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영철 Dec 27. 2021

21세기 귀족(33)

중세 유럽의 토지사상(5~6세기. i)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33) : 중세 유럽의 토지사상(5~6세기. i) -


5세기

왕토사상으로 토지에 대한 권리를 얻은 게르만 왕들은 상고시대처럼 자신에게 충성하고 전쟁의 공을 세운 군사 및 신하에게 토지를 하사하는 은급제도(恩給制度. 은대지제도라고도 함. 원어는 beneficium)를 실시하였다. 교회 또한 이 제도의 수혜자로서 종교적 봉사를 대가로 왕으로부터 토지를 받아 5세기부터 대지주가 되어 땅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 제도 또한 로마가 제정 말기에 국경을 지키는 게르만 용병에게 토지수여(beneficia)를 했던 로마 제도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왕토사상에 기초한 제도이기에 수혜자에게 절대적⋅항구적 소유권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고 원칙적으로는 그가 사망하거나 그 은혜를 잊으면 즉, 왕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면 환수권(Heimfallsrecht. 물건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권리)을 행사하는 등의 조건부 토지 하사였다. 언급했듯 이는 곧 중세 봉건제의 시발점이었다. 이처럼 전적으로 왕토사상에 기반을 둔 제도였고 그렇게 토지를 얻은 자는 그 대가로 군역이라는 무거운 짐을 져야 했다.


한편 본래 농지는 일반적으로 마을 단위로 점유되어 경작이 이루어지고 토지에 대해 인정된 권리는 수익권, 점유권, 사용권 등이었으나, 일부분 가옥과 그 주변 땅에 대해서는 점차 사소유권이 인정되기 시작했다.[1]



6세기

라틴어를 배우고 교회나 수도원 등의 기독교 기관을 통해 법제 등의 로마의 지식체계를 전해 받은 이들은, 법제정 절차를 통한 것은 아니지만 전해 내려오는 자신들의 관습법을 성문화하여 법전으로 편찬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508~511년경 프랑크왕국의 클로드비히왕은 거의 사망 직전에 법전 편찬 사업을 완료하여 <살리카 법전(Pactus Legis Salicae)>을 만들었다. 편찬 이후 해당 6세기 동안 후대 왕들로 인해 개정이 있었고 본서에서는 이를 포함하여 확인해보도록 한다.[2] {괄호 안의 말}은 필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임의로 삽입한 것이다.


살리카법전의 일부.(Unknown author - Archives nationales.)


27조

각종 절도에 관하여

15. 타인의 토지에 심겨진 나무를 벤 자는, 2000데나리(즉, 30솔리디)를 배상해야 한다[추가적으로 나무의 가치와 그것을 사용하지 못한 시간에 대해서도 배상한다].


25. 타인의 숲에서 나무를 훔친 자는, 3솔리디를 배상해야한다[추가적으로 나무를 돌려주거나 그것을 사용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배상을 한다].


26. 벌목하겠다는 표시가 된 {타인의} 나무를 그 다음 해에 취한 자는 책임질 것이 없다. 만약 {벌목하겠다는 표시가 되었음에도 타인의 나무를} 그 해에 취했다면, 그는 3솔리디를 배상해야 한다[추가적으로 나무의 가치와 그것을 사용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배상을 한다].


27조 15과 16항에 규정한 배상액이 10배 차이가 나는 점에 주목하라. 그 큰 차이는 15조에서의 나무는 토지의 주인이 노동력을 투입하여 심고 가꾼 나무이고, 16조에서의 나무는 노동력을 투입하지 않은 숲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나무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노동 투입의 여부로 인해 양자의 가치 평가의 격차가 매우 크다는 점에서 재산보다 노동을 중요시 여기는 게르만적 사상이 엿보인다.


26조에서는 토지공개념이 확인된다. 왜냐하면, 만약 이들에 절대적 사유권이 법적으로 보장되는 사회라면 소유주가 벌목 표시를 할 필요가 없으며 표시를 해야 한다고 해도 벌목 시기를 자의로 결정할 권리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누군가의 노동력이 투입되어 자라난 나무라면 벌목 표시를 한 후 1년이 지나도, 타인이 이를 취했을 경우 15항에 의해 배상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공적 재산으로 취급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26항은 노동력을 투입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생성된 숲과 그 나무들은 지주가 그 지대를 모두 독점할 수 없도록 하고 그 외 공동체원들도 일부 향유할 수 있도록 규제하는 조항이다.


54조

법원 출석을 거부하는 사람에 관하여

6. {법원 출석을 거부하는}피고인과 그의 모든 재산은 국가 혹은 국가가 그 재산을 맡긴 자에게 속하게 된다.(하략)


위 조항은 법망을 피해갈 수 있는 여지가 크다. 왜냐하면 피고인의 동산은 은닉이 가능하고 또 그의 가족이 피고인의 동산을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 법의 목적물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따라서 위 법의 목적물은 사실상, 절대 숨길 수 없고 소비할 수도 없는 토지다. 공동체에 해악을 끼친 자는 동산에 대한 소유권이 아니라 토지에 대한 소유권만을 박탈하여 국고로 환수한다는 점에서 토지공개념이 엿보인다.


