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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Jan 09. 2022

21세기 귀족(36)

중세 유럽의 토지사상(7세기. i)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37) : 중세 유럽의 토지사상(7세기. i) -


7세기  

영주 및 대지주들은, 성직자들이 공권면제특권을 받아 중앙 정부의 간섭과 부담에서 벗어난 덕에 배가 불러오는 것을 가만히 볼 만큼의 인내심이 없었다. 그들도 7세기 초를 지나면서 그 공권면제특권을 장원에도 허락해달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중세 유럽에서 교회에게 면세 및 면제 특권을 최초로 부여한 것으로 확인되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511년에 프랑크 왕국 오를레앙 공의회 결의 제 5조인데, 단 한 세기만에 세속의 영주들도 이에 대한 욕망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7세기에 건축된 'Santa Comba' 교회. 현재 스페인에 위치(Andrea García.)


그들은 머지 않은 시기에 면세특권을 획득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특권을 당연시 여기게 될 것이었다. 훗날엔 훨씬 더 나아가 왕의 직할 신하가 공무를 집행하러 오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토지점유에 따르는 왕의 지시 및 부역도 이행하지 않을 정도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중앙 정부에 의한 용의자 및 범죄자에 대한 체포조차 그 땅의 지주의 허가가 있어야 체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면세특권은 후에 지방분권 난립 야기뿐만 아니라 ‘토지 소유는 의무를 수반한다는’ 전통적인 토지사상도 아주 크게 퇴색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세금뿐만 아니라 공권력 전반에서 벗어나게 될 정도로 지주권이 강력해질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토지 소유가 국가의 간섭 등으로부터 벗어나 지주들의 지주권이 모든 측면에서 지나치게 강화되자 이에 가장 신음한 계층은 인민 계층이었다. 민중의 경제사회적 생활을 구속하고 신음하게 하는 지주권은 주로 금제권[1]이었다. 금제권이란 영주가 장민들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물레방아, 방앗간 등)의 제작과 사용을 금하며 강제적으로 영주의 생산수단을 장민들이 이용료를 내고 사용하도록 하는 권리로써, 이를 통해 영주는 독점적 이익을 취했다.


7세기 후반에 교회에서부터 이렇게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한 사법권 및 재판권의 행사는, 계속 강화되던 공권면제권, 그 뒤를 이어 성립된 경찰권(이른바 치안권), 그 뒤를 이어 성립된 것들이었다.[2] 토지를 가진 자가 토지 없는 자를 법으로 구속하고 심판하는 권력까지 갖게 된 것이다. 그 재판권은 징병권과 더불어 성직자와 고위 관리가 인민들의 토지와 동산을 합법적으로 빼앗는 수단으로도 악용되었으며 많은 사료들이 이를 증명하며, 언급했듯 게르만인이 로마가 학자나 황제영지의 인민들에게 세금 등의 부담을 면제 및 경감해주었던 것을 보고 배워서 만들었던 공권면제권에서 파생된 것들이다.[3]


 오남용되는 재판권으로 얻는 벌, 재판비용, 재산몰수권 자체가 영주에게 상당한 경제적 이익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으니, 재판권(justicia)이란 단어가 영주권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했다는 것은[4] 오히려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지주들은 자신들의 거대한 토지 내에서 이러한 지주권과 제도를 총망라하여 장원법으로 정리했으며 그만큼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지방분권이 되어갔다. 군주는 7세기부터 이렇게 독립적인 소왕국으로 발돋움하려고 난립하는 영주들의, 하루가 멀다하고 달라지는 충성심이라도 받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위와 같은 권리들을 부여했던 것이었다.[5] 그만큼 더욱 토지 없는 자들은 자신이 거주하고 일하는 지역의 영주 등의 대지주들에게 예속되었다.


