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롭고 무채색에 가까운 날들이 이어지면 꽃 생각이 난다. 2년째 유지하고 있는 인테리어가 지겨워질 때 형형색색의 꽃을 사서 화병에 꽂아두면, 꽃의 생을 일부나마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은 충분히 다채로워진다. 생의 신비, 자연의 위대함 같은 것. 단돈 5천 원으로 누리는 과분한 축복이다.
그에 비하면 소소하기 짝이 없는 주말 아침의 늦잠은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달콤함이지만, 그보다 꽃이 더 필요한 날은 영락없이 이른 기상을 택한다. 그날도 이런저런 이유가 생겼고, 어김없이 늦잠을 포기하고 꽃 시장을 향했다.
꽃을 사러 갈 때면 예상하지 못한 난관에 부딪히고는 했다. 그것은 바로 아는 꽃보다 모르는 꽃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가격을 물어볼 때마다 애를 먹는다는 것. 난생처음 본 꽃이 마음에 드는 날이면, 수북이 쌓여있는 꽃들 사이에서 그것을 정확히 지칭하기가 어려워 애를 먹고는 했다.
사장님은 손가락을 이리저리 옮기며 ‘이거요? 이거요?’ 하시고, 그럴 때마다 ‘그 옆에요, 그 아래요’ 하며 보다 정밀하게 위치를 조정해야 했으니까. 그럴 바에야 꽃 이름을 알고 가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꽃시장을 방문하기 전에는 습관처럼 제철 꽃을 검색해보며 마음에 드는 꽃의 모양과 이름을 달달 외웠다. 만약 그 꽃을 파는 가게가 있으면 꽃 이름을 정확히 불러야지 하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토록 아름다운 꽃을, 여기저기 다 붙여 쓸 수 있는 이것이나 저것 혹은 그것으로 부르는 것은 꽃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구매자의 도리 또한 아니다. 엄연히 이름이 있으니 이름을 불러줘야 마땅하고, 자고로 이름은 불러야 맛이지 않던가.
이름은 어디에나 있다.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동물에도, 식물에도, 그리고 지구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도 이름이 있다.(인간에 의해 붙여진 이름 말고, 그들이 그들끼리 부르는 이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나 이름을 부여받는다.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닌 누군가가 붙여준 이름. 그렇게 불리길 바라거나 스스로 그렇게 정의해서 정한 이름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렇게 정의했고, 그렇게 되었음 해서 붙인 것. 그것이 이름이다. 결국 이름엔 본인의 의지는 없다.
물론 이름의 속성이 그렇다고 해서 이름이 필요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름은 제 나름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구별. 너와 나의 구별, 그리고 우리와 너희의 구별. 이름이 있어 혼동하지 않고 나와 너는 공존할 수 있다. 나와 너의 구분이 확장되면 우리와 너희를 구분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정체성이 확립되고, 피아(彼我)가 식별되기도 하며, 소속감을 느끼기도 한다.
꽃시장에서도 이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이가 난다. 우선 당당하게 이름을 말함으로써 ‘나는 이 정도는 알고 있으니 아마추어가 아니오’ 하는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데, 이건 단돈 몇백 원이라도 바가지를 덜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그 옆에, 그 아래 하며 불필요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니 이름이 있고, 이름을 아는 것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그런데 이름은, 알고 있음으로써 한계를 주기도 한다.
어느 날, 다시 꽃 시장을 찾았을 때 나는 이미 알고 있고 익숙한 꽃을 골라 들고 있었다. 이름을 알아서 생기는 내적 친밀감. 더 친숙해서,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 의미가 생겼다. 그래서 수많은 꽃 사이에서 이름을 아는 꽃을 만나면 그 자체로 반가워서 다른 꽃은 쳐다보지도 않거나, 이름을 모르는 꽃은 사려고 시도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이미 익숙한 꽃을 사서 돌아오는 경우가 반복됐다.
내가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한낱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이름이 불리는 순간 꽃이 되어왔다는 시인의 문장처럼, 한때는 이름 모를 꽃이었던 꽃은, 이제 다른 꽃과는 다른, 소중한 존재이자 특별한 존재가 되어 마음에 들어왔다.
꽃이 마음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 게 문제 될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럼으로써 다른 꽃들은 안중에도 없게 되었다는 것, 일상에 변화를 주기 위해 찾은 꽃시장인데, 결국 또다시 반복되는 같은 그림의 일상을 하나 추가하는 것이 문제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자꾸 이름을 아는 꽃을 찾는 동안, 다른 꽃들을 알아갈 기회도, 다른 꽃들과 친밀해질 기회도 모두 사라지는 것이었다.
