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에 대하여

by 임경미


가을의 문턱에서 작은 국화꽃 한 다발을 구입했다. 안개꽃을 닮은 하얀 국화꽃. 기다란 줄기를 자르고 쓸데없을 것 같은 잎사귀를 정리한 뒤 화병에 꽂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마치 제 존재감을 알리는 것처럼 한동안 짙은 국화꽃 향기가 집안에 가득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바람이 제법 차가워지고 옷이 두꺼워지면서 겨울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실감하는 날. 노란색, 빨간색으로 물들었던 공원의 나뭇잎도 바스락 소리가 나는 건조한 갈색으로 변해 한 잎 두 잎 떨어져 땅바닥을 위를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국화꽃의 하얀빛도 색이 바랬다. 꽃잎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하얗던 모습이 사라지고 갈색빛으로 변해버렸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하나 둘 못 생겨진 꽃송이를 골라내다가 꽃병에 꽂힌 국화꽃도 듬성듬성해진 정도가 되어서는 결국 버려야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국화꽃 한 다발을 쓰레기통으로 보내고, 사라져가는 것이 못내 아쉬워 꽃을 사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꽃가게를 찾았다. 그날은 유난히 튤립이 눈길을 끌었고, 결국 꽃을 사지 말자는 다짐을 접어둔채 튤립 몇 송이를 사다가 집에 꽂아두었다. 노랑, 빨강, 주황색의 꽃잎이 원통모양으로 모여 굵은 줄기에 한 송이 피어있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일부러 고개를 돌려 꽃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는 했다.


그런데 역시나! 꽃의 아름다움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꽃잎이 뒤로 말리고 축축 처지더니 어느덧 한 잎 두 잎 떨어져 내려 줄기만 화병에 꽂혀 있었다. 국화꽃처럼 튤립도 쓰레기통으로 가야 할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애당초 꽃이란 이렇게 허무한 것이어서 사지 않으려 했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꽃병을 집어 들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 봄날 수줍은 연둣빛의 잎사귀가 붉은 빛으로 물들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렇게 변해갔다. 어렸을 때 찍은 단란한 시간들이 담긴 사진, 일상을 담은 일기장, 감명 깊게 읽어서 고이고이 모셔둔 책은 누렇게 변색이 되었고, 한동안 입지 않고 옷장에 걸어둔 옷, 몇 년을 사용한 국그릇, 새로 붙인 새하얀 벽지와 색색한 색감의 이불도 모두 시간이 지나면 제 빛을 잃어버리고 탁해져갔다.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라고 그러지 않을까. 뜨거웠던 사랑의 감정이 식어버리고 나면 사소한 다툼에도 이별을 하게 되고, 해마다 재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세운 다짐은 얼마 못 가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되고 만다.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며 ‘엄마에게 잘 해드려야지’ 했던 다짐은 금세 잊어버리고 지금은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는 야박한 딸이 되고 말았다.


그래. 어쩌면 시간이 지나가면서 색이 바래지고, 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일지 모르겠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진실. 붙들어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자연의 이치. 결국 이 모든 걸 받아들이고 마음을 바꿔야만 했다. 더는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기로. 그것이 쇠락이어도, 노쇠여도. 슬퍼하지 않기로. 그것이 냉담이어도, 무관심이어도 원망하지 않기로.

변해가는 것에도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받아들여보기로 했다.


하지만 차마 저버릴 수 없는 하나의 바람. 그렇게 변해가더라도 그 본질마저 퇴색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꽃이 피었을 때도 꽃이고, 져버린 뒤에도 여전히 꽃인 것처럼, 내 추억이 담긴 일기장이 누렇게 되었어도 그 속에 소중한 추억이 담긴 일기장인 것처럼. 비록 겉은 변했어도 가장 중요한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 자체로도 또다른 모습의 그것일테니까.

앞으로 많이 변해가더라도 내 생각과 인생의 본질마저 퇴색시키지는 말아야지.



(이미지 제공: 노지원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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