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우울한 날이었다. 가까운 날들 동안 우울한 날이 있었을까. 기억을 뒤져봐도 쉽게 비슷한 우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론을 내렸다. 내게 올해의 첫 우울함이 찾아왔다.
‘첫’은 언제나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정형화된 생각의 흐름과 습관적인 행동으로 우울의 원인을 찾았다.
이 우울의 시작은 어디일까. 몇 가지가 떠올랐지만, 그 어느 것도 범인은 너라고 지목할 만한 유력한 증거가 없었다. 요즘 나의 가장 큰 고민은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이었고, 문장이 끝나지 않는 것이었고, 문장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총체적 난국.
글을 쓰는 것이 오늘 내가 보낼 하루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틀이 나를 우울함으로 밀어 넣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증거 부족이었지만, 탐탁지 않은 최근의 글쓰기가 괘씸죄에 걸려 범인이 되었다.
그래, 그렇다면 글을 써야지. 하지만 어떻게? 내 생각은 단 한 줄로도 발전하지 못하는데? 모르겠다. 그럼 글쓰기가 범인이 아닌 걸로 할까?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그다지 현명한 처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 별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은 그만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그만하기로 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우울의 감정 속에서 헤엄치지 않을 것.
‘우울하면 뭐 어때? 이유를 찾아서 뭐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는데.’ 언제부턴가 우울은 잠시 내 곁에 머물렀다가 무관심한 행동에 서운해서였는지 은근슬쩍 떠나고는 했다. 어차피 이번에도 그렇게 사라질 우울이라면 질질 끌 필요가 뭐 있을까. 잘 가라고, 서둘러 가라고 보내주는 편이 낫다.
그래, 그렇다면 한번 웃어볼까? 아래로 축 처진 입꼬리를 굳이 위로 끄집어 올려봤다. 생각보다 근육이 유연하게 따라 올라왔다. 기분도 조금 괜찮아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우울에서 조금 빠져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억지로 끄집어 올린 입꼬리에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조금 더 웃으면 될 일이다. 굳이 웃고 싶지 않아도 입꼬리를 위로 잡아당겨 웃는 모습을 만드는 것이다. 그럴 마음이 생긴다면 하하하 하고 소리를 내어 웃어봐도 좋을 것이다. 뇌는, 이 정도의 거짓말에는 눈 감아 주는 녀석이니까.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날이 그랬다. 올해의 첫 우울이 찾아온 날. 새해의 ‘새’가 가진 힘이 점점 쇠락해질 때쯤, 그 무렵 우울한 감정이 찾아왔다. 이번에도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는 것으로 우울을 보내보려 했지만,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웃고 싶지 않았고, 웃을 일이 없으니 더더욱 거짓 웃음을 지어보이고 싶지 않았다. 삐에로가 되고 싶지 않은 날.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울고 있는 기괴한 모습이 될 것만 같은 날. 웃고 싶지도, 미소를 짓고 싶지도 않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제발, 그냥 나를 내버려 둬.
억지로 웃으려는 심보도, 왜 우울한지 알아내려는 생각마저도 귀찮다고 느껴질 무렵, 모녀가 기차 칸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디론가로 향할 그들의 목적지가 적혀있을 기차표 한 장을 들고. 성큼성큼. 쭈뼛쭈뼛. 나와 점점 가까워지는 여자의 얼굴엔 저 여자는 왜 내 자리에 앉아 있지 하는 의아함을 서려 있었다. 여자의 손에 든 기차표에는 나와 같은 호차, 같은 좌석 번호가 적혀있을 리가 없는데, 무슨 확신으로 저렇게 다가오는 걸까.
아마도 여자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눈치다. 끝내 내 옆에 서서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리, 여기 맞으세요?”
여자는 당신이 아닌 내가 착각한 것임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부드러운 억양에 숨겨놓은 채 말을 걸었다. 여자의 표정과 몸짓이, 도대체 왜 남의 자리에 앉아서 번거롭게 만드냐는 짜증을 전달하자 나 역시 일렁거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무엇보다 저런 이중적인 표지를 마주하는 건 유쾌하지 않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착각과 확신이 만들어 놓은 이런 상황을 그냥 받아넘길 수 없는 날카로운 상태란 말이다. 여자의 말에 짜증이 한번 올라오고, 나를 내버려두지 않는 타인의 침범에 짜증이 한껏 짜증을 내려던 참이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라도 갖춰야지. 당신의 생각이 맞을 가능성이 있음은 인정하니까요. 휴대전화를 꺼내 코레일 어플을 실행시킨 뒤 좌석 번호와 호차 번호를 재차 확인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네, 제 자리 맞는데요.”