앎이 시작되어 의미가 생기고, 친밀감이 형성될수록 구분도, 구별도 짙어진다. 그렇게 마음에 벽이 생기면 그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은 가까워질 기회가 없어지고 점점 더 멀어진다. 결국 구별하는 것을 넘어 차별하기에 이른다.
이쯤 되니 물음표 생긴다. 이름이 꼭 있어야 하는 걸까.
한 뉴스에서 외국어를 남용하는 실태에 대해 보도하는 것을 봤다. 유명 건설사들이 아파트를 세우고 나서 온갖 이름을 붙이는데, 이때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뉴스를 보며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보다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 만들어질수록 자꾸만 구분 짓고, 구별되는 세상이 되어간다는 것이었다. 이름을 아는 꽃만 바라봤던 나처럼 말이다.
혼동하지 말자고 붙여 놓은 이름이, 우리끼리 더 친밀하게 지내자고 붙여 놓은 이름이 단절을 만들고, 차별을 만들고, 어떤 집단을 폄훼하는 사고를 만들어내는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아파트 이름과 거지의 앞글자를 따서 ‘○거’라고 부르고, 맘충, 꼰대 같은 대명사를 만들어 누군가를 비난하고 미워한다.
언제부터 이름이 비난과 조롱의 수단이 되었을까. 온갖 좋은 바람을 담아 예쁘고 사랑스럽게 불러줘도 부족할 이름이 단점을 비난하고 상대를 향한 부정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상황이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구분했을까. 내 친구, 가족, 지인, 동료, 동포, 민족, 인종, 직업, 성별 등 구분할 기준은 넘쳐났고, 구별할 특징들은 끝이 없었다.
그렇게 거르고 걸러 내 영역 안에 들어온 무엇인가를 인정하기 위해, 마치 귀족에게 작위를 하사하는 것처럼, 나는 자못 근엄하고 신성하게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되뇌며 내 영역 안으로 받아들이는 작업을 해왔다.
하지만 구분 짓고, 구별하고 이름 지음으로써 내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밤하늘의 별들만큼이나 수많은 아웃사이더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수많은 그것들의 이름은 누가 다 지었고, 그들의 카테고리는 누가 다 결정했던 것일까. 어쩌면 이렇게 구별하기 좋아하고, 이름 짓기 좋아하는 인간의 특징이(혹은 나의 특징이) 그 행위의 대상에게는 폭력이거나 강요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그날도 역시 꽃을 사고 돌아오는 길. 이번에는 이름을 모르는 꽃을 사리라 결심하고 나선 길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그리고 계획처럼 이름을 모르는 꽃을 사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결국 습관처럼 사장님께 꽃의 이름을 물었더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연약한 기억력과 그보다 강한 부주의함은 결국 어렵게(?) 알아낸 새로운 꽃의 이름을 잊게 만들었다. 그렇게 새롭게 모셔온 예쁜 꽃의 이름은 내 기억 속, 다시 꺼낼 수 없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결국 시장에서 데려온 ‘이것’을 화병에 꽂아둔 채 감상에 빠졌다.
그때 그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지만, 그 꽃의 모양과 색깔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2주 넘게 화병에 꽂혀있던 동안 꽃을 바라보며 느꼈던 감정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있다.
어쩌면 이름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몰라도, 그래서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어도, 그들은,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꽃은 이미 나에게로 와 한 송이 꽃이 되었으니까.
그 낯선 꽃 한 송이의 이름이 궁금했던 건, 내게 특별해진 꽃송이를 조금 더 기억하고 싶어서 일 테니. 꽃의 이름에 기억 하나를 붙여 놓으면 언제든 쉽게 꺼내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그리고 명명(命名)함으로써 너는 다른 것과 다른 존재임을 인식하고 싶었을테니.
이런 이유들 때문이라면 이름 따위는 몰라도 상관없다. 그때의 바람, 그때의 햇살, 그때의 네 모습과 내 느낌으로 충분히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명명(命名)하지 않아도,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혹은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존재하는 그대로의 가치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날처럼 오늘도 역시 내 기억 속 ‘그때 그것’들이 쌓여갈 것이다. 이름을 몰라도, 이름이 없어도, 구분 짓지 않아도 그 자체로 온전히 의미 있고 소중한 그것이, 이름을 몰라도 결코 사소하지 않는 그것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마음속에 간직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바람.
부디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것들을 아름답고 사랑이 가득 담긴 이름으로, 존재에 대한 찬사와 온전함이 가득 담긴 이름으로 불러주길.
Q.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가장 소중한 존재는 누구입니까?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존재는 무엇입니까?
(이미지 by Mariya ���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