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꽃을 샀다.
꽃시장으로 가는 길은 쉬었지만, 길이 쉽다고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가깝다고, 혹은 쉽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꽃시장을 가기까지 몇 가지 난관을 통과해야 했다.
우선 주말이면 벌어지는 누가 더 오래 자는가 하는 대결에서 지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때로는 춥거나 덥거나 비가 내리거나 공기가 좋지 않거나 하는 자연 현상이 감당 가능한 수준이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야 했다. 사실 다른 건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난관은 극복하기 어려운 항목이었다.
마음의 짐이란 대강 이러했다.
살아있는 꽃의 줄기를 뎅강 잘라서 뜨거운 물에 지지는 행위에 대한 미안함, 이 추운 날씨에 꽃을 피우기 위해 들여야 하는 연료에 대한 걱정, 꽃에 ‘수입’이라는 단어라도 붙어있을 때면 먼 거리를 배 타고 와야 하는 비용에 대한 걱정. 거기에 플러스 알파로 꽃을 사기 위해 드는 두 명분의 왕복 차비까지.
잠깐의 기쁨을 위해 이 모든 것들을 무시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 앞에서 쉽게 죄인이 됐다. 지극히 개인적인 즐거움과 그로 인해 무시될 지극히 타인적인 고통. 그리고 그로 인해 야기될 나의 고통까지. 언제나 그렇듯 두 개의 상반된 가치를 저울질하며 무엇이 더 나을지를 고민했다.
조금 더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해, 조금 더 살기 좋은 지구를 만들기 위해 지극히 개인적이며 찰나에 지나지 않는 순간의 유희는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 결국 승기를 잡았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솟아오를 때면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것으로 꽃을 향해 움직이는 마음을 외면하고는 했다.
꽃 하나 사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울 일이야?
일 년에 두세 번 정도는 눈 감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결국 추위를 뒤로 하고 꽃시장을 갔다. 그리고 신문지에 돌돌 말아 꽃 세 단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꽃을 산 이후의 과정도 꽃을 사러 가기 전 뛰어넘어야 하는 장벽처럼 녹록지 않다.
꽃을 다듬고, 물을 올리고, 화병에 꽂았다가, 하루가 지나면 줄기를 1센티미터쯤 자르고, 화병을 헹궈 깨끗한 물을 담고, 다시 화병에 꽃을 꽂는 일이, 꽃이 질 때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이후 어떤 일을 감당해야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줄기를 다듬는 동안 마음이 설레고 들뜨고 기쁘기를 반복한다. 거기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릴 수 있는 건 분명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기 때문이리라. 귀찮고 고통스럽지만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리라.
귀찮다는 이유를 갖다 붙이면 밥 먹는 것도 건너뛰던 내가 이런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내하는 이유는, 그 어떤 대승적 차원의 이유가 아니다. 단지 꽃이 예뻐서. 이쁜 게 내 옆에 오래 있으면 좋아서.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가벼운 이유로, 나는 꽃을 사고 꽃을 관리한다.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방문한 꽃시장에서는 꽃내음이 가득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가령 비염에 걸려 코가 막힌 사람은 꽃향기를 맡지 못하겠지.
오랜만에 방문한 꽃시장은 누군가에게는 당연했지만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던 경험을 기꺼이 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그 관용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며 즐거워했더랬다.
그리고 그날부터 마음껏 꽃을 들여다보고 있다.
노란 꽃잎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통통한 꽃잎은 여전히 귀엽고, 털이 난 짐승도 아닌데 자꾸 쓰다듬고 싶어지는 자태로 그렇게 화병 몇 개가 있다.
물론 나에겐 너무나 당연하게 아름다운 꽃이 누군가에게는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연 그대로의 싱그러운 꽃향기마저 경험한 이상 내게 꽃은 아직까지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다.
꽃이 주는 아름다운 유희를 누리고 싶어서 성큼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꽃을 들여다본다.
원하거든 움직여라.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하니까.
예쁜 나를 더 자세히 보려면 네가 와야지 하는 듯한 꽃의 자태에 이끌려 순한 양처럼 꽃 앞에 고개를 처박고 한참을 있었다.
도대체 꽃이란 녀석은 왜 이리도 이쁜 걸까. 이렇게 이쁜 생명체가 어떻게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꽃이 너무 예뻐 집으로 가져가기 위해 장미를 꺾다가 가시에 찔린 누군가의 일화가 납득이 될 만하다.
저 아름다움을 ‘꽃이 너무 예쁘다’는 간결한 문장에 성급히 담아내고 또다시 꽃을 들여다보고 있다. 글은 점점 산으로 가고, 눈은 계속해서 꽃으로 가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질리도록 꽃이나 보자며 실컷 꽃을 들여다보다가, 어쩜 저런 분홍색이 있을 수 있는지, 저런 분홍색이 어떻게 저런 노란색과 어울릴 수가 있는지 감탄하는 나를 발견한다.
네가 어쩜 그럴 수 있어.라고 화가 나서 따져 물을 때나 썼던 단어가 이렇게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인다. 강한 부정이 강한 긍정이 되는 것처럼, 나에겐 부정적인 의미가 더 컸던 단어를 이렇게 가져다 붙이니 강한 긍정이 되어버렸다.
언젠가 꽃 같은 너를 만나면, 어쩜 이렇게 생길 수가 있냐며, 존재 그 자체에 감탄을 해주고 싶다. 네가 아니라며 부정을 한다면, 또다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말로 너를 강하게 긍정해주고 싶다.
나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그려지지 않을 만큼, 네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고, 넌 어쩜 그렇게 ~할 수 있냐는 짧은 문장에 존재를 향한 찬사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말해주고 싶다.
요즘 문득 문득 찾아오는 꽃을 향한 찬사는, 꽃을 보듯 너를 본다는 나태주 시인의 말처럼,
꽃을 보듯 너를 보고, 꽃을 보듯 나를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맞는 거겠지.
(사진 출처: 픽사베이의 마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