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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경미 Jan 10. 2023

작가는 언제나 글을 쓰는 사람인가

글 쓰지 못한 하루를 보낸 자를 위한 변명

헤밍웨이 일화를 읽다가 등골에 땀이 쭉 흘렀다. 가장 짧으면서도 슬픈 소설을 써보라는 친구의 요청에 그는 끄적였고, 냅킨엔 여섯 단어의 짧은 글이 남았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아기 신발 팝니다. 한 번도 신은 적 없습니다.)”


헤밍웨이가 그의 명성답게 이런 문장을 생각해낸 덕분에, 이야기를 들은 나는 감동을 넘어 질겁하고 말았다. 맙소사, 말하면 뚝딱 글을 쓸 수 있다니, 게다가 잘 쓰기까지 하다니.     


글을 쓴다고 하면 사람들이 갖는 흔한 기대, ‘저 사람은 글을 잘 쓰겠구나’ 하는. 그 기대가 옳은지 틀린 것인지 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기대는 ‘글을 뚝딱뚝딱 쓰겠구나’ 하는 것.

깨고 싶지 않았지만 깨트릴 수밖에 없었던 글 쓰는 자에 대한 기대를 알고 있기에 매일 글 쓸 수 없는 현실과 감동스런 글을 써내지 못하는 현실에 한 번 좌절, 두 번 좌절하고 만다.

그리고 세 번째 좌절은 요즘 글이 안 써진다고 하소연할 때 돌아오는 반응에서 비롯된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 혹은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이어지는 말이란,

“야, 그래도 작간데, 설마…….”


저 말 줄임표 뒤엔 과연 어떤 생각이 담겨 있을까. ‘나도 가끔 일이 안 풀릴 때가 있는데, 너도 마찬가지겠구나’ 하는 이해가 담겨 있으면 좋으련만 상대의 눈빛엔 그런 기색이 담겨 있지 않아 되레 민망할 뿐이다.


그러나 상대의 반응보다 더 비수처럼 꽂히는 것은 글태기(글+권태기) 혹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자기 자신을 어디까지 깎아내릴 수 있는가 하는 빈약한 자의식을 마주하는 상황이다.


수려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면서 왜 쓰질 못하니,

꾸준히 쓰는 건 도대체 왜 못 하니.


뛰어나지도 꾸준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실력을 마주하며, 초창기에는 자괴감을 몇 번이나 느꼈고, 이 길이 내 길이 맞는지 의심도 밥 먹듯 했었다. 냉정한 자기 성찰이라고 포장했지만, 아팠고 괴로웠다. 그리고 아픔 뒤에 깨달은 사실은 이런 종류의 자기 성찰은 세상 무용하다는 것.     


일정한 주기처럼 찾아오는 글 침체기를 겪어내며 알게 된 것은, 이 또한 다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뻔하지만, 그리고 세상에 이미 널린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이건 진짜이며 이미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증명해낸 ‘참’이다.     


글을 꾸준히 쓰지 못해(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니라 뭐라도 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다.) 고민하고 있는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또 하나의 뻔한 진실은, 우리는 AI가 아닌 인간이라는 것. 그래서 어떤 키워드만 주어지면 문장을 만들어내는 AI처럼 글을 쓸 수는 없다는 것. 무엇보다 하고 싶은 말이 아닌 주어, 목적어, 서술어 짜맞추기 같은 글쓰기를 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뻔한 진실.

AI가 아닌 인간이 나는, 애석하게도 천재도 아니고, 냉정하게 말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천재가 아닐 확률이 높다. 우리가 만약 천재였다면 이미 어린 나이에 능력이 드러나서 일찌감치 저 앞을 걸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글이 안 써져서 스트레스받으며 하얀 바탕화면과 눈싸움 하고 있는 시간은 비단 나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당신에게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베토벤도 그의 악보를 몇 번이나 구겨 던졌을 것이고, 피카소도 몇 번이나 캔버스를 죽죽 그었을 것이며, 헤밍웨이도 쓰고 다시 쓰는 과정을 통해 한 권의 책을 완성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지만, 이렇게 믿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면 이렇게 믿어보는 거다. 가끔은 글 쓰는 여우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작가라고 매일 글을 쓸 수 있을까. 학생이라면 공부가 막히고, 직장인이라면 일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는 것처럼 작가에게도 글이 안 써지는 시기가 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 시기가 찾아왔을 때 내 실력과 자질을 의심하지 말길 바란다. 다시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춤출 날이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지금의 내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주면 된다. 그러다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언제 그랬냐는 듯 글이 써지고, 오히려 막힌 부분이 뻥 뚫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오늘도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다, 결국 노트북의 전원을 끄고 종이와 펜을 준비해 눈앞에 대령해 놓았다. 할 말이 없음을 또다시 경험하는, 인간이자 평범한 인간인, 그러나 작가로 살고 싶은 나를 자각한다. 그러다 우연히 글이 써지지 않아 고민이라는 동료 작가의 하소연을 듣고 지금 이 글을 썼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꾸준히 쓸 수 없는 시기를 견디는 방법을 나누며, 언젠가 또 글태기가 찾아왔을 때 다음을 기약하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는 내가 되길 바라며 말이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땐 잠깐 산책을 하거나, 때마침 배가 고프다면 밥을 먹거나 누군가가 그리워진다면 편한 사람과 수다라도 떨어보자. 새로운 길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우연한 기회에 열릴 것이다. 가끔은 시간의 축적으로 알맞게 익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말이다. 문장은 제 마음대로 왔다가 어느 순간 또 사라지겠지만, 그렇게 한 편 두 편 글을 쓰다 보면 세 편 네 편도 쓸 수 있게 될 것이고, 글태기를 버티고 이겨낸 그 시간이 녹아든 인생 이야기가 완성될 것이다.




글 쓰는 모든 사람들의 2023년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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