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 착, 착, 착.
초침이 12를 지나 다시 새로운 원으로 나아간다.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 있다. 잠을 자기 위해 불을 끄고 누운 탓인지 소리는 더 크게 신경을 자극한다. 그렇게 한참, 초침이 원을 그리는 소리를 듣다가 몸을 한쪽으로 돌려 누웠다.
세상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단순히 베개 위에 귀 한쪽이 눌렸다는 이유만으로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처음 경험해보는 일에 내심 놀라 반대 방향으로 몸을 뒤집어 보니 이번에는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언제부턴가 귀에 마이크가 달렸다. 소리가 웅웅 울리기를 몇 주. 귓속에서 들리는 마이크 소리를 무시하자 다음엔 확성기가 달렸다. 내 목소리도, 타인의 목소리도, 길거리의 소음도 확성기를 대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바람에, 그리고 그 소음이 유발하는 두통과 어지럼증 같은 증상들을 견딜 수가 없어 병원을 찾았다.
-한쪽 귀가 많이 나빠졌네요. 저음역대 몇 개를 아예 듣지 못하는 상태에요.
-그런데 저는 TV도 남편보다 조용히 틀어놓고 봐요. 지금은 오히려 작은 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요, 마치 소머즈가 된 것처럼.
-그건 다음 음역대에서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정확하진 않지만 대강 이런 대화가 오갈 때 생각했다. ‘아’라는 소리는 한 음역대가 아닌 여러 개 음역대로 이루어져 있나 보다. 아마도 나는 그중 일부를, 그러니까 낮은 음역대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건가 보다.
이런 나만의 이론을 제멋대로 만들어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치료의 목적은 단순했다. 급격히 떨어져 있는 한 쪽 귀의 성능을 끌어올려서 두 귀의 차이를 줄이는 것. 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골든 타임을 놓쳤다는 이유로 치료를 더디게 진행됐다.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점점 약을 늘리고 주사를 맞으면서 귀를 치료했다. 그리고 길다면 길었던 치료는 ‘이제 그만 오셔도 됩니다’라는 말로 끝이 났다.
여전히 한쪽 귀는 못 듣는 음역대가 있었지만,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으니 이제 몸에 그다지 좋지 않은 약을 그만 먹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의사의 판단을 존중했다.
앞으로도 한쪽 귀는 저음역대를 못 들을 텐데, 큰 병원을 가면 치료할 수 있기나 한 건지, 다른 치료 방법은 없는 건지, 상태가 더 나빠지게 되지는 않는지 하는 궁금증이 떠오르지 않아 내가 건넨 말은 ‘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가 전부였다.
의사는 언제든 불편한 일이 생기면 그때 다시 오라고 했다. 불편한 게 뭘까, 어느 정도를 참아야 하는 걸까. 모르는 것 투성이에 모호한 말뿐이었지만 더 묻지 않고 그냥 ‘네’하고 나왔다. 짧고 담백한 엔딩이었다.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나에겐 두 귀가 있고, 아직 두 귀가 다 들리고, 여차하면 보청기를 끼면 되니까. 그럼 괜찮겠지. 아, 보청기를 끼면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는 묻지 않아서 그것은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귀가 두 개라 괜찮을 것이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도 두 개씩 있는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눈 2개, 귀 2개, 팔 2개, 다리 2개, 콧구멍 2개. 어쩌면 두 개씩 있는 것들은 단순히 좌우대칭을 위해 그렇게 생기게 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귀는 왜 2개일까. 비록 입술은 위아래 나뉘지만 그래도 입은 1개인데, 눈이 2개이고, 귀가 2개인 이유는 더 많이 보고 더 잘 들으라는 의미일까. 그래서 만약에 어느 한 쪽이 제 기능을 못 하게 되더라도 크게 타격을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 두 개를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30년 넘게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실을 새삼 실감하며, 당연할 것도, 영원할 것도 없는 세상에서 놓치고 살았던 무엇인가의 가치를 깨닫는다. 귀가 2개여서 얼마나 감사한지, 한 쪽 귀가 멀쩡해서 그것도 얼마나 감사한지. 감사와 안도가 이어지는 귀갓길. 어딘가 어색해진 마음을 다독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암, 괜찮고말고!’
