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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Dec 11. 2021

21세기 귀족(27)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2세기. 부동산이 그 위의 모든 것을 갖는다)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27) :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부동산이 그 위의 모든 것을 갖는다)- 


2세기


5현제 중에 두 번째에 위치했던 트리야누스 황제(재위 98~117)가 원로원 의원직 입후보자들에게 재산의 1/3을 이탈리아 부동산에 투자해야 함을 의무화시켰다. 이는 토지 재산을 넉넉히 가진 자들만이 온전한 시민으로서, 최상위 권력의 자리에 앉아 정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다는 로마적 사고방식을 황제가 나서서 재확인하고 공식적으로 제도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영국 박물관이 소장 중인 '트리야누스 황제 대리석 흉상'(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Trajan.)


이는 500유게라 제한이 유명무실해진 2세기의 로마 사회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자 ‘토지를 가진 사람만이, 정치에 적극 참여할 경제력을 갖춘 참된 로마인이다’라는 로마적 사상이 재차 드러나는 사건이기도 하다. 정치권을 완전히 휘어잡았다고 해서 그만큼 경제권에 대한 욕심이 줄어든 것도 아니었다. 국유지를 임대한 빈민들보다 더 높은 지대를 내는 방법으로 그들을 몰아내고 해당 국유지를 임차했는데, 그마저도 후에는 공공연하게 자신의 명의로 토지를 점유했다.[1] 명백히 지주권의 폭거였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정부의 세입 측면에서는 국토의 경제적, 효율적 이용이었을 것이나 장기적으로는 중산층이 얇아져 국가 세입과 경제를 더 악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트리야누스 황제의 후임이자 5현제 중에 가운데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치세 117~138년)는 131년에 『로마법대전』을 공포한다. 안타깝게도 내려오는 사료는 없지만, 5세기 <테오도시우스 법전>과 본서에서 자세히 알아볼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이하 유제)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으므로 유제의 법전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미국 워싱턴 D.C 하원 홀에 위치한 '가이우스 대리석 조각'(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Gaius.)


161년경에는 법학자이자 법학교사였던 가이우스(180?~130?)가 사적인 차원에서 편찬한 법전, <법학제요(Institutiones)>가 있으며 이는 토지법제사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 법전은 <12표법>은 물론, 당대 저명한 법학자들의 논문과 여러 황제들의 칙령 등을 모두 총괄하여 정리한 사찬(私撰) 법전이었지만 후대에는 교과서격으로 인정받았다. 후술될 유제의 법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후에 395년에 제국이 완전히 둘로 분할된 이후에도 동로마에서는 법적 권위가 유지되었을 정도다. 


로마 이외의 국가 및 지역에 사법, 민사, 소송 등에 다소간의 영향을 주었기도 하다. 법학제요에서 토지 관련 법, 지주의 권리를 보장 및 확대하는 법, 당대 토지사상 등을 짐작하게 하는 법, 등 주목할 만한 법들은 아래와 같다.[2] [괄호 안의 말]은 필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임의로 삽입한 것이다.


제 1권의 121. 토지의 악취행위[握取行爲. 손으로 쥐는 행위를 말하며 재산을 처분할 때 행했다]와 다른 물건의 악취행위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만 각기 다르다. 노예 및 자유인, 그리고 소유권에 따르는 동물은 그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악취행위에 의하여 매각할 수 없다. 소유권에 의하여 당연히 받게 되어 있는 사람이 소유권에 의하여 주게 되어 있는 물건 자체를 확실하게 움켜잡고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악취행위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토지는 당사자가 그 토지에 없더라도 악취행위에 의하여 매각되는 것이 관례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동산과 부동산의 구별이 있었던 시대와 그 기준과는 달리 로마인은 수중물(토지, 노예, 가축), 비수중물(수중물 외)로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언급했듯이 로마법에서는 게르만인이나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동산, 부동산의 구분과 기준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3]


따라서 위 법은 로마인들이 동산과 부동산의 경계가 뚜렷이 누지 않아, 토지가 가지는 고유한 특성인 희소성, 필수성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제 2권의 71. 따라서 물 흐름이 상대방 토지의 일부를 무너뜨려, 어느 개인의 토지로 옮겨온 경우 그 부분은 그대로 상대방[옮겨 받은 사람]의 것이다.


