하여 이미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던 예속민들의 토지결박이 합법화⋅제도화된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표면적 목표는 세수의 증대였지만 그 근간 원인은 지주층의 요구였으니, 지주와 정치가 각자의 요구가 서로 정확히 맞아 떨어진 것이었으며 동시에 예속인의 지위가 혈통으로 세습되어 사실상 예속소작제가 시작되었다.[9]


 게다가 토지 위의 예속민들이 그 토지를 떠날 수 없으니 예속민들이 토지와 하나로 묶여 매매 되었으며 이는 중세까지 이어지게 된다. 2~1천 년 전의 이러한 비인격적인 현상은 오늘날 부동산 특히 건물을 매매할 때 그 매매 가격이 해당 건물의 임차인들로부터 걷히는 임대료까지 고려되어 매매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로써 땅 없는 민중은 이제 자유도 없었다. 소지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차악(次惡)을 선택하여 자신들의 토지를 바치며 대지주의 아래로 들어가 어느 정도 경제적 보호를 받으려 했다. 이런 관계를 게르만이 계승하여 훗날 중세시대 유럽의 장원제로 발달시켰다.[10] 이런 사회상은 예속농 계층을 노예로 취급해도 될 만큼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낮아졌다는 것과(소작농→예속농→농노) 그들의 신분상승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대변해준다. 


당연히 토지 없는 예속민들이 예속농 생활을 통해 토지를 구입할 만한 자본을 축적하여 토지보유자가 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고 충분히 짐작된다. 과거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채무을 갚지 못하면 채권자의 노예 생활을 하지만, 법적 노예계층보다는 명백하게 구별된 지위를 유지했었다는 점과 기간부 노예 생활이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11] 그리스 문명도 대략 그와 같았다. 


허나 그에 비교하면 이 시대의 부동산 양극화는 로마의 극빈자를 경제적 파산에서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고 이윽고 농노가 되게 했다. 게다가 이러한 양극화는 그대로 자식들에게 세습되어 그 고리를 끊을 수 없었다. 살펴보았듯 정기적으로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 직업군인이 되었을지라도 가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자연스레 제국 말기로 갈수록 자유농민은 드물어졌다. 그마저도 가혹한 세수 때문에 토지를 버리고 도망쳐서 지방의 대지주 세력가 밑으로 자발적 종속을 요청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을 정도였다.[12]


당시의 로마 시민권과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이제 가난한 인민들에게 남은 권리란 아무것도 없다.



지주들에게 종속되어 마치 노예처럼 자유도 상실했다. 로마 제국에서 토지 없는 빈자는 비참하고 참혹한 삶을 살았다는 것 이외에 더 자세한 설명은 불필요할 것이다. 국가는 진보(progress)해가지만 내부의 빈곤(poverty)은 극심해져만 갔다.  


한편 그 지주귀족들은 농촌에 위치한 자신의 빌라를 요새화시켰다. 헌데 이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외적의 침입을 막아 사유재산을 스스로 보호하는 본래의 기능을 훨씬 넘어서, 중앙정부의 재정적⋅사법적 공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세금을 대신 징수하고 자치행정을 하기까지 이렀다.[13] 지주권의 고도화는 그렇게 변질되어 갔고, 이 또한 훗날의 중세 유럽이 본받았다.





이번 글에서는 3세기의 로마를 살펴보았다.


(1) 부동산 없는 자들은, 부동산을 가진 자들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갔다. 과거엔 동등한 위치의 '임차인-임대인' 관계였지만, 이젠 '농노-지주' 관계로 변질되어갔다. 


(2) 이러한 현상은 로마를 '예속소작제' 사회로 이끌었으며, 부동산 없는 자들의 자손들도 부동산 소유주들의 경제적 농노가 되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계층은 세습되어갔다.


오늘날, 부동산으로 경제적 계층이 나뉘고 자녀들도 이를 답습하는 21세기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무엇인가? 



References 

[1] 김진경, 김봉철, 최자영, 백경옥, 송문현, 오흥식, 차전환, 김경현, 신미숙, 최혜영,『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2008), 355~356쪽.

[2] 임웅, “문헌사료를 통해서 본 로마의 colonus”,「사총」55(2002)

[3] 이기영, 『고대에서 봉건사회로의 이행』(사회평론아카데미, 2017), 212~213쪽.

[4] 최병조, 『로마法硏究(1)』(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122쪽.

[5] 차영길, “로마 노예의 PECULIUM에 관한 연구”, 「서양사론」(1993).

[6] 최병조, 전게서, 122쪽.

[7] 김진경 외, 전게서, 375쪽.

[8] 원적법 : 농민의 자유로운 이주를 규제한 법이며 훗날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에 예속농을 대상으로도 재차 공포되었다.

[9] 임웅, 상게서, 138쪽.

[10] 이태재, 『서양법제사개설』(진명문화사, 1989), 145쪽.

[11] Robert C. Ellickson & Charles D. Thorland, “Ancient Land Law: Mesopotamia, Egypt, Israel”, 71 Chi.-Kent L. Rev. 321 (1995), p. 394.

[12] Patric J. Geary/이종경 옮김, 『메로빙거의 세계』(지식의 풍경, 2002), 61~63쪽.

[13] Koebner Richard, 1996, “The Settlement and Colonization of Europe,” in CEHE, Volume1, p25; Powelson/정희남 옮김, 『세계토지사』(한국경제신문사, 1998), 93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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