그런데 분명 고장난 건 귀 한 쪽인데, 이상하게 양쪽 눈에서 물이 흘렀다. 괜찮을 거라고 다독거려도 양쪽 눈은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물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어느날 갑자기 귀의 균형이 깨졌다. 그러나 비록 균형은 깨졌어도, 앞으로도 두 귀는 그 차이를 극복하며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을 분명 할 것이다. 인간의 생존력은 그런 것이라고, 만약 이를 일반화할 수 없어도, 나란 사람이 살아온 지난 시간이 ‘나는 새로운 방법을 찾을 것이고, 그것과 함께 해야 하는 삶에 적응할 것’임을 말해주니 괜찮다. 그리고 그 믿음처럼, 다행히도 다시 머릿속에 확성기가 켜지는 일도, 어지러운 일도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의사 선생님은 불편한 일이 생기면 오라고 하셨는데, 불편한 일이 뭐가 있었을까.
혼자만의 시간엔 콩나물이라고 놀림 받았던 하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세상과 연결이 끊어진 상태를 만들어 둔 채 나만의 분위기를 연출하고는 했다. 맑은 날씨엔 습기 가득한 분위기를, 늦은 오후엔 쓸쓸한 분위기를, 비 내리는 날에는 잔잔한 분위기를. 그렇게 세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안전하게 가두는 것에 노래를 듣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었다.
그런데 귀가 이 모양이 되고부터는 가끔 소리의 진동이 귀를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노래를 오랫동안 듣고 있노라면 소리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되어 귓속을 자꾸 찔렀다. 길게, 혹은 짧게. 자꾸 찔러대는 소리가 거슬려서 나만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차단하는 것도 못 하게 됐다.
이 정도를 불편함이라고 해야 하나?
노래 듣는 것을 줄이면 되는 거니까. 불편할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의사가 말한 불편함이란 생기지 않은 것이고, 나는 병원을 갈 일도 없을 테니, 그때 떠오르지 않아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은, 내가 스스로 내린 엉터리 같은 답을 정답이라고 믿으며 살아갈 터였다.
그런데 착, 착, 거리며 지나가는 초침 소리를 몸을 돌려 눕는 행위로 꺼버린 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내 상태를 자각했다. 내 집에는 시곗바늘이 있어도 소리가 나지 않거나, 시곗바늘이 아예 없거나 하는 시계만 여러 개 있었기에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한쪽 귀가 초침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을. 초침 소리 정도는 듣지 못하는 귀라는 것을. 두 귀의 차이가 좁혀졌어도 여전히 그 차이는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그동안 듣지 못했던 것은 초침 소리만이 아니었겠지.
낙엽이 가볍게 길바닥을 쓰는 소리도, 꽃잎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도, 바람이 부드럽게 지나가는 소리도 못 들었을 테지.
이렇게 하나둘 들을 수 있었던 것을 듣지 못하게 되다가, 언젠가는 비켜달라는 클랙슨 소리도 못 듣게 되려나? 아, 그러면 좀 위험한데. 그리고 어쩌면, 나를 봐달라는, 나를 도와달라는,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누군가의 목소리도 못 듣게 되려나. 아니면 이미 들을 수 없게 되어 못 듣고 지나친 작은 목소리가 있었으려나.
조만간 병원에 가야 할까. 선생님, 더 잘 듣고 싶어요. 방법이 없을까요? 그때 미처 묻지 못했던 말을 건네면 좋은 해결책을 들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귀가 들린다고 더 잘 듣는 건 아닐 것이다. 들을 수 있어도 듣지 않거나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는 세상이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말이라면 차라리 안 듣는 게 낫겠지. 별로 도움이 되지 않거나 쓸데없는 이야기라면 아예 듣지 않는 게 낫겠지.
그렇다면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는 말, 들으면 도움이 되는 말, 꼭 필요한 말들은 어떻게 들어야 할까. 내가 정말 듣고 싶은 말은, 또 어떻게 들어야 할까.
2개의 귀를 가지고 태어난 건 많이 듣고, 잘 듣고, 공평하게 들으라는 의미일 것이라는 지난 시절의 깨달음을 상기하며 들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본다.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다만 더 들여다보는 노력을 해볼밖에는. 먼저 스스로 세상과 차단해놓았던 이어폰 2개를 내 귀에서 빼는 것부터 시작해볼까.
Q.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픕니다. 당신의 몸은 안녕한가요?
만약, 오늘이 당신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준 내 몸에 하고 싶은 말을 해보세요.
(사진 출처: 픽사베이 펙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