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는다. 멋진 풍경 앞에서, 근사한 식사 앞에서, 꺄르르 웃는 아이의 미소 앞에서, 담음새가 예쁜 디저트 앞에서 연신 카메라 버튼을 누르며 사진을 찍는다.
휴대전화가 발전하면서 바뀐 변화 중 하나라면, 더는 카메라 렌즈 앞에서 작정하고 자세를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연이어 버튼을 눌러 사진을 찍어도, 사진의 정석 같은 자세를 잡지 않아도 필름 아깝게 뭐 하는 짓이냐는 핀잔을 듣지 않아도 되니까. 바야흐로 사진 앞에서 한없이 자유로워진 시대다.
하지만, 이젠 새로운 핀잔이 생긴다. 사진 좀 그만 찍으라는, 이런 건 대체 왜 찍느냐는, 사진을 너무 많이 찍어서 문제라는 종류의 핀잔들. 마치 파파라치가 된 듯 사진을 찍는 행동에, 아니면 점점 식어가는 음식을 앞에 두고 사진 찍느라 젓가락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 행동에, 가만히 풍경을 감상하고 싶은데 ‘저기 가서 서 봐’ 하는 목소리에 저런 핀잔들이 따라붙고, 결국 이런 말을 듣고는 한다. “사진 좀 그만 찍어!”
저런 핀잔을 듣는 것보다 하는 쪽에 가까웠던 나는, 언제 어디서나 쉼 없이 사진을 찍어대는 누군가를 볼 때마다 유난스럽다 생각했고,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있는 것을 육안이 아닌 렌즈를 통해 보는 것을 더 좋아하는 그가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알고는 있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사진을 찍느라 중요한 타이밍을 놓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니까. 언제 어디서든 사진 찍는 게 중요한 사람들이, 여행의 목적을, 만남의 목적을, 나들이의 목적을 모두 사진 찍기라고 생각하는 아닐까 걱정됐다. 그것들은 목적이 전치되어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는 것과 같은 일이지 않은가.
사진 찍는 게 문제 될 건 없지만, 이렇게까지 생각한 데에는 마찬가지로 내 습관이 적용됐다.
언젠가 분위기에 취해 사진을 찍은 날, 그렇게 찍은 사진이 사진첩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다시 드러날 일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찍어도 들여다보지 않는 사진은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가 여유 저장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경고에 허겁지겁 휴지통으로 버려지기 일쑤였고, 언젠가 껄끄러운 상황이 생기면(-예를 들면 연인과의 이별 같은) 일일이 찾아 삭제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키울 뿐이었다.
사진을 보지 않는 건 사진의 문제가 아니라 보지 않는 나의 문제이고, 사진을 자꾸 꺼내 보면 될 일 아닌가. 그렇다면 사진을 찍는 것은 의미가 있다. 다시 꺼내 보았을 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 잠시나마 그 순간을 추억할 수 있으니 그것으로 의미는 충분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문제가 있다. 이차원 화면 속에 담긴 사진은 그렇기 때문에 찰나의 흔적이고, 사건의 일부일 뿐이다. 동영상처럼 앞뒤로 연결되는 시간이 없으니 연속된 시간의 단절이었으며, 사진을 보며 얻는 정보나 떠올리는 기억은 완전하지 않아서 홀로 붕 떠 있는, 시간과 기억의 매우 작은 조각일 뿐이다. 사진을 본다 한들 완전한 기억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니 나중에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남긴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홀로 붕 떠 있는 불완전한 조각을 남길 바에야 지금을 더 충실히 느끼고 기억하는 게 낫지 않을까. 사진을 찍을 시간에 더 많이 느끼고, 더 면밀히 보고, 더 깊게 받아들이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누면 오롯이 하나의 장면으로 간직될 테니까. 그래서 사진을 찍기보다, 순간을 눈에, 머리에, 가슴에, 우리 관계 사이에 간직하는 편을 취해 왔다. ‘사진을 찍어서 좀 남겨둘걸’ 하는 후회가 들기 전까지는.
