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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경미 Jun 27. 2022

다리 밑의 남자

거리와 장애물이 만들어낸 변화에 대하여


그는 다리 밑에 서 있었다. 차들이 질서 있게 돌아나갈 수 있도록 일부러 만들어 놓은 넓직한 공간의 끝이 그가 서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를 보고 있었지만, 호의를 담은 그의 시선이 누구를 향하는지, 그가 어떤 말을 건네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그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버스 안에 앉아있었고, 그는 길이 아닌 곳의 그 끝에 서 있었으니까.


20평쯤 될 것 같은 공간의 끝에 선 그는, 마치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혼자 웃고, 손을 흔들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따금 한 손에 들려있는 뿌연 막걸리도 마시면서.

아무래도 그의 표정이 좋아 보였다. 운 좋게 막걸리 한 병을 얻었으려나, 무슨 즐거운 소식이라도 있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드는 밝은 표정의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의 웃음이 내게 전염되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를 따라 웃으려다 이내 입꼬리 올리기를 그만두고 계속 그를 바라봤다. 이런, 쉽지 않은 입꼬리 같으니라고.     


그가 내 입꼬리 사정을 알았던 것일까. 웃고 있던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던 눈엔 분노가 가득했고, 부드럽게 살랑거리던 손짓은 과격하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의 거센 몸짓이 이어질 때마다 막걸리병 안의 뿌연 액체도 요란하게 흔들렸다. 내가 보고 있는 그는 야누스인 것일까. 어딘가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삿대질을 하는 그를 보자니 덜컥 공포감이 밀려왔다. 저러다가 돌연 공격해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함께.     

그러나 마음은 이내 평안해졌다. 나는 버스 안에 있었고, 그는 자신의 무대 끝에 서 있었으니까. 우리의 물리적 거리가 대략 2m, 그리고 나는 버스 안에 있음으로써 물리적인 장애물을 하나 더 두고 있는 셈이었으니 그가 나를 공격하더라도 유의미하게 성공할 확률은 드물었다.


그와 나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우려와 걱정을 무기력하게 만들자 어느덧 그의 표정 너머의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분노하는 그의 표정에는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허공을 찌르는 삿대질에서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왠지 모르게 그가 불쌍하고 슬퍼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그는 왜 화가 났을까. 무엇이 그를 이곳으로 내몰았을까. 어디를 향한 친절이었고 분노였는지 알 수 없었던 질문들에 대한 답도 어쩌면 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삶에, 자신의 사람에, 자신의 세상에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먼지가 잔뜩 낀 남루한 옷차림, 때를 씻어내지 못한 거친 피부, 더운 날씨에 누더기 같은 옷을 겹겹이 껴입고 서 있던 그의 옆에는, 그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을 담은 상자 여러 개가 놓여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명확해졌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나를 쏘아보며 언성을 높이는 사람을 만날 땐 등줄기에 땀이 흘렀고, 쇠꼬챙이를 들고 때릴 듯 위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손발이 후들거릴 정도로 벌벌 떨기도 했다. 매번 홀로 있는 시간이었다. 남편과 함께 있을 때는 겪어보지 못한 공포스런 상황은 내가 혼자 있을 때면 가끔 일어나고는 했다. 그들의 삶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이 보이는 공격적인 행동은 내게 분노와 공포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유쾌하지 않은 경험과 그런 경험들이 만들어 낸 학습된 감정과 판단들. 그것들은 내게 나를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평소라면 최대한 안전거리를 확보하며 어디론가 피했을 내가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그에게 평소 느끼지 못한 어떤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와 나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와 장애물이 없었다면 그저 무섭고 두렵고 나를 해할 수도 있는 존재로만 다가왔을 그의 다른 부분이 보였다. 왠지 슬프고 괴로운 그의 인생이, 그의 표정이 말하는 또 다른 목소리가.     




감정이 볼 수 있었던 것을 보지 못하고 만들고, 물리적 거리가 볼 수 없던 것을 보게 만드는 경험. 이 경험이, 내가 오랫동안 나만의 색깔이 덧씌워진 세상을 보고, 나만의 필터로 걸러진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음을 깨닫게 했다. 내가 느끼는 심리적, 물리적 불안전함이 나를 얼마나 편협하게 만드는지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 어떤 편견도, 필터도 없는 상태로 모든 것을 보겠다는 다짐의 결과물을 지금 당장 내놓지는 못하겠다. 하나씩 알아차린 대로, 조금씩 괜찮아지는 대로, 내 세상이 안전한 곳임을 깨달으며 나아지는 수밖에는.

그러기 위해 내가 매몰되어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한두 발걸음 물러나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해볼까. 



(사진 출처: 믹스의 이미지 Pixabay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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