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지켜준 말들
때로는 아주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질문의 답이 번뜩 솟아오른다. 내 마음 속 묵은 고민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 내려줄 ‘유레카’의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알았던 것은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 이 대답을 그때 들을 수 있었다면 어쩌면 나는 조금 덜 힘들고, 덜 슬프지 않았을까. 그리고 더 빨리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지금 내가 뒤늦게 나를 찾아온 답에 오랫동안 머무는 것은 더 돌아보고 싶은 찌꺼기가 남아있기 때문이고, 내가 겪었던 그 힘듦을 누군가는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과거를 마주 하고, 생각을 정리해나간다.
뒤뚱뒤뚱 걸어도, 당차게 말대답을 해도, 밥을 잘 먹어도 칭찬하며 하트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봐준, 그 무한 애정이 사라졌을 때, 나는 소리쳤다.
‘나 여기 있어요. 나 좀 봐주세요. 예전처럼 내게 사랑을 주세요.’
그러나 그것은 소리가 없는 외침이었다. 생각은 거칠어졌고, 행동은 요란해졌다. 나를 잃어갔고, 어느덧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 안에 들어앉아 있게 되었다.
‘누구세요?’
‘나? 모르겠어? 나는 너야. 네가 만들어낸.’
내가 만들어낸 또 다른 나는 영리했다. 소외감을, 외로움을 극복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학생일때는 높은 성적을 내면 되었고, 직장인일때는 일을 잘 하면 되었다. 그렇게 좋은 성적이나 높은 업무 성적으로 인정받으면 외롭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번아웃 증후군에 걸린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업무 성적으로 나를 인정받는 것이 내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봐. 사람들이 너를 쳐다봐주지? 내가 네 삶의 의미를 찾아준 거야.’
그가 찾아준 삶의 의미를 나는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를 통해 알게 된 내 삶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점점 더 나를 혹사시켰다. 인정받고자 하는 나의 욕심과 욕망이 나를 불타게 했다. 그러나 더 이상 내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집어넣을 연료가 없었다. 열정도, 욕심도, 행복도, 사랑도, 건강도, 하나 둘씩 집어넣고 나니 더는 내게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입사 3년만이었다. 내게 번아웃 증후군 혹은 권태기가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모든 것이 소진됐으니, 이제는 그저 살기 위해 견딜 뿐이었다.
“니르바나, 즉 열반(涅槃)이란 ‘번뇌의 불꽃을 끄다’라는 뜻이다.
내 마음의 고통은 욕심과 집착을 연료로 타오르는 불꽃이다.
인생은 영원하지 않다.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게임일 뿐이다.
빠르고 느리고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에게는 결국 집착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다.”
[철학으로 휴식하라] 중에서
고전을 좋아했던 내게 안식을 준 것이 있다면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고, 지나간 영화를 보는 것이다. 이런 취향 덕에 나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찾아보게 되었다. 영화에는 당시 기준으로 보면 괴짜인 선생님 한 명이 나온다. 교탁 위에 올라가고, 책을 찢어버리라고 하고, 야외수업을 하는 선생님의 행동보다 내 기억에 뚜렷하게 각인된 것은 바로 그들이 외치는 ‘카르페디엠’이라는 말이었다.
‘카르페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나는 이 문장을 흡수했다. ‘즐기다’라는 단어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판단한 것에 집중할 수도 있고, 혹은 순간적인 쾌락에 빠지는 것을 즐길 수도 있다.
누군가는 저 문장들을 보고 결코 허투루 보낼 수 없는 하루의 가치를 생각하며 착실하게 보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구는 지금 이 순간만의 유희를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 것 같음에도 - 오늘을 즐기는 방법으로 후자를 택했다. 일이야 뭐 내일해도 되고, 청소는 주말에 하면 되니, 오늘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을 중시하며 오로지 오늘 하고 싶은 것에 더 집중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예전의 성과 만능주의의 자세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을 즐기는 그 시간이 마냥 행복하지 않았다. 나의 일들이, 현실이 여전히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마음만 조금 편해졌을 뿐 어느 것 하나 나아진 것이 없었다. 그것은 즐기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고 방관하는 것이었다.
나는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고 나서 스스로 애써 외면해왔던 카르페디엠을 다시 정의 내렸다.
‘현재를 즐기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방탕하게 오늘 하루를 무의미한 것들로만 채우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과거와 미래에 종속되지 않고, 오직 오늘을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오랫동안 왜곡하면서 습관처럼 되어버린 과거의 행태를 벗어던지기 위해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기억하면 지금처럼 살 수는 없었다. 무력하게 눈이 떠지는 대로 일어나 멍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자는, 신생아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낼 수는 없었다.
언젠가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무엇으로 나를 돌아볼 것인가. 다시 말하면 나는 무엇을 남기고 죽을 것인가.
눈을 감는 순간 자신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는데, 그 파노라마에 나는 어떤 영상을 담을 것인가.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내가 진정으로 꿈꿔왔던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글을 쓰는 것이었다. 내게 허락된 삶을 기록하고, 이를 통해 누군가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글을, 책 한 권을 남기는 것이다.
이렇게 답을 찾으니 거짓말 같게도 나를 괴롭혀왔던 수많은 질문들이 조용해졌고, 마음속에서 요동치던 파도가 잠잠해졌다. 나를 번아웃에 이르게 한 또 다른 나도, 순간의 즐거움을 추구했던 나도 사라졌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면서 하루를 사니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현명한 자들은 끊임없이 ‘죽음을 기억하라.’고 충고한다.
그래야 헛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되는 까닭이다.
지금이 그대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그대의 ‘나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물음에 답을 찾는 각오로 살아갈 때, 비로소 삿된 고민들은 내 마음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철학으로 휴식하라] 중에서
(이미지 출처: 탐 위안 위안,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