한 남자가 사진을 찍는다. 차가 줄을 지어 달리는 배경에는 일몰이 만들어내는 붉은 빛이 파란 하늘을 물들이고, 강물도 아파트의 창문도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철컹철컹 소리를 내는 지하철 소리는 풍경에 운치를 더한다. 퇴근 무렵, 일몰의 풍경은 사람들의 마음과 제법 잘 어울린다.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는 그의 화면에도 비슷한 풍경이 담겨 있다.
찰칵 찰칵.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셔터음이 서너 번 울리고 나서야 남자는 결과물을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듯 누군가에게 전송하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인다.
그리고 남자는 언젠가, 어쩌면 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서 사진을 주제로 한바탕 대화를 나눌 것이다. 노을이 만들어낸 빛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강물에 반짝이는 햇빛의 여유와 조용한 전철 안의 분위기에 대해. 그 시간의 감흥에 오늘의 감정이 더해지고, 경험이 덧대지면서 평범한 사진 한 장은 하나의 서사를 완성시킬 것이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른 언젠가 사진을 다시 꺼내 보았을 때 그때의 느낌은 다시 한번 깨어나고 드러날 것이다. ‘이때 그랬지, 그날 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 네가 많이 좋아했었지’ 하는 기억들. 네모난 화면 속에 담긴 그날의 흔적을 미끼 삼아 과거의 기억들은 낚여 올려질 것이다. 완전하지 않은 부분의 기억이어도 말이다.
어릴 적 사진을 꺼내 볼 때마다 이야깃거리가 이어지고는 했다.
뾰로통한 표정을 하고 쭈그려 앉은 채 찍힌 사진을 볼 때면 ‘왜 토라졌는지, 그때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분위기였고, 그 결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는 이야기가 한바탕 이어졌고, 아빠의 품에 기대에 찍은 사진을 볼 때면 사진을 찍기 전 자세를 잡느라 분주했던, 그리고 그때 느꼈던 만족감과 행복감 같은 기분이 함께 떠올라 미소를 짓기도 했다. 사진 속에 박제된 그날의 기억은 각색되고 재현되어 사진을 꺼내 볼 때마다 다시 떠오른다.
평소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사소한 기억의 단편들. 과거엔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존재가 실존했음을 증명하는 흔적들. 사진은 그렇게 한때 의미있었고 한때 의미 있었고 한때 존재했던 것들을 떠올리게 하고 다시 찾게 만드는 매개체인 것이다. 그리고 사진을 꺼내어 보는 순간, 사진 속에 담긴 찰나의 순간은 어느덧 확장되고, 불완전은 완전을 향해, 무(無)는 유(有)를 향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봄철의 벚꽃과 개나리도, 주름이 늘어가는 엄마의 굽은 손가락도, 흰머리가 자꾸 생기는 반려자의 지금도, 항상 이렇길 바라는 지금의 내 모습도, 오늘 이 시간도 모두 사라지고 변한다.
내년에 피는 벚꽃은 올해 핀 벚꽃이 아니고, 지난해 핀 개나리는 올해 핀 개나리가 아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내일도 존재하겠지만, 조금씩 변하며 쇠락을 향해 걸어가면서 어제의 모습도, 오늘의 모습도 점점 잃어버리게 된다.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의 시간은 미래였을 오늘의 시간과는 다르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과거가 되어버린 지금을 남기고, 잊힘과 소멸로 향하는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 사진을 꺼내 본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것들의 유한함을 마주할 때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니까.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오늘의, 지금의 어떤 것을 기억하기 위해 그날의 남자도 사진을 찍었을 것이고, 너도, 당신도 음식 앞에서, 풍경 앞에서, 피사체 앞에서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0.001초의 찰나일 뿐이라도 상관없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존재하는 그 특별함을 무엇인가로 남겨두지 않는다면 훗날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을 테니까. 그것을 마주했을 때 시간은 더 길어지고 기억은 확장되니 말이다.
사진에 담긴 존재는 그렇게 찰나에서 영원으로 이어진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게 하는 시간으로,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순간으로, 이제는 끝나버린 시간을 다시 재현하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