하지만 여자는 약간의 소동이 마무리되길 바라는 내 마음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눈치다. 55번 제 자리인데요. (네, 그렇겠지요, 하지만 55번 좌석은 2호차에도, 3호차에도, 4호차에도 있다고요. 그리고) 여긴 1호차인데요?
아, 여기가 2호차가 아니구나. 여자는 그제야 진짜 자신의 자리를 찾아 떠나고, 나는 다시 나만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비록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여자는 결국 자신이 진짜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돌아갔을 것이다. 나도 여자처럼,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을 두고 싶다. 나의 글도, 나의 생각도, 나의 마음도, 나의 감정도. 그것들이 제자리를 잃어 혼란스럽다면 제자리에 두는 것으로 혼란을 가라앉히고 싶다. 모든 것이 낯익고 익숙한 곳에 잘 있었으면 올해 첫 우울이 찾아오지도 않았을테니.
아니, 어쩌면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은 그러길 바라는 내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모든 것에 있어야 할 곳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나는, 모든 것에는 제자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자유를 원하는 무엇인가를 끄집어 당겨 두려다 보니 반대로 올해의 우울이 찾아온 것은 아닐까.
올해의 첫 우울이 찾아온 것도, 쉽게 흔들리고, 쉽게 방향을 잃고, 쉽게 방황하는 하루가 이어지는 것도, 현실과 나의 착각 속에서 부조화가 일어나고, 있어야 할 곳을 찾느라 어디에 둬도 상관없을 것을 손에 한가득 쌓아 들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감정은 있어야 할 곳이 없는 눈치다. 있어야 할 곳이 있느냐 없느냐를 고민하고 있는 동안에도 짜증이라는 녀석이 문득 찾아왔으니까. 짜증은 자꾸 내게 말을 건넨다.
‘그래도 그렇게 짜증 낼 필요는 없지 않았어? 너도 가끔 착각하잖아. 그러면서도 그걸 이해 못 하니? 그녀가 얼마나 무안했겠어. 네 기분이 안 좋다고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이야.’
짜증이 한바탕 머물고 간 자리에는 이제 후회와 자책이라는 녀석이 바통을 이어받아 자리 잡는다.
‘그러게 왜 짜증을 내서는.’
그래, 너희들이 지금 있어야 할 곳이 내 마음이라면 어쩔 수 없지. 올해의 첫 우울은 그렇게 진한 여운을 남기고 몇 시간 동안 나와 함께 했다.
그리고 지금은, 우울도, 후회도, 자책도 모두 사라지고 홀로 남은 시간. 가만히 그때의 장면을 떠올려본다. 후회한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쓸어 담을 수 없겠지만, 후회라도 하지 않으면 오늘의 일을 반복할 것만 같아서 한바탕 생각 속에 빠져본다.
서툴게, 미숙하게 사는 게 인생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을 방패 삼아 매번 정당화하고 핑계 댈 생각은 없다. 한번 뒤뚱거리며 이 시간을 걸어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조금 더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으로, 앞으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으로 길어질지도 모르는 반성의 시간을 마무리 짓는다.
첫 책을 쓸 무렵, 남편이 이런 말을 했다.
“나중에 독자들이 당신에게 이제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평온하게 사느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할래?”
나는 당연하게 대답했다. 언젠가 저런 질문을 받는다면, 그때도, 지금도 내 대답을 변하지 않고 유효하다.
“아니요. 여전히 감정을 느끼고, 가끔은 감정을 낭비하고, 휘둘리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런 감정들에 오래 파묻히지 않고 금방 빠져나와서 일상으로 돌아올 수는 있게 되었습니다.”
한바탕 감정에 흠뻑 빠지고 나니 그때의 대답은 지금을 해명하기 위한 선견지명이었나 싶다. 지금은 우울의 깊이가 엷어지고 조금 더 괜찮아진 시간. 되돌아보니 아직 이 대답이 당연한 사실인지, 내가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면죄부인지는 아직 미정인 채로 떠돌고 있지만, 질문에 대한 답도 언젠가는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될 것이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확실한 건, 다만, 생각대로 살고, 글대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조금 더 나은 생각을 하고, 조금 더 괜찮은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
내 생각과 글이 면죄부가 아닌 사실이 되게 하려면 말이다.
우울과 함께 하는 일상은 가끔 이렇게 교훈을 남기고 떠난다.
Q. 지금 당신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나요? 그 감정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