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어떻게 써야 될까

매일 은인 노릇만 하는 당신에게

by 임경미


“네가 진짜 내 생명의 은인이야. 그래도 너는 이해해줘서 고마워. 정말 다행이야.”

매번 같은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을 때면 턱 끝까지 올라오는 질문이 하나 있다. 도대체 그 사람에게는 뭐가 다행이었을까.

내가 자신의 은인처럼 행동해준 것이? 다른 사람은 이해못하는 것을 받아주는 나의 남다른 여유로움이? 그것도 아니면 까다롭지 않게 그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우리의 관계가?


한 강연에서 강연자가 말한 어느 누구의 사례가 기억났다.

배가 고파서 자신이 먹을 떡볶이를 사갔는데, 룸메이트가 마침 내가 배고픈 거 알고 사온거냐며 반가워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어느 누구는 떡볶이 1인분을 양보하고 혼자 방으로 들어가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 자신이 고작 떡볶이 1인분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꼬리 질문까지.


그런데 사람 마음이 원래 그런 거 아닌가? 내 것 양보하는 건 괜찮지만, 그것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면 속상하고 서운한 것.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애당초 당연한 마음이라는 게 존재하겠느냔 말이다. 당연히 괜찮은 마음의 이면에는 사실, 그만큼 상대를 배려하는 희생이 있었고, 나보다 상대를 더 아끼는 사랑이 있었고, 때로는 그런 마음을 네가 알아주길 바라는 기대가 있었고, 욕심일지는 몰라도 너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길 바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당연’이라고 포장하는 순간, 이런 마음의 이면들은 감촉같이 사라져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바람을 바라는 눈은 당연함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 안에서 점점 희미해져 간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이런 기억이 있다. 나보다 어린 사촌동생이 내가 신나게 가지고 놓던 장난감이 마음에 들어서 그것을 내놓으라고 투정을 부릴 때.

“이건 내가 먼저 가지고 놓고 있었으니까 넌 이따가 가지고 놀아!”라는 나름 이성적인 말로 설득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떼쓰는 소리만 더 커질 뿐. 30분만, 그러 20분만, 5분만 더 가지고 놀다 주겠다고 타협을 해도 동생의 떼는 멈추지 않았고, 급기야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울음소리를 들을 집안 어른은 “더 나이 많은 네가 양보해야지! 마음을 그렇게 쓰면 쓰니?” 하면서 내 손에서 장난감을 빼앗아 동생에게 넘겨주었다.


마음을 그렇게 쓰면 쓰니?

마음은 어떻게 써야 할까.


내 마음이 어떤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탐탁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고, 배가 고파도 떡볶이를 내어주고, 내가 가지고 놀고 싶어도 나이 어린 동생에게 장난감을 내어줄 수 있게, 그렇게 마음을 써야 잘 쓰는 것일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국 내 마음이 아프다. 네가 이해 좀 해줄 수 있을까? 네가 더 나이가 많으니까 당연히 양보해야지, 동생을 배려해야지. 이런 말들에 내 마음이 쓰라리고, 불편하다. 마음을 잘 쓰려니 줄곧 입안이 쓰다.


나보다 상대를 더 배려했던 그 마음은 오히려 나를 더 아프게 만든다. 아픔이 상처를 만들고, 한번 상처가 난 자리는 아물어도 흔적이 남는다. 그리고 또 다시 그 흔적 어딘가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기면 그때는 단순히 흔적이 아니라 흉터를 남긴다.

조금 우울하고, 기분이 다운된 수준의 흔적이 아니라 나를 스스로 보호할 힘을 잃거나 내 목소리를 말하고 싶어져도 말할 수 없게 되거나 정반대로 냉혈한이 되는 그런 흉터가 남는다.

때론 타의에, 때론 자의에 너를 위해 까칠한 가시를 숨겨 넣었지만, 그 숨긴 가시에 내가 찔리고 주머니가 터져 물이 줄줄 새어버린 것처럼, 당연히 괜찮아 보였던 관계가 점점 무너져 내린다. ‘당연’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그러니까 정말 다행인 상황을 베풀어 주는 역할도 적당히 하면 어떨까. 같은 상대가 매번 나에게 똑같은 역할을 강요한다면 더더욱 적당히 하는 노력을 해보면 좋겠다. 한 번으로는 너무 야박하다면 딱 세 번만 참고 기다려보는 거다.

세상에서 내가 다행인 상황보다 더 다행인 것은 없으니까. 내가 선물해준 다행으로 인해 오히려 내가 괴롭다면 그런 희생은 하지 않아도 된다.

감사와 다행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관계는 결코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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