제 2권의 72. 그렇지만 만일 강(江) 중앙부에서 섬이 생긴 경우에 이것은 강 양 쪽으로 강변에 접하여 토지를 점유하는 모든 사람의 공유이다. 이에 대하여 강의 중앙부에 생기지 않은 경우, 가장 가까운 부분에서 강변에 접하여 토지를 가진 사람에게 귀속한다.


누군가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토지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토지라면, 그 땅은 국유지가 아니라 그 새롭게 생겨난 토지에 가장 가까운 토지의 소유자에게 귀속시킨다는 점에서 토지공개념의 부재가 확인된다. 또한 토지의 취득의 근거를 국가 및 공동체에 두지 않고 개인의 의식적인 활동인 점유에 두고 있음이 확인된다.


제 2권의 73. 여기서 다시 어느 사람이 여러 사람의 토지에 건축한 물건은 그 사람이 자신의 명의로 건축하였다 하더라도 자연법(自然法)에 의해 여러 사람의 것으로 된다. 왜냐하면 지상물(地上物)은 토지에 따르기 때문이다(Quia superficies solo cedit).


제 2권의 74. 이러한 것은 어느 사람이 여러 사람의 토지에 묘목을 심어 그것이 뿌리내린 경우에도 자주 발생한다.


제 2권의 75. 어느 사람이 여러 사람의 토지에 씨앗을 뿌린 곡물에 관해서도 동일한 일이 발생한다.


제 2권의 76. 그렇지만 우리[선의로 건축, 수목, 농사 등의 행위를 사람]가 토지 또는 건물을 이 사람[지주]에게 청구하는데 건물, 묘목의 식수 또는 파종에 들어간 비용을 돌려주는 것조차 그[지주]가 바라지 않는 경우에는, 그 사람[지주]이 적어도 선의의 점유자인 한, 우리[선의로 건축, 수목, 농사 등의 행위를 사람]를 악의의 항변(excepcio doli)으로 배척할 수 있다.


위 4개의 조항을 간단히 말하자면, "네가 남의 땅에다가 건축물을 짓거나 식물을 심으면 그 땅 주인의 것이 된다. 그 땅 주인이 악의를 가지고 모른체 한 것도 아니었다면, 그는 건축 비용이나 파종 비용도 너에게 줄 필요로 없다"가 되겠다. 결국 위 법은 앞서 살펴보았던 <12표법> 중 제 6표의 8 중에 “가옥이나 포도원에 接合[접합]된 木材[목재]는 支持[지지]하고 있는 한, 이것을 분리 하지 못한다. 12表法[표법]은, 竊取[절취]된 木材[목재]가 건물이나 포도원에 接合[접합]된 경우 그것을 분리하는 것도, 所有物返還請求[소유물반환청구]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4]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조항이다. 


따라서 동일하게 ‘건물과 수목 등이 토지에 접합되면 토지의 구성부분이 된다’라는 로마적 토지사상이 엿보인다. 심지어 결실이나 수확 때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동력이 투입되는 곡식까지 포함하여 지주의 소유로 귀속시키고 있다. 이는 로마의 소유권자주의(所有權者主義, Substantialprinzip) 즉, 재산 및 소유권의 획득과 행사의 근거를 노동력의 투자보다 재산에서 더 우선적으로 찾았던 사고방식[5] 때문이다. 즉 로마인들은 ‘노동 < 토지 재산’이라는 부등식 관계가 자신들의 토지사상에 자리잡은 사람들이었다. 


