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날 모든 것에 '안녕'

by 임경미


태풍이 지나간 하늘에는 파랗디파란 하늘만이 남았다. 그러나 지상엔 아직도 간밤의 흔적이 남아있다. 기어가는 차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어딘가에서는 토사가 밀려들었다는, 파도가 들이쳤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밤새 안녕했는지 궁금하고, 묻게 되는 날. 모두 무사하냐는 물음에 ‘밤새 이상 무’라고 답변을 보내며 야속하게 파랗기만 한 하늘 사진을 보낸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일은 창문 너머의 주변을 살펴보는 일, 하늘을 보며 감탄하는 일, 감탄을 자아낸 하늘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오늘따라 계속 찍고 싶은 하늘의 모습. 며칠째 뿌옇게 흐렸던 하늘이, 점점 가면을 벗고 파란 맨얼굴을 저 멀리서부터 드러내고 있었다. 분주히 사진을 찍으며 파란 하늘이 넓어지는 광경을, 뿌연 하늘이 물러나는 모습을 간직하고 싶었다.




클리셰. 뻔하게 전개되는 내용이나 소재 같은 것, 상투적이고 진부한 표현을 일컫는 말.

어두컴컴하고 흐린 하늘은, 대부분 앞으로 무슨 일인가가 생길 것이고, 그 일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것임을 암시하는 클리셰였다.


이 클리셰를 없애 버려야지. 두고 봐. 네가 언제까지 위세를 떨칠 수만은 없을 거야.


타임랩스로 촬영한 영상엔 구름이 점점 남동쪽으로 물러나면서 파란 하늘이 영역을 확장하는 순간이 고스란히 담겼다. 영상을 남기고 내심 뿌듯해졌다. 영상을 재생해 본 뒤에는 속이 후련해진 느낌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바이러스에 적응하느라 힘들고, 몰아닥친 비 소식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힘들고, 설상가상 경제가 안 좋아져서 힘든 마당에, 그간 경험한 적 없는, 유례가 없는 태풍이 상륙한다는 소식에 벌벌 떨며 두려워했던 밤이었다. 그리고 밤은 끝났다. 다시 아침이 밝았고, 하늘은 맑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다윗 왕의 반지에 새겨져 있었다는 문구라고 했다. 이야기의 어디서부터가 진짜인지 거짓이 섞여들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간다는 것.


지금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도, 호락호락하지 않는 문제들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시련의 껌딱지도 언젠가는 떼지고 지나갈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공의 기쁨도, 명예의 영광도, 잘나가는 시절의 만족감도 또한 지나갈 것이다. 지루한 여름비가 지나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지나는 것처럼, 지난한 시절도, 수월한 시절도 모두 지나갈 것이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가고 다시 고요해지는 하늘의 모습을 클리셰 삼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 조금 더 힘내보자고, 여기서 포기하지 말고 조금 더 버텨보자고, 함께 푸른 하늘을 만끽하자고.



강한 염원은 사진에 고스란히 담겼다. 연한 하늘색의 하늘은 심해의 쪽빛처럼 차갑고 파랗게 찍혔다.


사진은 드라마틱하고 격정적으로 찍어야 느낌이 산다. 노을은 더 붉게, 밤 풍경은 더 어둡게, 하늘은 더 파랗게, 산은 더 푸르게, 꽃은 더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 그대로 찍으면 그때의 감흥을 전달할 길이 없다. 작은 프레임 속에서 내가 느낀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는 방법은 그 순간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과장을 선호하지도, 왜곡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어느 순간 과장되고 왜곡된 세상 속에서 산다. 사진을 찍을 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비단 나만의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소싯적 17 대 1로 싸워 이겼다는 무용담, 난관을 얼마나 주도적으로 멋지게 해결했는지 하는 영웅담, 왜 좌절할 수밖에 없었는지 하는 경험담 속에서, 고통과 비극과 재앙과 극복의 과정은 모두 과장된다.

죽을 것 같이 아프고, 비련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비극이 잇따르고, 세상 모든 시련이 다 나에게만 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과정은 암흑 속의 긴 터널 같고, 마치 다윗이 골리앗을 넘어트렸다는 이야기만큼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너무 힘들어서 이겨낼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도 꾸역꾸역 헤쳐나가다 보면 어느덧 고난은 끝이 나 있고,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른 언젠가엔 그땐 그랬지 하며 그때를 추억하게 된다.




지금은 쪼그라져 버린, 그러나 그때는 골리앗처럼 큰 비극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비극은 내 힘으로 감당하기엔 너무 커 보이지만, 비극을 실제보다 더 크게 만드는 건 그사이 작아져 버린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몸집을 키워버린 비극이라는 골리앗과의 싸움이 시작되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는. 뭐, 이런 생각들.

이것도, 저것도 다 지나가 버린 무덤덤하고 평이한 시절엔 수축될 대로 수축되어버린 그때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있었고, 그 꼴이 탐탁지 않아서 하늘빛을 쪽빛으로 바꾸듯 과장하고 왜곡하며 기억을 포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그렇다고 지금의 이런 문제들, 저런 순간들이 모두 별거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모두 과장되고 왜곡되어 나를 더욱 괴롭히고 더욱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결국 지나고 말 것들이라는 말을, 그러고 나면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도, 대단하지도 않다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로 위안 삼아 보면 어떨까 하는 바람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까짓거, 별거 아니라고 툭툭 떨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왜소해진 마음이 키운 비극의 몸집을 줄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있다면 한고비를 무사히 넘긴 지난 밤처럼, 사적인 고비도 잘 넘길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길 테니까. 골리앗을 쓰러트리기 위해 돌멩이를 집어든 다윗의 용기만큼은 아니더라도, 비극의 몸집이 아닌, 희망과 용기의 몸집을 키워보는 거다.



결국 실제보다 새파랗게 찍은 하늘 사진을 전송하고, 사진을 본 친구는 하늘이 그림 같다며 감탄을 한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집밥을 먹을 땐 식당에서 먹는 맛 같아 하고, 식당 밥을 먹을 땐 집밥 같아 라는 말이 칭찬이라는, 이상한 칭찬법. 그림은 사진 같을 때, 사진은 그림 같을 때 칭찬이 되는 우리네 식 칭찬법으로, 친구는 칭찬과 조금은 나아진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과장된 하늘 사진을 보내놓고, 골리앗 같은 고통이 찾아와도, 용감한 다윗처럼 이겨내자는 말도, 힘든 일 잘 이겨내줘서 고맙다는 말도, 아니면 조금만 더 힘내면 이런 맑은 하늘이 곧 찾아올 거라는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흐린 하늘의 클리셰를 안다면, 맑은 하늘의 클리셰도 알 테니까.

설령 나만 아는 클리셰일지라도, 그래서 단지 비유와 상징에 불과하더라도, 사진을 보고 한번 웃는다면 그 미소의 씨앗이 발아하며 싹을 틔우고 줄기와 잎을 키워나갈 것을 믿으니까.



괜찮을 것이라는 작은 위로 하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왜소한 용기 하나, 그리고 옅게 지어보인 미소가 보낸 파동 하나, 그것이면 이 또한 지나 보내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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