이 모든 권리들과 현상들이 7세기에 모두 자리잡은 것도 아니며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달랐고 전 유럽에 걸쳐 일반적인 현상도 아니었으나, 대략 도식화한다면 아래와 같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역사가 아니다. 지난 2020년 9월에 영국 모 언론사가 낸 흥미로운 기사가 위 같은 역사의 현대적 구현이라 주목할 만하다. 기사의 대략적 내용은 ‘영국 왕가의 찰스 왕세자가 소유한 주택 지구에서는 주택 외부에 빨래줄, 수신용 접시 안테나, 태양전지판 등의 설치가 금지되며, 고주망태 행위와 이웃 간의 다툼도 금하며, 주택은 반드시 웨스트 컨트리 채석장에서 생산되는 벽돌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등의 16가지 규정이 있다’이다.[6] 예나 지금이나 지주들은 자신의 토지 위에서 거주하거나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에 간섭하며 지주권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영국은 여전히 법적으로 명백한 지주귀족층이 존속하는 국가로써, 자신들의 부동산을 통하여 임대인들의 생계를 자신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위와 같이 엽기적이고 구시대적인 간섭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간섭은 철저히 법의 보장을 받는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이로써 우리 인류사에 본격적으로 토지의 사적 소유자들이, 그 토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과 그 토지 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을 마음껏 통제하기 시작한 시기가 도래했다. 이 즈음하여 자리잡은 봉건제와 그 봉건제에서 비롯된 영주의 독립적 재판권사적 재판권은 그 영지에 거주하는 인민들을 자신의 발 아래 종속시키는 도구가 되었다.[7] 


교회마저도 자신들의 땅 위에 독립적 통치를 할 정도였는데, 고위 성직자 대부분이 8세기까지도 로마식 이름을 가진 귀족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8] 그들을 당시에 로마 토지제도와 예속제의 후손들이자 산 증인들이라고 보아도 손색없을 듯 싶다. 그들의 힘과 위와 같은 권리는 농노를 노예처럼 부려먹을 수 있게 하였는데, 이 시기와 7세기 말에 더이상 제도로써의 필요도가 크지 않은 노예제가 그 종말을 앞두었던 시점이 일치하는 것은 단지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9]


프랑크 왕국의 쇠락은 계속되어 7세기 초엔 멸국을 보는 듯했으나 로타르 2세(Lothar Ⅱ, 재위 613~628년)가 일부 귀족의 도움으로 재통일과 왕권강화에 성공했다. 허나 얼마 못 가서 왕위 결정과 국사 등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고위 관리귀족들의 활동으로 인해 머지않아 다시 왕권은 약화되었고 반면에 고위 관직 귀족들, 그중 특히 궁재가 실권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들의 대토지에 대한 왕토사상은 퇴색되고 사실상 관리와 지주들의 토지사소유권이 재차 강화된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7세기 유럽을 살펴보았다.


(1) 7세기에 거대한 부동산 소유주들은, 자신의 부동산을 임대한 임차인들을 노예로 삼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국가가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는 강력한 기득권층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이 문장은 21세기에 대하여 쓰여진 문장이라고 해도 별반 어색함이 없을 것 같다.


(2) 혹자는 "그래도 21세기에는 7세기마냥 부동산 소유주가 임차인에게 세금을 직접 거두지는 않고, 또한 공무 부담을 떠넘기지도 않으니까 훨씬 낫다!"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임차인에게 임대료를 높여 부동산세를 임차인들에게 전가시키고 있으니 임차인들에게 직접 세금을 거두는 것과 동일하다. 또한 '평등'이라는 그럴싸한 명분 아래 공부 부담(군복무 등)을 다 함께 부담하고 있으니 공무의 일부를 떠넘긴 것과 동일하다. 옛적엔 부동산이 적은 가난한 자들은 그 공무 부담이 '거의 완전히 면제'였기 때문이다.


고로 이건 역사인 동시에 현재다.


References

[1] 금제권 : 영주가 장민들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물레방아, 방앗간 등)의 제작과 사용을 금하며 강제적으로 영주의 생산수단을 장민들이 이용료를 내고 사용하도록 하는 권리로써, 이를 통해 영주는 독점적 이익을 취했다.

[2] 김세신, 『서양법제사론』(법문사, 1990), 186~187쪽; 이기영, 『고전장원제와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형성』(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59~162쪽.

[3] 이기영, 『고전장원제와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형성』, 52~53, 144쪽, 158~159쪽; 이기영, “영주권의 형성”, 「프랑스사 연구」(2012), 15쪽.

[4] Marc Bloch/한정숙 옮김, 『봉건사회 2』(한길사,  2001), 186~187쪽.

[5] 상게서, 192쪽.

[6] “People considering taking up residence on Nansledan development in Cornwall will have to adhere to a list of 85 regulations”, Telegraph, last modified Sep 13, 2020, accessed Feb 13, 2021, https://www.telegraph.co.uk/news/2020/09/13/no-flags-no-drunkenness-rules-life-prince-charles-new-development/.

[7] Bloch/한정숙 옮김, 전게서, 211쪽.

[8] Patric J. Geary/이종경 옮김, 『메로빙거의 세계』(지식의 풍경, 2002), 175쪽.

[9] 이기영, 『고전장원제와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형성』, 188쪽, 200~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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