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 - 사랑을 느끼는 감각

사랑을 수집하는 일상에 대하며

by 임경미


“헤어지고 싶으면 날 똑바로 보고 내가 싫다고 말해.”

“...”

“거봐, 당신은, 당신은 나 사랑해.”

“싫어요. 당신이, 서도재 씨가 싫어. 처음부터 그랬어.”

“나, 그거 다, 고백으로 들리는데.”


여자는 남자를 밀어냈고, 남자는 여자를 붙잡았다. 여자의 입에서는 결국 당신이 싫다는 말이 나와버렸지만, 남자는 그럼에도 그 말을 믿지도, 뒤돌아 가는 여자를 놓아버리지도 않았다.

드라마 <뷰티 인사이트>를 보면서 주인공이 된 것처럼 몰입하다가, 사랑하지 않음을 확인하려는 남자의 말에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안돼! 하지 마. 그럼 끝난다고!”

야속하게도, 이런 마음을 몰라주고 여자의 입에서 싫다는 말이 나왔을 때, 또 다시 주인공이 된 것처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런 바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해버렸어. 그러면 진짜가 되어버린단 말이야.




사랑은 사랑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나 사랑해?” “얼마만큼 사랑해?”

연인에게, 인생의 동반자에게 저런 질문을 던지며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의 크기를 측정하고 싶었다.

“그럼, 사랑하지.”

뒤에 ‘사랑하지’라는 말이 붙어 있지 않으면 서술어가 꼭 붙은 완성형 문장으로 말해달라며 사랑을 확인했고, ‘아, 이 정도면 충분히 크겠구나’ 싶은 정도의 비유가 들어가 있는 문장으로 사랑의 크기를 측정했다.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원태연 시인의 문장이 이토록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유는 나처럼 사랑을 자꾸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많아서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 역시 남편이 그의 시를 모티브로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내며 사랑을 고백했을 때(정확하게 말하면 반강제적인 고백에 가깝지만), 여하튼 입 밖으로 나온 사랑의 말을 통해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했고, 그제야 한껏 기뻐진 내 얼굴에도 미소가 서리게 됐다. 사랑이 담긴 말에 의해 비로소 나는 사랑 속에 있었다.


그런데 저 남자 주인공, 그러니까 서도재 씨는 어떻게 당신이 싫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네 말이 고백처럼 들린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드라마니까 가능한 이야기라고, 현실에선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사랑을 말하고 들어야만 사랑이 있다는 것을 인지했던 나는 그 모든 것이 허구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데다가 추상적인 개념을 정의해 단어로 만들어 놓은 것이지 않던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이야 굳이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지 않아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사랑 같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도 느낄 수도 없어서 그것이 있음을 명확히 확인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더욱더 말하고 듣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야 했다. 그래야 더 쉽고, 빠르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한계였다. 내가 받을 수 있는 사랑을 줄이는 한계이자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을 제약하는 한계.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의 한계. 고백하자면 이 한계는 사실, 사랑을 느끼면서도 다시 한번 확인받고 싶은 내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꾸만 사랑을 직접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면 사랑은 더 다양하게 느낄 수 있고, 더 많이 인식할 수 있다.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끼고, 때로는 촉으로 아는, 인간은 5개의 감각을 통해 소통하고, 가끔 어떤 사람들은 제6의 감각이라는, 육감(六感)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미 5~6개의 감각을 타고난 우리이기에 굳이 듣는 감각에만 의지하지 않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말은 그 어떤 감각들보다 직관적이어서 느끼고 받아들이는 데 매우 편리하다. 그러나 다른 감각들은 전달되는 정보를 유의미하게 처리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들 안에 담긴 의미와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더 관찰하고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알 수 있고, 더 정확하게 알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자꾸 말에만 의존하게 된다. 편하게 알고 싶고, 더 명확히 알고 싶어서. 내 마음대로 오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이런 편리함에 자꾸 익숙해져서 말이 충족해주는 감각에만 익숙해지면 결국 받아들이는 정보도, 느낄 수 있는 것도 줄어들게 된다. 내게 보내온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허공에 흘려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을 더 풍요롭게 느끼기 위해서는 행간에 숨은 의미를 파악하며 책을 읽듯, 행동과 행동 사이, 표정에, 몸짓에 담긴 의미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오감으로 사랑을 느끼고, 오감으로 사랑을 전달할 수 있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고, 무엇을 통해서든 알 수 있다. 새벽녘 발밑까지 흘러내린 이불을 끄집어 올려 덮어주는 손길에, 놀이터를 뛰어노는 아이를 바라보는 눈길에, 한쪽으로 기울어진 우산의 각도에, 엄마를 보러 가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한 톤 올라가는 목소리에,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풍겨오는 고소한 밥 냄새에, 집사의 허리에 꾹꾹이를 해주는 고양이의 발놀림에, 주인과 보폭을 맞추며 걷는 강아지의 발걸음에, 사랑은 촉각에도, 청각에도, 시각에도, 미각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랑한다는 말로 전하지 않았어도, ‘사랑해’라는 음성의 모양이 아닌 다른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다.


(비록 드라마 속 주인공이지만) 어쩌면 서도재 씨는 이미 사랑을 모든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싫다고 말하는 사람의 흔들리는 눈빛에, 떨리는 목소리에, 자꾸 흐르는 눈물에 그 말이 마치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싶다는 고백처럼 들렸을 것이다.



사랑은 보이는 것이고, 느끼는 것이고, 맡는 것이고, 듣는 것이고,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지 예리하지 않은 직감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가만히 오감에 집중해보면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과 생각들이 전해진다. 오감으로 사랑을 느낄 때 더 풍요롭게 사랑을 느끼고 더 많은 사랑을 줄 수 있다. 그렇게 사랑의 풍요 속에서 우린 살아갈 수 있다.




지금 그가, 마주 보고 앉은 책상에서 자신의 노트북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가 타이핑을 할 때마다 노트북 모니터가 자꾸 부딪히고, 노트북의 벌어진 각도가 점점 좁아지는 것을, 그래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는 내 허리는 점점 굽고, 목이 점점 길게 빼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 같다. 가만히 자신의 노트북을 앞으로 당겨주면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고, 허리와 목은 둥근 아치 모양에서 곧게 편 직선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또 얼마 후 그가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한다.

“이제 잠깐만 스트레칭 하자. 어깨도 돌리고, 허리도 돌려봐.”

무심한 그의 말이 어떤 뜻이 담겼는지, 어떤 감정이 담기고, 어떤 마음이 담겼는지 조금은 더 잘 알 것 같다. 그것은 사랑이었고, 사랑이고, 사랑일 것이다.


사랑에 무뎠던 감각들이 벼려질수록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지.

그렇게 조금씩 나는 사랑의 감각을 배우며 내 주변에 가득한 사랑을 하나둘 수집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이미지 by bingngu93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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