이 때문에 노동력을 투입한 사람이 주장할 수 있는 권리 등 그 어떤 권리보다 지주권이 우위에 있던 것이다. 이러한 근거를 자연법에 찾고 있다는 점 또한 73항에서 재확인된다. 한편 건축 등의 불로소득을 취득하게 된 지주에게 악의의 항변*도 인정한다는 점에서 강력한 지주권이 확인된다. 특히 ‘지상물은 토지에 따른다(superficies solo cedit)’라는 토지 및 지주 중심의 토지사상은 게르만족이 계승하여 약 2천년이 지난 현대 독일 민법 94조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토지에 접합된 모든 것이 토지의 구성부분이 되는 것도, 지주의 완전한 단독적 소유물이 되는 것도 아니며 식재, 기타 건축물 등에 한정되어 있었다.[6]


이상 법학제요를 토지법제사적으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첫째로 로마인들은 물건을 동산과 부동산으로 구분하지 않고 수중물과 비수중물로 구분하여 토지가 가지는 고유한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법사상과 법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제 1권의 121항에서 확인하였다. 둘째로 토지나 그 주변에 생긴 모종의 이익은 국고로 속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 땅의 지주가 불로소득으로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옛적 토지공개념이 상당히 퇴색되었고 반대로 토지사유사상은 압도적이었다. 이는 제 2권의 72항에서 확인하였다. 마지막 셋째로 로마적 토지사상은 노동을 투입한 동산에 대한 권리보다 지주권을, 즉 노동보다 토지 재산을 우위에 두었다. 이는 제 2권의 76항에서 확인하였다.


한편으로는 노예들은 두 세기 전의 스파르타쿠스의 난과 같은 대대적 반란 수준은 아니지만 도망, 사보타주, 주인살해 등의 방식으로 계급투쟁을 지속하여 점차 노예주들이 노예의 외거화(外居化)를 선호하게 되었다.[7] 이는 머잖아 로마가 노예제 사회에서 농노제 사회로 변화하는 촉진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로마 2세기, 끝없이 신장되는 부동산권의 폭거와 그 당시 편찬된 <법학제요>를 살펴보았다.


(1) 백년 전의 국가 원수들은 그나마 자신의 권력을 유지 및 강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옛날의 올바르고 평등한 토지사상과 제도를 부활시키려고 했었다. 허나 이 시기부터의 국가 원수(황제)들에겐 그럴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오늘날과 다를 바 무엇인가?


(2) <법학제요>는 1900년 전 법전이지만, 부동산에 관련한 핵심 내용은 현대 법전들과 완전히 동일하다. "부동산 소유자는 자신의 토지 위에서 발생하는 모든 이익을 배타적/절대적/독점적으로 취할 수 있으며, 타인의 노동으로 생겨난 이익일지라도 자신의 부동산에서 발생했다면 가질 수 있다"



다음으로 로마 3세기를 살펴보자.


References


[1] Plutarch, Tiberius Gracchus, VⅢ, 1; 김진경, 김봉철, 최자영, 백경옥, 송문현, 오흥식, 차전환, 김경현, 신미숙, 최혜영,『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2008), 443~444쪽에서 재인용.

[2] Gaius/정동호 외 옮김, 『법학제요』(세창출판사, 2017).

[3] 황적인,『로마法‧西洋法制史』(박영사, 1981), 177쪽.

[4] 최병조, 『로마法硏究(1)』(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5] 현승종, 『게르만법』(박영사, 2001), 36쪽.

[6] Biermann, Superficies solo cedit, Jherrings-Jahbuch, Bd.34(1895), 181; 이상태, “로마法에 있어서의 土地⋅建物 간의 法的 構成”, 『일감법학」 (2009), 485~486쪽에서 재인용.

[7] E. M. Chtaerman, “La chute du régime esclavagite”, pp. 132, 139~141; 이기영, 『고대에서 봉건사회로의 이행』(사회평론아카데미, 2017), 200~201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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