59조

자유지에 관하여

6. 허나 살리카인의 토지는, 여성에게 상속될 수 없으며 모든 살리카인의 토지는 남성에게 속한다.


59조는 토지 이외에 다른 재산에 대해서는 여성의 상속을 막지 않지만 6항에서는 명백히 군역토사상이 확인된다.


킬페르크왕을 묘사한 그림(https://www.gettyimages.no/photos/chilperic-i.)


4번째 법령

킬페리크 1세[3]의 평화 법령

108조

이와 같이 만약 남성이 이웃을 두고 있는데 그가 사망한 이후에 아들들과 딸들이 생존해 있다면, 아들들이 있는 한, 살리카법에 따라 그 아들들이 토지를 상속하는 것이 옳다고 인정된다. 만약 아들들이 사망한 상태라면, 아들들이 생존해 있을 경우 그들이 상속받는 경우와 같이 딸이 토지를 상속받는다. 허나 만약 딸이 사망하고 형제가 살아있다면, 이웃들이 아닌 그 형제가 토지를 취한다. 그리고 만약 그 형제가 사망하였고 그 외 다른 형제가 없다면, 자매가 그 토지 재산을 상속한다.


킬페르크 1세가 570년경 즈음에 공포한 위 법령으로, 토지를 상속받을 남성이 없다는 전제 하에 여성의 토지 상속 및 소유에 대한 권리가 보장되었다. 이로써 군역토사상의 퇴색이 확인된다.


109조

배수로와 개인들의 토지에 관하여서는, 그 재산들을 상속받는 자는 우리 아버지들이 그 재산들에 대해 가졌던 관습을 지켜야 한다.


위 법은 게르만 선조들이 부동산에 대해 가지고 있던 토지공개념적, 관습적 의무의 준수를 요구하는 법이다. 왜냐면 법에서 말하는 관습(custom)이 단지 위 부동산의 소유주의 사익을 위한 관습이었다면 당시의 게르만적 토지사상으로는 위 법이 규정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배수로는 다른 부동산에 비해 해당 지주가 주변 다른 지주에게 재산적 피해를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해당 지주가 노동력 및 비용을 들여야 하는 설치물이기에 지주에게 모종의 부담을 준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던 원시적 게르만족의 법언 중 하나인 「제방을 쌓지 않는 자는 그 토지를 떠나야 한다」[4]와 거의 맥을 같이 하며 토지공개념이 확인된다.


이상으로 6세기의 <살리카 법전>을 토지법제사적으로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로 로마와는 달리 재산보다 노동에 명백한 우위를 두고 있었고 이는 27조의 15항, 16항에서 확인하였다.


둘째로 토지공개념에 입각하여 지주가 해당 토지의 모든 지대를 독점하지 않고 공동체가 그 일부를 향유하도록 규정하였음을 27조 26항에서 확인하였다.


셋째로 공익에 해를 끼친 범법자의 토지소유권을 박탈한다는 점에서도 토지공개념이 확인되었으며 이는 54조 6항에서 확인하였다.


넷째로 군역을 이행하지 않는 여성에게 토지 소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초기 <살리카 법전>의 59조 6항에서 뚜렷한 군역토사상을 확인하였다. 허나 약 반세기 후에 킬페르크 왕의 법령 108조에서 여성에게도 제한적으로나마 토지소유권이 보장되어 군역토사상이 일부 퇴색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다섯째로 그의 법령 109조에서 지주가 해당 토지를 잘 관리하여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규정하였다는 점에서는 여전한 토지공개념이 확인된다. 전체적으로, 위 도식으로 살펴본 원시적 게르만적 토지사상은 ‘아직까진’ 거의 모든 부분에서 잘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었다. 겉모습은 로마를 닮아갔으나 사상과 정신은 여전히 게르만이었던 것이다.[5] 다만 왕정 국가이기에 대부분의 자유인이 실효있는 참정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이번 글에서는 5~6세기 유럽의 토지사상(i)을 확인해보았다.


(1) 부동산 주인이 그 토지 위에서 나오는 모든 이익을 독점하지 못하며, 그 이웃들과 함께 향유하도록 강제한 법들을 확인하였다.


(2) 부동산을 가진 자는 공무에 가담해야 하고, 공무를 가담하는 자만이 부동산을 가질 수 있다라는 사고방식은 여전했다. 허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러한 사상이 퇴색돼가고 있었다.


게르만인의 평등하고 정의로운 토지사상은 5~6세기까진 아직 완전히 로마화되지 않았다. 과도기 중 초기에 해당한다. 허나 점차 변질될 것이며, 이어지는 내용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References

[1] 김세신, 『서양법제사론』(법문사, 1990), 229쪽.

[2] Katherine Ficher Drew, The Laws of the Salian Franks,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1.

[3] 킬페리크 1세 : 재위 561~584년의 프랑크왕국의 왕. 아버지 클로타르 1세가 561년에 사망하자 다른 이복 형제들 3명과 프랑크 왕국을 4분할하여 그 중 하나인 수아송왕국을 다스렸다.

[4] 현승종, 『게르만법』(박영사, 2001), 37쪽.

[5] Stubbs, THE CONSTITUTIONAL HISTORY OF ENGLAND, p. 8.


작가의 이전글 21세기 귀족(3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